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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4, 2013

아콰틴트 ( Aquatint )


Maitha Abdeljalil,Legends, etching and aquatint

아콰틴트 ( Aquatint )
 동판화의 일종. 아콰틴트(물,Aqua)는 수채화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뜻에서 나왔는데 판면에 송진가루를 떨어뜨린 후 뒷면에서 열을 주어 녹여 정착시키고 부식액에 넣어 부식시킨다. 송진가루가 녹은 부분이 부식되지 않는 성질을 이용하는 것인데 송진가루외에도 아스팔트분말이나 래커스프레이 등도 이용할 수 있다. 소프트그라운드에칭방식제에는 빨리 건조되고 딱딱한 괴막이 형성되는 것과 눅눅한 것이 있는데 크레용이나 콘테의 느낌 또는 지문이나 나뭇잎,천의 조직 같은 효과를 얻는데 이용된다. 리프트 그라운드에칭리프트라는 말은 '들어올린다'라는 말인데 여기서는 '떨어져 나간다'는 해석이 적절하다. 이 기법의 원리는 금속면에 완전히 정착되는 것과 불안정하게 정착되는 것을 이용해서 붓의 터치나 자우로운 선,면을 얻고자 할 때 사용된다. 설탕포화용액이나 아라비아고무용액을 섞은 것을 판면 위에 붓으로 그려서 완전히 말린다. 이것을 방식제를 부어서 막을 입히고 말린 다음 조금 따뜻한 물에 넣어 붓으로 그린 설탕덩어리나 아라비아고무를 녹여 금속면을 노출시킨 후 부식시키는 기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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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즘과 앙데팡당전



아카데미즘과 앙데팡당전

 아카데미는 예술가난 문필가 또는 학자 등 전문가들로 조직된 단체로 그 중에서도 특히 교육적 기능을 갖추고 있는 집단을 가리키는 말이다. 미술 아카데미는 중세의 장인제도로부터 작가들을 해방시키고 미술가의 신분을 상승시키기 위해 르네상스시기에 설립되었다. 그런데 아카데미는 이러한 원래의 목적과는 달리 아카데미에서 규정한 원칙과 양식에 충실히 따르지 않는 작가나 작품을 철저하게 배제하는 방향으로 나갔다.
 그 결과 아카데미는 미술의 발전에 저해가 되는 요소로 자리잡게 되었다. 미술사적으로 아카데미즘은 가장 강력한 아카데미, 즉 고전적 규범에 충실한 고전주의적 경향을 지칭하지만 시대에 따라 주류의 미술을 형성하고 있는 미술일반을 가리키기도 한다. 앙데팡당은 이 아카데미에 반대하는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예술가협회를 말한다. 앙데팡당전은 1884년 파리의 아카데미전에서 낙선한 작가들을 중심으로 반아카데미즘 화가들이 함께 모여 개최한 전시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들은 엄격한 심사와 타성에 젖은 살롱전에 반대하여 심사가 없는 자유로운 전시를 표방하고 나섰다. 고흐, 세잔, 마티스 등이 모두 이 앙데팡당전 출신이다.

 20세기에 이르기까지 각 시기마다 앙데팡당전은 새로운 미술의 포문을 열어주는 역할을 했다. 전통이 묶어 놓은 상상력을 해방시키고 생생한 미술을 대중들에게 가감없이 직접 전달한다는 점에서 많은 작가들에게 환영을 받았고, 그런 앙데팡당전의 취지를 따르는 전시들이 세계각국에서 개최되고 있다. 앙데팡당전은 파리에서도 현재까지 매년 봄에 개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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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3, 2013

아상블라주 ( Assemblage )



아상블라주 ( Assemblage )

 폐품이나 일용품을 비롯하여 여러 물체를 한데 모아 미술작품을 제작하는 기법 및 그 작품. ‘아상블라주’란 프랑스어로 집합·집적을 의미하며, 특히 조각 내지 3차원적 입체작품의 형태를 조형하는 미술상의 방법을 말한다. 종이나 베의 조각 등을 화면에 풀로 붙이는 큐비즘의 콜라주에서 비롯되었지만, 콜라주가 평면적인 데 대하여 아상블라주는 3차원적이다. 1961년 뉴욕에서 열린 아상블라주전(展)의 기획자 W.사이츠는 “아상블라주는 무엇보다도 먼저 예술품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물체의 집적이어야만 한다”고 정의하였다. 피카소의 《압생트 술병》(1912) 등이 선구적 작품이지만, 본격적인 개화(開花)는 다다이즘 및 초현실주의, 특히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네오다다이즘, 팝아트, 누보레알리즘 및 환경예술 등에서 이루어졌다. D.스페리(1930∼ ), F.아르망(1928∼ ) 등은 폐품을 소재로 예술화한다는 데서 더 나아가, 오히려 ‘잡동사니’ 폐품이 지닌 표현력을 끌어내려는 데 예술활동의 중점을 두고 있다. 또한 공업제품의 폐품을 주로 사용한 정크 아트(junk art)도 이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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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방가르드 / Avant-Garde(프)

아방가르드(Avant-Garde)


  아방가르드의 기원
 예 술이 시대를 앞서간다는 생각은 19세기 이후 예술가들의 세계내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널리 유포된 일종의 통념이라고 할 수 있다. 시대를 앞서가는 예술에 부여된 명칭이 ''아방가르드''이며, 적어도 지난 세기동안 이 용어는 예술가들의 자율적 활동을 강화하는 가장 혁신적인 이념이었다. 전통의 권위에 대한 강력한 반항과 거부감을 바탕으로 한 아방가르드의 이념은 "파괴하는 것은 곧 창조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한 바쿠닌(M.Bakunin)의 무정부주의적 공리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즉, 파괴에 의한 창조는 모두 반전통적이고 극단적인 운동을 포괄하는 하나의 개념영역으로서 아방가르드의 활동을 요약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정 치·문학·예술·종교 등에서 자기의식적으로 앞선 위치를 표시하기 위해 도입된 아방가르드란 용어는 이미 중세시대부터 사용되었으나 이 말이 그야말로 시대를 앞서간다는 의미에서 일관성있게 사용된 것은 근대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아방가르드란 용어가 최초로 공개적으로 사용된 경우를 보면 프랑스 혁명의 전투적 열기에서 1794년 경에 생겨난 간행물 즉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구호를 일종의 상징처럼 새겨 놓은 ''동부 피레네 산맥의 전위부대(L''Avant-garde de l''armee des Pyrenees orientals)에서 최초로 이말을 잡지 제목으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아방가르드란 개념은 그 본래의 의미를 전투적인 비유에서 이끌어 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이며 평론가인 생 시몽(Saint Simon)이 사회를 개혁하고, 억압받는 서민의 삶을 향상시키는 사회와 과학예술의 총체적 노력에서 예리한 칼날과 같은 예술의 역할을 비유해 처음 인용하였다. 1790년대 이후 아방가르드는 정치적 사상에 있어서 혁명적, 미래지향적, 유토피아적 사상, 태도, 경향에 대한 은유로서 빈번하게 등장하였으며, 특히 1830년 경 프랑스에서 에밀 바로(Emile Barr-ault)와 같은 생시몽주의자들에 의해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정치적 의식과 입장을 표방하는 용어가 되었다. 즉, 아방가르드는 정치에서 아나키의 특성을내포하고 미술에서는 새로운 것을 실험하며 끊임없이 전통미술에 반발하고 혁명의 깃발을 들고 앞에 달려가는 미래의 뱅가디즘 즉 진보의 미술을 뜻한다.
 그 후 아방가르드는 라베르당(Gabriel-Desire Laverdant)에 의해 분명하게 미학적 의미를 지닌 용어로 사용되었다.

  아방가르드(시민사회에 있어서 예술의 자율성의 문제)
 역 사적 아방가르드 운동들을 통해 사회적 부분체계로서의 예술은 자기비판의 단계에 접어들게 된다. 유럽의 아방가르드내에서 가장 급진적인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다다이즘은 그 이전의 예술적 조류들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시민사회에서 발전되어온 제도예술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하게 된다. 여기서 제도예술이라는 개념은 예술을 생산해내고 분배하는 장치뿐만 아니라 어느 일정한 시대에 있어서 예술에 대해 지배적인 생각들, 작품의 수용을 본질적으로 결정짓는 그러한 생각들까지도 포함하여 지칭한다. 아방가르드는 그 둘 모두에 대해서, 또한 자율성의 개념으로 기술되는 시민사회에 있어서의 예술의 상태에 대해서도 거부하는 입장을 취한다. 유미주의의 예술의 상태에 대해서도 등을 돌린다. 유미주의에서 예술의 실제생활적 관계들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나온 연후에 한편으로는 비로소 미적인 것이 ''순수하게'' 전개될 수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율성의 또다른 한면인 사회적 무용성(無用性)이 인식될 수 있게 되었다.
 예 술을 실제생활로 되돌려 보내는 것을 목표로 삼는 아방가르드적 저항을 통해 자율성과 무용성 사이의 연관성이 드러나게 된다. 이로써 시작된 사회의 부분체계로서의 예술의 자기비판은 지나간 예술단계들에 대한 ''객관적 이해''를 가능케 해준다. 이를테면 사실주의 시대에는 예술의 발전이라는 것은 묘사작업을 더욱 더 현실에 접근시킨다는 관점 아래에서 해석되었던데 반해 이제 이러한 해석은 일면적인 것임이 드러나게 되었다.
 예술이 모든 실제생활과의 연관으로부터 사실상 완전히 분리되어 나온 연후에 비로소 두가지 사실의 부르조아 사회에서의 예술의 발전원리를 형성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 하나는 예술이 점진적으로 실제 삶의 문맥에서 분리되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특수한 체험 영역, 즉 미적인 것이 분화되는 것이다.
 자 기비판이 가능하기 위한 역사적 조건들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해서는 마르크스의 텍스트는 아무런 직접적인 답변도 제시해 주고 있지 않다. 그의 텍스트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은 단지, 자기비판은 이 비판이 겨냥하는 사회구성체 내지 사회적 부분체계가 충분히 분화되어야 한다는 점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일반적인 단어일 뿐이다. 시민사회의 자기비판을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탄생이 전제된다. 다시 말해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탄생함으로써 자유주의를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인식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른바 자기비판은 실천적으로 수행할 것이 역사적 아방가르드 운동들의 공적이다.
 자율성이라는 범주에 대한 논의는 지금까지 어려움을 겪어야 했는데, 그 까닭은 자율적 예술작품이라는 개념속에서 통일체로서 여겨졌던 여러 하위 범주들이 아직 확실하게 해명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개개의 하위 범주들이 전혀 동시적으로 발전되어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한때는 이미 궁정예술이 자율적인 것처럼 보이고 또 어떤 때에는 시민예술이 비로소 자율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게 된 것이다.

 1 ) 예배적예술(보기:중세 전성기의 예술)은 예배의 대상으로 쓰인다. 예배적 예술은 종교라는 사회적 제도 속에 완전히 편입된다. 생산은 수공업적·집단적으로 이루어진다. 수용방식도 역시 집단적 방식으로 제도화되어 있다.

 2 ) 궁정예술(보기:루이14세 때의 궁정예술)도 역시 엄밀하게 규정된 사용 목적을 지니고 있다. 즉 궁정예술은 위신을 대변하는 대상으로서 영주들의 명예나 궁정사회의 자기표현을 위해 쓰인다. 예배적 예술이 성직자들의 실제생활의 일부였던 것처럼 궁정예술도 역시 궁정사회의 실제생활의 일부였다. 궁정예술이 예배적 예술과 다른점은 특히 생산의 영역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다시 말해 예술가가 개인으로서 생산활동을 하며 자신의 활동의 개별성에 대한 의식을 발전시키게 된다. 이에 반해 수용은 여전히 집단적인 성격을 띤다. 그렇지만 모임의 내용은 더 이상 어떤 예배적인 것이 아니라 사교(社交)적이다.

 3 ) 시민예술은 단지 시민계급이 귀족들의 가치관을 그대로 넘겨받는 한에 있어서만 위신을 대변하는 기능을 갖는다. 시민예술이 진정으로 시민적이라면 그것은 자신이 속한 계급의 자기이해를 객관화한 표현물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술에서 분명하게 표현된 이러한 자기이해의 생산과 수용은 더이상 실제생활과 결부되지 않는다. 이것을 하버마스는 잔여 욕구들, 즉 시민사회의 실제생활에서 밀려나버린 욕구들의 만족이라고 불렀다. 시민예술에 이르러서는 생산뿐만 아니라 수용도 개인적으로 이루어 진다.

  유럽의 아방가르드 운동들은 시민사회에서의 예술의 자유에 대한 공격으로 규정지을 수 있다. 여기서 이전의 예술의 특성이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실제생활로부터 유리된 것으로서의 제도예술이 부정된다. 전위주의자들이 예술은 다시 실천적으로 되어야 한다는 요구를 제기한다고 할 때, 이때의 요구는 특수한 예술적 내용과 마찬가지로 작품의 영향을 결정짓는 요소인, 사회 내에서의 예술적 기능방식을 겨냥한 요구이다. 전위주의자들이 의도하는 것은 예술은 바로 그러한 실제생활 속으로 통합시키는 일이 결코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전위주의자들은 유미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합목적적으로 조직된 세계에 대하여 거부했던 것이다. 전위주의자들이 유미주의자들과 다른점은, 그들은 예술로부터 새로운 실제생활을 조직하려고 시도한다는 점이다. 이 점에 있어서도 유미주의는 아방가르드의 의도에 대한 필수적 선행 조건임이 판명되고 있다. 개별적 작품의 내용들에 있어서까지 전적으로 기존 사회의 실제생활로부터 분리된 예술만이 새로운 실제생활로 조직되어 나갈 수 있는 중심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아방가르 드는 가장 극단적인 표명들을 통해서일지라도 그러한 개인적 성격에 대하여 창작의 주체로서 집단을 대립시키는 일 따위는 하지 않으며, 오히려 개인적 생산이라는 범주를 철저하게 부정하는 일로써 맞선다. 뒤샹이 1913년에 대량 생산된 오브제(변기,병건조대)에 서명을 하고 그것들을 미술전시회에 보냈을 때, 이로써 개인적 생산이라는 범주는 부정된 셈이 되었다. 뒤샹의 도전은 서명된 작품의 질보다는 서명 자체가 더 중시되는 예술품시장의 정체를 폭로하는 것뿐 아니라 개인을 예술작품의 창조자로 여기는 시민사회에서의 예술의 원칙 자체도 철저히 문제삼는다. 뒤샹의 기성품들은 예술작품이 아니라 선언이다.
 역 사적 아방가르드 운동은 자율적 예술의 본질적 규정들, 그러니까 실제생활로부터 예술이 유리된 점, 개인적 생산 및 이로부터 분리된 개인적 수용 등을 부정한다. 아방가르드 예술이 실제생활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자율적 예술을 지양하려고 한다. 이러한 지양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자율적 예술을 그릇되게 지양하는 형태라면 몰라도 시민사회 내에서도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그와 같은 그릇된 지양 형태가 존재한다는 점은 오락 문학과 상품 미학이 입증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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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1, 2013

아르카익 미술 (Archaic Art)



아르카익 미술 (Archaic Art)
 아르카익 시기의 미술은 단순한 외부 묘사보다 인체의 구조적인 부분을 표현하는데 관심을 가졌다. 초기 아르카익 시기의 작품들은 이집트 조각의 영향을 많이 받아 ‘정면성’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조각상의 얼굴에 항상 미소를 머금고 있는 ‘아르카익의 스마일’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 옥세르부인상(기원전 650년 경), 코우로스상 (기원전525년경)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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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 브뤼 ( Art Brut )

아르 브뤼 ( Art Brut )

Art Brut, Barcelona / Sixeart ++

아르 브뤼 ( Art Brut )
 세련되지 않고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형태를 지닌 미술로 정신병원의 환자등 예술과 관계 없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만을 위해 만든 것으로 인간 삶의 기반이 표현된다. 1940년대 프랑스 화가 장 뷔페(Jean Duffet)가 아마추어들의 작품에 나타나는 일종의 순수한 미술 형태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으로 처음에는 반교양주의적, 반회화적 입장을 가리켰지만 후에는 종말에 달한 서구의 지적 풍토를 재생시키기 위한 기폭제로 인정되었다.
 뒤뷔페는 무의식적인 마음에서 자발적으로 그려진 정신병자나 어린이의 작품은, 고도로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직업 화가의 작품보다 훨씬 적나라하고 창조적인 구성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고 자신의 작품에 이런 작품의 기법을 의식적으로 도입했다. 그 후 많은 화가들이 이런 기법을 썼다. 제 2 차세계대전 직후부터 뒤뷔페는 정신병자, 어린이, 그리고 아마추어 화가들의 작품을 계통적으로 수집하여 1947년에 전시회를 열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아르 부뤼의 진흥을 위해 앙드레 브르통, 장 포랭, 미셀 타피에등과 협회까지 설립했다. 그는 일찌기 이런 글을 쓴 일이 있다.
 "나의 화면에는 색채나 명도 그리고 광채, 질감의 변화도 없이 단지 모든 종류의 표지, 마티에르를 겁내는 손의 생생한 궤적이나 자국만이 나타나 있다. 나는 구석구석까지 모노크롬의 진흙만으로 만들어져 있는 듯한 그림을 꿈꾼다." 뒤뷔페의 이러한 반회화적인 개념의 지향은 미셸 타피에의 앵포르멜의 이념에 큰 영향을 주었다.


『원생미술』혹은 『생의 미술』로 어린이나 소박한 미술가 또는 정신병자등의 교양적인 예술이나 전통적인 예술과는 거의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위해 제작한 미술을 말한다. 쟝 뒤뷔페가 아마추어들의 작품에 나타나는 일종의 순수한 미술 형태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으로 처음에는, 반교양주의적, 반회화적 입장을 가르켰지만, 후에는 종말에 달한 서구의 지적 풍토를 재생시키기 위한 기폭재로 인정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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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02, 2013

아르 데코 ( Art Deco )

아르 데코 ( Art Deco )



 1925년 파리에서 개최된 ‘현대장식미술·산업미술국제전’에 연유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파리 중심의 1920∼30년대 장식 미술. 아르 데코라티프( art decoratif:장식미술 )의 약칭이며, ‘1925년 양식’이라고도 한다. 흐르는 듯한 곡선을 즐겨 썼던 아르 누보(art nouveau)와는 대조적이며 기본형태의 반복, 동심원(同心圓), 지그재그 등 기하학적인 것에 대한 취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기계시대로 들어선 신생활과의 관련을 당연히 지적하게 되며, 기하학 형태는 꼭 합리적 또는 기계적인 해결에 의해서만 처리되지 않았고, 오히려 우아한 취미에 뒷받침되어 있다. 아르 데코 원천의 하나가 이국정서에 넘친 러시아발레단에 있었던 사실로도 알 수 있듯이, 어떤 때는 화려한 색채의 기하학적 형태가 펼쳐졌다. 이러한 뜻에서 같은 1925년전(年展)에 르 코르뷔지에가 순정(純正)한 기하학에 의거하여 출품, 전시하였던 ‘에스프리 누보관[新精神館]’은 뛰어난 합리적 정신에서 아르 데코와는 전혀 다른 경향을 나타냈다. 아르 데코를 대표하는 디자이너로는 공예의 폴로, 브란트, 르그랑과 포스터의 카상드르 등이 있다. 패션계에서는 포와레와 샤넬이 아르 데코의 취미를 받아들였다. J.호프만이 주재하였던 빈공방(Wien 工房)의 작품은 그 고아한 취미성에 의하여 아르 데코와 근접한다. 그리고 30년 전후의 뉴욕의 건축장식에도 흥미 있는 아르 데코 양식이 나타났다.
  아르누보가 '수공예적인 것에 의해 나타나는 연속적인 곡의 선율을 강조'하여 공업과의 타협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반면에 '아르데코는 공업적 생산 방식을 미술과 결합'시킨 기능적이고 고전적인 직선미를 추구하였다. 이러한 아르데코의 이상이 실현된 것은 1920년대로 1차 세계대전 이전인 1914년까지는 19세기말부 터 서구 사회에 나타난 '세기말'적 경향이 계속해서 지속됨으로써 동방적 이국주의나 화려한 장식이 강하게 남아있었다. 1차 세 계대전 이후에는 데스틸(DeStijl)운동과 바우하우스(Bauhaus)운동이 성립되어 국제적 영향력을 향사하게 되었는데 아르데코는 데 스틸 운동의 신조형주의와 바우하우스 운동의 기능주의에 자극을 받아 기능성과 단순화를 추구하는 경향이 가속화 됨. 아르데코 가 전성기를 맞는 1920년대는 풍자적으로 프랑스에서는 '광기의 해', 영국에서는 '포효하는 20년대'라고 불리웠다.
 아르데코 양식은 Cubism에서 이끌어낸 기하학적 형태가 두드러진 특징으로 꽃이나 동물 및 인간의 형체를 모티브로 한 기 하학적 형태를 갖음. 형상(shape)은 더욱 뚜렷해지고 더욱 단순해져서 주제들도 이러한 경향에 잘 어울리는 것들이 부각되고 추상적 경향을 띄었다. 또한 아르데코는 기하학적 특성을 주특성으로 하지만 미래파와 같이 기계의 완벽성을 인정하여 미술에 받아 들였으며 현대 를 특성 짓는 속도감을 표현하기 위하여 유선의 법칙에 따라 공기의 저항을 덜 받아 속도를 더 많이 낼 수 있는 유선형의 매끄러 운 선(sleek line)을 특성으로 갖는다. 아르데코의 색채는 강렬하고 밝은 색조로 Fauvism과 러시아 발레(Russian Ballets) 로 더욱 확산된 Orientalism에 기인한다.
 강하고 단순한 형상을 적절히 표출하기 위해서 밝은 색상과 강렬하고 뚜렷한 색채 대비 를 구사하였다. 빨강과 검정 그리고 은색은 이 양식의 전형적인 색채 조합인데, 빨강과 검정은 기하학적 형태들의 배경을 마련하며 은색은 주요 장면과 뚜렷한 Ziggurat들이나 다른 기하학적 모티브들을 위해 사용하였다. Art Deco 예술가들은 주로 크롬(Chrome)을 사용하여 은색의 효과를 냈으며 유리 또한 반짝 거림(bright)에 적합하여 많이 사용하였고 단단하게 날이 세워진 모습을 연출했다. 이러한 색들을 보다 더 두드러지도록 하기 위해 강한 녹색이나 orange색 같은 예리한 색상과 검정색을 테두리색으로 사용하고 오리엔탈리즘이나 포비즘의 영향으로 어두운 것 대신 담홍색, 청회색, 노란색, 짙은 군청색 등을 사용하였다.
이 시기에 주로 쓰인 소재는 Orientalism영향으로 중국, 일본, 페르시아풍이 애호되었고 American Indian이나 Egypt, 혹은 자연 등이 이용되었다. 특정적 motif들로는 여성 nude형상들, 동물군에서 주로 사슴이나 양,식물의 무성함, 태양광선, Ziggurat(뾰죽탑) 등의 양 식화된 형태들이 있다.
1922년 12월 Tutankhamun이 발견되면서부터 이집트적인 문양이나 장식이 관심을 끌게 되기도 한다.

a.건축
 다른 예술의 발전과정과 마찬가지로 아르데코 건축의 합리주의(Rationalism) 및 기능주의(Functionalism)의 특성은 아르누 보 건축가들에 의해 이미 준비되었다. De Stijl 그룹은 1차 세계 대전 종전 무렵에 Mondrian의 원리에 따른 엄격한 기하학적 디자인을 추구함으로써 유럽 건축에 서 가장 선두에 서고, 이들의 영향은 독일의 Bauhaus 그룹에 의해 수용되었고 입체파와 함께 아르데코 건축에 미학적 근거를 제공 한다.
 아르데코 양식의 건축에서 가장 대표적인 건축가는 건축의 순수주의(Purism)를 이끌었던 르 꼬르뷔지에(Le Corbusier, 188 6~1965)이다. 그는 건축과 기계 문명과의 결합을 시도하였으며 자신이 지은 주택을 '살기 위한 기계'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의 건축 은 기능성이 결여된 장식을 배제하려는 합리주의 및 기능주의의 결과이다.
 아르데코 양식의 건축의 특징은 장식이 없는 것으로 기능미를 추구하는 현대 기계문명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꼬르뷔지에 외에도 이 시기의 대표적인 건축가들로는 프랭크 로이드 롸이트(Frank Lloyd Wright), 윌리엄 밴 알렌(William Van Alen), 레이 몽 후드(Raymond Hood), 쟌 미드 하웰스(John Mead Howells), 조오지 하우(Georrge Howe), 윌리엄 레스케이즈(William E. Lescaz e), 펠릭스 드 마를르(Felix de Marle) 등이 있다.

b.조각
 아르데코 시기의 조각은 '형태와 태도와 표현들이 현저하게 양식화되어 추상화 경향으로 가고 조각 재료면에서 보다 더 다 양한 소재들이 사용되었다. 즉 아르누보가 자연의 원초적 힘을 표출하기 위하여 유동적 형태를 선호한 반면, 아르데코에서는 본 질적 요소들의 기하학적 축소를 시도하여 단순하면서 추상적인 기하학적 형상을 추구하였다. 아르누보에서는 조각이 별다른 중요성을 부여받지 못했지만 아르데코에서는 조각이 추상적, 기하학적 표현의 중요한 분야 로 인정되었다. 아르데코 조각 역시 다른 예술분야와의 교류가 폭넓게 이루어져 건물 외벽을 저부조로 장식한다든가 실제 크기보다 커다란 크기이 조각들이 주랑(peristle)안에 세어지기도 하였고, 커다란 분수에 군상(multiples sculpture)으로 형상화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조각가로는 꽁그땅뗑 브랑뀌(Constantin Brancusi)로 부터 시작하여 미래파의 움베르토 봇치오니(Umberto Boccio ni), 쟌 마르텔과 조엘 마르텔 형제(Jan & Joel Martel), 레이몽 뒤샹 비용(Raymond Duchamp-Villon), 앙또안느 페브스너(An toine Pevsner) 등이 있다.

c.회화
 아르데코 회화를 형성시킨 가장 중요한 실험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와 죠르쥬 브라끄(Georges Braque)에 의해 시 도된 입체주의(Cubism)이다. 입체주의는 자연의 재현이라는 방법에서 벗어나서 형태와 공간에 절대적인 양식을 성립시키고자 한 일 종의 형식주의가 본질이었다. 아르데코 회화의 색채는 절대적으로 야수주의(Fauvism)에 기원을 두었다.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는 '삶의 기쁨(Joy of Li fe, 1905~1906)'에서 Fauvism의 정신을 요약하고 있다. 즉 강렬하면서도 단조로운 색면과 심한 굴곡을 보이는 윤곽선이 특징을 이루며, 무엇보다도 '철저한 단순화'에서 Fauvism의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아르데코 회화는 입체파적 분해와 야수주의적 단순구조 및 강렬한 색채 배합을 특징으로 하며 그 특성은 프랑스의 보르도( Bordeaux)에서 활동한 화가들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Bordeaux 예술가들로는 쟝 뒤빠 (Jean Dupas), 로베르 외제느 뿌죵(R obert Eugene Poughoen), 쟝 데쀠졸 (Jean Despujols), 르네 뷔또(Rene Buthaud), 앙드레 로뜨(Andre Lhote), 따 마라 드 랑삑까(Tamara de Lempicka) 등이 있다. 이들은 Neo-Classic Style을 각각의 방법으로 발전시켰고, 인간 형상을 체 적 측정의 방법 (Volumetric Method)에서 다루었으며 화려한 색채로 이루어진 장식적인 디테일, 풍자적이고 비유적인 프레스코 화를 선호하였다는데 공통점이 있다. 로베르 들로네(Robert Delaunay)와 그의 부인 쏘냐 들로네(Sonia Delaunay)는 아르데코 이미지 창조에 기여한 바가 크다. 로 베르 들로네는 후기 인상파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입체주의와 추상적 회화의 영향을 결합시켰고, 동시에 발생하는 대조 효과를 얻기 위해 형태와 공간 그리고 색채 효과를 실험하였고, 쏘냐 들로네는 자신의 실험을 직물과 자수에 적용시켰다 . 이외 회화적 기법이 실용적인 목적으로 사용된 응용 예술에는 일러스트레이션과 포스터, 책표지화를 들 수 있다.
아르데코의 일러스트레이션은 종전의 윤곽선이 흐린 아르누보 스타일과는 달리 야수주의의 영향으로 '뽀솨르 기법(pochoir method)'를 사용하여 윤곽선이 뚜렷하며 대담한 선의 처리가 특징다. 이러한 변화는 의상 디자이너이자 illustrator인 Iribe에 의해서이며 Iribe는 Paul Poiret의 Empire Tunic Style을 특징으로 하는 디자인들을 '단순한 선과 화려한 색조'로 그린 '뽈 뽀아 레의 의상들 (Les Robes de Paul Poiret)'이라는 illustration집을 발표하였다.

d.공예
 아르누보와 마찬가지로 아르데코에서도 그 양식의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쟝르는 공예이다. 특히 공예의 어떤 부분보다도 가구는 유행과 스타일에서의 변화를 민감하게 반영하였다. 가구 디자인의 혁신주의자들은 가구를 하나의 실내건축요소로 보며 이에 따라 선과 볼륨과 장식을 단순화시켰으며 대중성 을 추구하여 대량생산될 수 있는 금속과 특히 속이 빈 철과을 많이 사용하였다. 합리주의와 기능주의를 충분히 구현하고 아르데 코가 선호하는 유선형의 형태가 기능성을 돋보이게 하였고, 가구 이외에도 보석공예, 도자기 공예, 유리공예 금속공예 등에서도 아르데코 특성을 보여주는 작품이 활발하게 창작되었다.





구로구미술학원 / 전원미술학원 구로 캠퍼스


아르누보 ( Art Nouveau )

아르누보 ( Art Nouveau )





 '신 미술' 이라는 뜻으로 1890년대에 자연주의적이고 유기적인 형체를 구사했던 장식미술. 회화만이 아니라 건축과 디자인도 포함된다. ‘아르누보’는 영국·미국에서의 호칭이고 독일에서는 ‘유겐트 양식(Jugendstil)’, 프랑스에서는 ‘기마르양식(Style Guimard)’, 이탈리아에서는 ‘리버티 양식(Stile Liberty:런던의 백화점 리버티의 이름에서 유래)’으로 불린다. 아르누보는 유럽의 전통적 예술에 반발하여 예술을 수립하려는 당시 미술계의 풍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특히 모리스의 미술공예운동, 클림트나 토로프, 블레이크 등의 회화의 영향도 빠뜨릴 수 없다.
 아르누보의 작가들은 대개 전통으로부터의 이탈, 새 양식의 창조를 지향하여 자연주의·자발성·단순 및 기술적 완전을 이상으로 했다. 종래의 건축·공예가 그 전형(典型)을 그리스, 로마 또는 고딕에서 구한 데 대해서, 이들은 모든 역사적인 양식을 부정하고 자연형태에서 모티프를 빌어 새로운 표현을 얻고자 했다. 특히, 덩굴풀이나 담쟁이 등 식물의 형태를 연상하게 하는 유연하고 유동적인 선과, 파상(波狀)·곡선·당초무늬[唐草文] 또는 화염(火焰)무늬 형태 등 특이한 장식성을 자랑했고, 유기적이고 움직임이 있는 모티프를 즐겨 좌우상칭(左右相稱)이나 직선적 구성을 고의로 피했다. 그리하여 디자인은 곡선·곡면의 집적(集積)에 의한 유동적인 미를 낳는 반면 견고한 구축성이라든가 기능에 기초를 둔 합리성이 소홀하여 기능을 무시한 형식주의적이고 탐미적(耽美的)인 장식으로 빠질 위험도 컸다. 아르누보가 비교적 단명(短命)했던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아르누보의 전성기는 1895년경부터 약 10년간이다. 그보다 이전인 1880년대에는 영국의 맥머드, 미국의 설리번, 에스파냐의 가우디 등이 그래픽디자인이나 건축에서의 곡선적인 형태를 다용(多用)한 작품을 발표하고 있는데, 특히 맥머드의 예(교회의 팸플릿 표지)는 분명 아르누보의 선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영국의 매킨토시, 벨기에의 반 디 벨데와 오르타, 프랑스의 기마르와 가이야르, 이탈리아의 다론코 등의 작가가 활발하게 작품을 발표하게 되면서 아르누보는 널리 그리고 급속도로 보급되었다. 특히, 1896년에는 독일의 미술품상인 빙그가 반 디 벨데에게 의뢰해서 내부장식을 한 파리의 상점은 ‘아르누보관(館)’으로 명명되어 독자적인 장식성으로 하여 대단한 인기를 얻고 유명해졌는데 이 신양식(아르누보)의 유행에 박차를 가하였다.
 18세기 산업혁명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하게 되었지만 생산물의 질적가치가 떨어지는가하면 아름답거나 유용성이 결여된물건이 자꾸생겨나면서 대량생산의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었다. 이런 현상이 중세의 수공예품에 대한 향수를 불러 일으켰고 산업기술의 발달로 예술가들이 고립되고 그로 인해 생겨난 사회와 예술의 격차를 줄이고자 아름다움과 유용성의 개념(아름다운 것은 아름답기 때문에유용한것이다)으로 미술공예운동이 일어났다.
 미술공예운동은 과거의 형태와 양식을 거의 그대로 빌어쓰는, 그야말로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중세시대 공예로의 복귀와 같은 것이었다. 역사주의로부터 탈피하고 자유롭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는 움직임에서 구조와 기능과 장식의 통일을 기본원리로 아르누보(신예술)가 생겨나게 되었다. 또한 일본의 개항으로 일본문화가 유럽에 유입되면서 일본미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전통을 과감히 개혁하고 건축, 가구, 제품, 패션, 그라픽등 인공적 생활환경의 전반에 관계했다는 점에서 현대디자인의 문을 열었다고 할수 있다.
 1897년 드레스덴의 박람회, 1902년 토리노박람회 등에서는 아르누보의 실내장식과 가구 등 공예품 전시회가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한편 독일·오스트리아에서는 1896년에 뮌헨에서 발간된 잡지 《유겐트(청년)》에 에크만 등 뛰어난 디자이너가 작품을 발표하면서 ‘유겐트 양식’이 태어났는데 이것은 아르누보와 거의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1910년경부터 건축·공예계에는 기능과 사회성을 보다 중요시하는 풍조가 강해지면서 R.랄리크의 보석 디자인, E.가레의 유리공예, 그리고 미국에서의 티파니의 유리그릇과 에스파냐에서 계속된 가우디의 건축활동 등 약간의 예외를 제외하고 아르누보는 소멸해갔다. 그러나 종래의 역사주의·전통주의에 반항하여 빈의 제체시온(secession:분리파)을 불러일으키는 등 현대미술의 확립에 선구적 구실을 했다는 점과 근대운동에 끼친 영향력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해야 한다. 설리번이 설계한 시카고 공회당(1888), 오르타가 설계한 브뤼셀의 P.E.얀손가(街)의 가옥(1892∼1893), 기마르가 설계한 파리의 지하철역(1900) 등이 아르누보의 양식을 오늘에 전하는 대표적인 것이며 뭉크, 로트렉, 나비파도 이 유행의 기조에 관련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 운동의 발단은 1883년 맥크무르도(A.H.Mackmurdo;1851-1942)가 크리스트퍼렌의 <도시 교회당>(City Churches)이라는 책의 장정을 한 데서부터 시작한다. 길고 섬세한 곡선,환상적인 백합의 줄기,곤충의 촉수,실꽃,이것들이 서로 얽힌 모양,모서리에서 자라온 화면을 구불거리며 채운 식물모양,이런 것들이 아르 누보의 현저한 장식수법이다.
 맥크무르도의 이런 종류의 문양(紋樣)의 직접적인 동기는 라파엘전파(pre-Raphaelist), 즉 버언 죤스라든가 로제티의 회화에서 유래한 것이다. 더우기 아르 누보운동은 19세기 말에 예술의 중심지의 감이 있던 부류셀의 예술성이 높은 분위기 속에서 탄생하였다고 생각된다.
 1880년에서 1890년 사이의 부류셀은 대중에게 경멸당하고,무시당한 창조적 예술사들을 환영하고 그들의 말에 유심히 귀를 기울인 높은 문화도시였다. 여기에 1881년 이래 <라르모데르네>(L'Art Moderne)라는 잡지가 간행되어 그 창간호에는 "예술은 인간환경을 개혁하고, 새로운 이상에 일치시키려고 하는 인간 영원의 자발적 자유행위"라고 말하여 아무러한 곳에도 속박을 받지않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제창하고 나섰다. 이 평론잡지는 곧 이어 "르 반티엠"(Les XX)이라는 젊은 에술가 그루프를 결집시켰다. 이 중에는 핀치(A.W.Finch)도 있어 그는 1891년 영국에서 모리스의 공예품을 사들여 이것이 그들 그루프를 감동시킨 끝에 영국의 공예운동을 벨기에에 연결하였다.
 "레 반티엠"이 다음다음 개최한 전람회는 매우 대담하였다. 1884년에는 로댕(Rodin),크놉프(Khnopff), 앙소르(Ensor),휘슬러(Whistler) 등, 1886년에는 모네(Monet),르노아르(Renoir),르동(Redon) 등, 1887년에는 스라(Seurat), 1888년에는 로오뜨렉(Toulouse Lautrec)과 시니약(Signac) 등, 1889년에는 고오갱(Gauguin), 1890년에는 세잔느(Cezanne),고흐(van Gogh),시슬레(Sisley) 등, 1892년에는 약간의 스테인드 글래스,자수,도기,책의 장정, 즉 응용예술이라고 멸시당하여 오던 작품들이 당당히 전시되었다.
 이러한 환경속에서 아르 누보의 중심인물인 반 데 벨데와 빅터 오르타는 강한 영향을 받았다. 또 다른 면으로는 1890년부터 시작한 비어드즐리(Aufrey Beadsley;1872-1898)의 많은 삽화, 투우롭(Toorop;1858-1928)의 "삼인의 자매",홀더(Holder;1853-1918)의 "선발된 사람", 데니스(Denis;1870-1945)의 "4월", 뭉크(Munch;1863-1944)의 "통곡","마돈나" 등의 회화가 작용하여 점차로 유럽 전역에 만연하게 되었다.
 아르 누보운동은 회화에서 몇 개의 의의있는 작품을 볼 수 있으나, 실제로는 회화의 한 흐름으로 이 운동이 발상한 것도 아니고, 또 "아르 누보"라는 명명은 회화운동을 지목하여 쓰여진 것만도 아니다. 단지 한 장식수법의 양식으로서 비교적 짧은 기간이지만 건축에 적용되어 유행한 양식을 지칭할 따름이다.
 시카고의 루이스 설리반(Louis Sullivan)은 본질적으로 독창적 수법이며, 빅터 오르타(Victor Horta)는 영국이나 대륙에서의 이와 비슷한 운동의 영향을 받아 발전시킨 사람이다. 따라서 설리반의 아르누보 수법은 고립된 채 미국에서 소멸되어 버리고 마나, 오르타의 스타일은 전 유럽을 휩쓸게 된다. 설리반이 어떻게 아르누보 스타일을 창안하였는지는 의문점으로 남아있다. 1888년 시카고에 "오디토리움 빌딩"을 건설하여 여기에 그의 독특한 아르누보 스타일을 완성하였다. 다시 1890-91년에 "앤쉬마리브교회당", 1903-4년에는 "카아슨 피리에 스코트백화점" 등 설계에서는 점점 더 강하게 그의 수법이 표현된다.
 설리반의 장식수법은 "넓고 당당한 선으로 구성된 구조에 알맞는 유기적 장식"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오르타 등 유럽의 아르 누보 건축가와는 본질적으로 성격이 다르다.
오르타는 1893년 "폴 에밀 죤슨저택"과 "튜린가의 저택"의 계단실과 실내를 아르누보 스타일로 장식하였는데, 여기서는 전연 구조체와은 관련없이 단순한 철로 된 곡선 모양의 표면장식에 그치고 있다.
 오르타의 좋은 협동자로 헨리 반 데 벨데도 역시 아르 누보에 속하는 장식수법을 썼다. 벨데는 영국의 공예운동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투우롭의 성숙한 작품을 극구 찬양하여 많은 영향을 받은 작가이다. 그는 이론가이며, 바아비존(Barbizon)파에 속하는 화가였는데, 다음 신인상파 화가로 화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나, 1894-95년에 육클(Uccle)에 자기 저택을 설계하고 여기에 들여 놓을 가구설계까지하여 이 작품이 그의 성가를 결정지었다. 소위 육클의 가구라고 불리우는 이 가구는 사용된 곡선은 아르누보 스타일이나 오르타의 섬세한 우아함과는 달리 역학적으로 힘찬 맛이 있다. 즉 오르타가 자연,채소,동물 등의 생생한 자연미를 느끼나, 벨데는 강항 추상화된 형상과 기능을 치중한 경향을 엿볼수 있다.
 벨데의 소위 "다이나모그라피"(Dianamographique)라 함은 "구조화"(構造化)한 장식미를 말한다. 그는 장식미술의 기본이 인력(引力)과 반력(反力)의 과학적 법칙에 기초를 두어야 할 것이지 결코 기술자의 창작으로 되는 우연의 산물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이론이 그가 기계를 찬양하는 심정과 예술적 표현형식을 관련시켜, 지금까지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대담한 시도를 꾀하였다. 그가 베를린에 "하아비 이발관"(Harby's barber)을 설계하였는데 수도관,개스관,전기배관을 노출시킨 환상적 실내를 보고 일반은 놀라 말하기를 "저고리 밖으로 시계줄 늘이듯이 창자를 걸쳐 놓았다"라고 하여 기능주의의 극단인 표현과 아르누보 스타일의 잡탕인 그의 작품을 욕하였다. 그러나 육클의 의자같이 벨데의 기능면에 대한 활동은 주목할 만하다.
 벨데의 이론과 작품을 처음으로 이해한 사람이 사무엘 빙(Samuel Bing)이다. 그는 함부르크의 미술상으로 1871년에는 빠리로 이전하여 계속 미술상을 경영하고 있었다. 1875년에는 극동지방으로 여행을 하고 돌아와서 동양미술을 널리 소개한 바 있고, 1893년에는 정부파견으로 미국에 건너가서, 리챠아드슨이나 설리반의 건축과 기계생산품의 미를 프랑스에 전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가 프로봔스가(街)에 "아르 누보"라는 이름의 미술상을 차렸을 때, 독일의 미술 평론가인 마이어 그레페(Meier Graefe)의 협동을 얻어 자기 점포의 실내장식을 벨데에게 위촉하였다. 벨데는 빠리에 초청을 받아 네 개의 방을 그의 참신하고도 힘찬 아르 누보 스타일로 장식하였다. 방의 상업적 의도는 적중하여 이 사실은 잠깐 사이에 빠리에 호평을 받아 이러한 곡선을 사용한 장식의 유행은 프랑스에서 독일로 번져갔다.
 유리 세공가(細工家)인 에밀 갈레(Emile Galle;1846-1904)와 도공(陶工)인 아우구스테 델라 헤르케(Auguste Delahaerche;1857-?)는 이에 동조한 공예가로 유명하다.
 1895년에서 20세기 초엽까지 아르 누보는 프랑스와 벨기에에서 대성황을 이루었다. 1895년에 젊은 건축가와 공예가의 집단으로 "르 싱그"(Le Cing)라는 그루프가 조직되고, 나중에 챠알스 플르메(Chgarles Plumet;1861-1925)가 참가하여 "르 식스"(Lessix)라는 명칭으로 불리웠는데, 이 그루프 "대중을 위한 예술"(L'Art daus tout)이라는 타이틀의 전람회를 열고, 아르 누보 스타일을 대대적으로 선전하였다.
 건축면에서는 헥토르기마드(Hector Guimard;1867-1942)의 빠리 지하철 역사라든가 1894-8년에 "파시의 폰탄가(家)의 주택"은 표준적 프랑스 아르 누보 스타일의 건물로 유명하다.
 아르 누보와 철의 사용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 운동이 구태의연한 장식주의에 그치고 말았음에도 불구하고 근대적 성격을 띤 운동으로 높이 평가받느 이유의 한 단면도 여기에 있다.
 독일에서는 벨기에보다 좀 늦게 이 운동에 들어섰으나 건축가들간에 협조가 잘 이루어지지 못하고 또 독일에서 원래 뿌리깊게 침투하고 있는 즉물적 과학성 때문에 아르 누보운동은 오래 계속되지 못하고 또 큰 실적도 거두지 못한다. 벨데의 영향을 받은 작가로 오토 엑크만(Otto Eckmann)과 헤르만 오브리스트가 있다. 이들은 모두 아르 누보의 독일에서의 유파인 유겐트스틸의 작가이다.
 이러한 아르 누보는 확실히 새로운 양상이기는 하지만 혁명운동치고는 너무 보수적이고, 사회적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에 뿌리없는 표면상의 예술운동에 지나지 않은 감이 있다. 그래서 영국에서는 빅토리아 스타일과 근대와의 과도적 스타일로 보아왔고, 따라서 모리스들의 "예술과 수공예운동"과도 비교되는 운동이다. 모리스의 "예술과 수공예운동"은 예술가의 정당한 지위의 확보와 공예에 대한 합리적인 태도를 가질 것을 위하여 과감히 투쟁한 큰 공헌이 있으나, 아르 누보는 피상적이며, 예술지상주의자들의 직접적인 표상(表象)의 한 발로 이상으로 더 큰 운동으로서의 중요성이나 사회성은 찾을 수 없다.
 그들이 아무리 19세기의 역사주의자들의 형태를 벗어난 독창적 형태를 창안하였다고 주장하지만 냉정히 판단하여 19세기적 기반을 벗어날 수 없었다. 단지 한 가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은 예술과 건축의 발전사상 아르 누보가 도달할 수 있었던 가장 괄목할 만한 예가 유럽 변두리의 한 지방에서 순교자와도 같은 한 건축가에 의하여 이루어진 사실이다. 그는 바로 안토니오 가우디(Antonio Gaudi;1852-1926)의 행적이다.
 가우디는 바로셀로나에서만 일하였다. 그는 후기 고딕부흥주의로 알려져 있으나 어디까지나 독창적 표현의 작가이다. 그러나 맥크무르도와 평행하여 대담한 자유자재로운 곡선을 쓰기 시작하였다.
 1900년 이후에 제작한 산타 콜로마 디세르벨로(Santa Colima de Cervello)나 규엘공원(Parque Guel)은 어느 지방 아르 누보 보다도 훨씬 앞선 곡선과 자유분망한 건축가의 환상이 표현되어 있다. 이외에도 그의 성숙기의 작품인 사그라다 파밀리아성당(Church of Sagrada Familia;1903-26), 카사밀라(Casamila,Barocelona;1905-7),카사 바틀로(Casa Batllo,Barocelona;1905-7)등은 아르 누보의 절정에 서 있는 가우디의 걸작들이고, 나중에 표현파운동과도 연결을 지으면서 1950년 이후에 르 꼬르뷰지에 등의 좀 더 광폭한 건축들과도 관련지을 수 있는 건축이다.
 미술 공예 운동이 중세라는 이상에 근거하여 수공예를 통한 생활의 개혁을 지향한 것이라면, 아르누보는 자기를 그린 장식과 환상을 바탕으로 이를 실천하려 한 운동이다. 그러므로 아르누보는 과거에서 이상을 찾기 보다는 자기를 추가한 것이며, 실재하는 육체가 아니라 정령(精靈)을 형상화하였다. 때문에 아르 누보의 예술에서는 현실 자체를 소재로 한 것이 드물다. 동시에 아르누보는 장인적 생산 체계를 도입하여 근대의 기술을 병합하려 했다는 점에서는 공업 사회의 예술이지만, 결국은 작가와 주문자의 취미의 세계에 머물고 합리적인 근대 사회에 충분히 대응하지 못했다는 결함을 지닌 예술 운동이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아르누보는 쇠퇴하기 시작되었다. 아르누보의 작품들과 가구들은 한정되어있고 유일한 것이었다. 포스터와 잡지의 그래픽 디자인으로 아르누보가 대중화되자 많은 양이 제작되었고 필연적으로 질이 떨어지게되는 현상을 가져왔다. 장식의 그 본질적의미는 생각하지 않은채 표면적인 장식의 스타일만을 본뜬 모방자들의 조악한 제품을 생산함으로써 그 가치는 최하의 수준으로 떨어졌다. 1차세계대전으로 자연히 소멸되어갔으나 지금 그 운동의 소재, 방법, 의의를 지향하는 아르누보의 기본 태도를 받아들인 20세기의 디자이너에 의해 변모, 발전해갔다.



건축

 아르누보 건축에서는 조형예술가들 사이에 구조와 형태가 건축의 참된 기반이라는 방향이 제시되었으며, 일반 식물 형태에 기본을 둔 부드러운 선의 표현이 주가 되면서 전통적인 건축 장식의 견고하고 직선적인 기학적인 형태와 대조를 이루는 새로운 종류의 건축양식이 출현되었다. 아르누보 건축에서 가장 현저하고 복잡하고 창조적인 특징들을 보여준 사람은 스페인의 바로셀로나에서 활동했던 안토니오 가우디 이다. 그의 탁월한 설계는 기능주의에 거슬리지 않으면서 대담하게 거대하였으며, 육중하게 기획된 건물들은 생물적인 형태나 형상들을 기반으로 설계되었다. 가우디와 함께 아르누보 건축을 가장 화려하게 꽃피운 사람은 벨기에의 빅또르 오르타와 반 데 벨데로 오르따 이다. 그들의 건물들은 아아치형 구조와 솟아나듯이 탄력있는 곡선이나 포도덩쿨과 같이 휘감기고 나선형으로 굽이치는 곡선들로 장식되었는데, 그 선들은 레이스 끈, 채찍의 선이라 불렸다. 또한, 반 데 벨데의 건축은 따뜻하고 생기가 있는 유기적 특성과 20세기 기능주의와 합리주의에 영향을 준 투명하고 윤곽이 뚜렷한 기능적 측면을 공유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1887년에 '에펠탑'이 건설됨으로써 현대적이고 미래주의적인 건물의 본보기를 설정하게 됨으로써 아르누보의 영역을 마련하게 되었고 영국의 아르누보 건축은 매킨토시에 의해 구축되었는데, 곡선보다는 직선적인 취향이 많이 보이는 것이 특색이다. 그의 건축은 네오-고딕적인 창문이나 문 등의 장식이 단순화된 방법에 의해 절제되었고, 한편으로는 전체의 구성과 연결되어 나타났다. 곡선보다는 수직선의 사용이 많았으며 식물의 형태도 선적인 수직상태를 이루어 20세기 합리주의를 예고하였다.



조각

 아르누보의 조각은 기념물의 조각형식과 실내의 벽난로나 테이블 위의 장식용 작은 조각의 발달이 두드러졌다. 아르누보가 상징주의 미학을 기초로 출발하였기 때문에 조각에서도 상징적 표현성과 장식성이 강조되었다. 아르누보 조각에서 주로 사용한 주제는 여성이었고 식물이나 곤충, 물결적 표현이 사용되기도 하여 주제로 채택한 자연물과 작품에 있어서의 기능을 일치시 키고자 실용성이 중요시 되었다. 아르누보 조각가들은 사회의 진보와 철학의 발달에 따라 구시대 관습에서 해방된 여성을 자유롭고 활기차고 명랑하게 표현 하고자 하여 님프, 나이나드(Naiad :물의 정), 물의 요정 등으로 묘사하였다. 선의 사용에는 대체적으로 파동치는 유기적인 곡선이 과잉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식물의 넝쿨, 꽃, 비틀려져 올라간 줄기와 소용돌이 장식에서 표출되었다. 작가들은 순수 조각 분야보다는 장식 조각 분야에 더 활발하게 참여하여 '미의 대중화'를 추구했던 아르누보의 이상에 부응하였다.



회화

 아르누보 회화는 다른 조형분야와 같이 표현력이 풍부한 유동적인 곡선을 사용하였고, '상징'이 관념에 구체적인 형태를 준 다고 보고 환기적이고 장식적인 형태의 수단을 이용해서 관념을 주관적으로 표현한 점에 특징이 있다. 아르누보 회화의 전체적인 성격을 구성하는 것은 라파엘전파와 상징주의 및 표현주의적 경향이다. 라파엘전파가 목적으로 한 것은 타락한 라파엘 시대와 르네상스 전성기 이전 시대의 예술의 순수함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들의 특징은 흐릿한 배경위 에서 거의 환각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화려하고 밝은 색채를 보여주었고 상세한 부분까지 주의깊게 다루었던 태도에 있다. 상징주의 회화의 특징은 신화를 주제로 하여 환상적인 것으로 악마, 지옥, 광기, 공포들이 내재하는 전설, 혹은 영감의 원천인 자연을 모티브로 작품을 창작했다는 데 있다. '모든 예술의 통합'을 추구하는 아르누보의 이상에 따라 회화 역시 실용성이 있는 예술이 되도록 요청되었다. 그 기능은 장소나 건물을 장식하는 것으로 전체적인 환경과의 조화가 요구되었으며, 이는 '상징주의의 결과론이 장식성의 중요성을 강조'한 데서 연유하였다. 또한 이 시기의 화가들은 세기말과 세기초를 지배한 양식의 흐름에 영향을 받게 되면서 그래픽 예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특히, 앙리 드 뚤루즈 로트렉의 활동이 두드러졌음. 로트렉은 명암이나 광선을 무시하여 형태나 운동에 촛점을 맞추었으며 에드가 드가의 지그재그식 구도와 고갱의 색채 및 굴곡진 윤관선에 영향을 받았다.



공예

 아르누보 예술가들의 '모든 예술의 통합'이라는 노력이 공예를 통해 꽃피웠기 때문에 이 시기의 조형적 걸작품은 공예부문에서 가장 많이 보였다. 단순한 예술 작품의 창조가 아니라 사회생활에 알맞는 환경을 제공하게 될 부문들이나 요소들의 조화롭고 종합된 복합체를 목표로 하였던 것이다. 공예의 주요부분은 가구이고, 그외에도 금속공예, 스테인드 글라스, 램프, 유리, 장신구 등 다양하다. 대표적으로 가구의 특성을 보면, 유기적 모티브를 조용하고 섬세하게 사용했는데, 식물형태에서 보면 줄기가 반복되고 수직선들이 우아하게 굽은 마디에 의해 접합 부분에서 단절되거나, 여린 가지를 엉키게 하거나 가지들을 번성하게 하는 방법으로 형상화시켰다. 로버트 슈므츨러는 이 양식의 주된 테마를 '해초나 식물의 넝쿨 따위를 연상시키는 길고 감각적이며 유연한 선'이라고 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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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 스퀘어 (SILK SQUARE)

실크 스퀘어 (SILK SQUARE)




  Grounds가 실크스퀘어에 싸여 있다면, 공형의 기구에 들어 있는 grounds를 조작하는데 용이.
 실크는 또한 열을 받은 금속판 위에 접촉되면서 녹는 grounds을 걸러 내는데 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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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경산수 ( 實景山水 )

실경산수 ( 實景山水 )



오용길 / 가을서정-만추_209 x 110cm _ 한지에 _ 수묵담채 _ 2011

 고려시대와 조선 초·중기에 자연경관을 소재로 그린 산수화. 실경화라고도 한다. 주로 실용을 목적으로 그렸으며, 뒤에 나온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 발전에 바탕이 되었다. 고려시대에 그려진 것으로는 전공지(田拱之)의 《서산도(瑞山圖)》를 비롯, 이영(李寧)의 《예성강도(禮成江圖)》와 작가 미상인 《진양산수도(晋陽山水圖)》 《송도팔경도(松都八景圖)》 등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은 조선시대로 이어지고 소재도 더욱 다양해져, 명승명소(名勝名所)와 별서유거(別墅幽居)·야외아집(野外雅集) 등의 유형을 낳으면서 발전하였는데, 명승명소를 소재로 한 그림에서는 《금강산도》가 주종을 이루고, 또 《한강도》 《삼각산도》 《임강완월도(臨江翫月圖)》 등과 같이 한양 주변의 명소를 비롯하여 지방의 명승명소도를 그린 것도 적지 않다.
 별서유거 그림은 사대부들이 자연을 벗삼아 즐기고 주변 경관을 선양하기 위해 그린 것으로, 문헌에 의하면 《남원별서도(南原別墅圖)》 《하전원도(河田園圖)》 《화석정도(花石亭圖)》 《고산구곡도(高山九曲圖)》 《곡운구곡도(谷雲九曲圖)》 등이 전한다. 야외아집류의 그림은 사대부들이 경치좋은 장소에 모여 시와 술을 즐기며 친목을 도모한 광경을 그림으로 남기기 위한 것으로, 야외계회도(野外契會圖) 등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 밖에도 《한강유람도》 《기성평수도(冀城萍水圖)》 《웅연범주도(熊淵泛舟圖)》 등이 있다.


 실경산수화의 작가를 보면 이영, 최경(崔涇), 배련(裵連), 안귀생(安貴生), 이징(李澄) 등 대부분이 화원들이며, 조선 중기부터는 김시(金), 이경윤(李慶胤)과 같은 문인화가들도 실경산수를 다루기 시작하였다. 화풍은 거의가 기록적·기념적인 제작의도를 나타내기 위한 화면구성과 정형산수화풍의 영향을 받아 전개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실경산수화는 점차 사상이 가미되고 남종화법의 경향이 짙어지면서 조선 후기의 진경산수파풍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현재 전하는 작품으로는 작가 미상의 《관서명구첩(關西名區帖)》, 이신흠(李信欽)의 《사천장팔경도(斜川莊八景圖)》, 조세걸(曺世傑)의 《곡운구곡도첩》(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한시각(韓時覺)의 《북관실경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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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07, 2013

신즉물주의 ( 新卽物主義 : Neue Sachlichkeit )

신즉물주의 ( 新卽物主義 : Neue Sachlichkeit )



Otto Dix (German, 1891-1969) / To Beauty
1922 / Oil on canvas _ 55 1/8 x 48 1/16 in. (140 x 122 cm)
Von der Heydt-Museum, Wuppertal



  20세기 독일에서 일어난 반(反)표현주의적인 전위예술운동. 신현실주의 또는 독일어로 노이에 자흐리히 카이트라고 한다. 이 명칭은 1923년 하르트라우프가 1920년대 회화에 있어서 사실주의적 경향을 총칭하기 위해 “신자연주의”라 칭하였다가 만하임미술관에서 미술관장 하르트라우프가 기획하여 열린 전람회[신즉물주의:표현주의 이후 독일회화]의 이름에서 나왔다.

 신즉물주의 회화는 전쟁후 표현주의가 찬미했던 인간과 그가 만들어낸 가치척도 전체를 부정하는 데서 출발하였으며 바우하우스나 러시아 전위 미술가들의 활약을 통해 산업사회의 합리적 이상과 결합하였다.
 키리코에 의해 1910년 이후 시작된 형이상학적 회화를 연상시키면서 불가사의한 분위기를 내는 풍경화나 인물화에서 기계와 같은 정확함과 수공업적 소묘기술로 그려진 차가운 느낌의 정물화,고도의 인플레이션 이후 경제의 합리화 과정에서 파생된 사회와 시민의 변모를 보여주는 도시풍경화 까지 모두를 총칭한다. 신즉물주의는 발달함에 따라 사회비판적 의도나 효과에 따라 좌익과 우익으로 분리되는 데, 좌익은 진실주의라 불리웠다가 신즉물주의로 정의되고, 우익은 불가사의한 사실주의라 칭해지게 된다.
 당사의 표현주의가 주관의 표출에만 전념한 나머지 대상의 실재파악을 등한시하고 비합리주의적인 경향으로 흐르는 데 반대하여, 즉물적인 대상 파악에 의한 실재감의 회복을 기도한 운동이다. 주동한 화가로는 베를린의 다다이즘운동에 가담한 G.그로스 및 O.딕스가 있다. 그로스는 처음 디자인 관계의 일에 종사했고, 또 신문이나 잡지에 풍자적인 데생을 발표하여 인정받았으나, 제1차 세계대전 후 혼란한 사회에 직면하자 좌익적인 입장에 서서 독일의 군국주의와 부르주아지에 대해 통열한 비판자가 되었다. 한편, 노동자의 아들인 딕스는 사회의 암흑 속에 사는 인간의 비참함과 추악함을 박진감 넘치는 묘사력으로 폭로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크라나하’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 밖에 주목되는 화가로는 실내나 정물을 소박한 기법으로 그린 G.슈림프, 기하학적 형태를 골격으로 하여 식물을 그린 A.카놀트 등이 있다.
 신즉물주의의 회화는 의도적으로 대상을 소묘적으로 정확히 그렸으며 감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비감상적 사물관찰방식으로 냉정하고 날카로운 시각을 가지고 추한 것을 꺼리지 않으며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대상이 고립적이며 정적인 것을 선호하고 또한 붓자국을 없앰으로써 개인의 필체와는 무관하게 표현된다.
 신즉물주의의 표현형식상 특징은 “콜라주원칙”이라 말해질 수 있는 데, 이는 다른 맥락으로부터 대상을 가져와 모은 듯하고 인물이 동떨어지고 주변이 진공상태처럼 느껴지는 효과이며 이는 전통회화나 사진과의 구별점이라 할 수 있다.
 신즉물주의는 시대의 표정이라 불릴 정도롤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대상을 직시하고 격렬하게 사회를 비판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그리하여 사회여론으로부터 거센 비난과 법적 제재를 받았으며 전시금지의 제약을 받았고 그 후에도 이데올로기에 의한 정치적 해석으로 공정한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금세기 후반의 사실주의적 미술(신구상회화, 포토리얼리즘 등)의 모델이 되었다. 이 운동을 포함한 후기 표현파의 양식을 마적(魔的) 리얼리즘이라고 표현하였고 나치스의 대두와 함께 이 운동은 박해받아 소멸하였다.


  오토딕스 : 노동자계급 출신인 오토 딕스는 형언하기 어려운 공포를 그린 전쟁그림을 그렸으며 타협이 없는 - 추상미술에 대한 전후의 반동과도 같은 - 사실주의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단순한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비현실적 느낌, 과장, 상세한 솔직성이 드러나는 마술적 사실주의라 할 수 있다. 그는 전후에 신비적이고 종교적인 표현으로 돌아섰다.

 막스 베크만 : 베크만은 단지 잠시동안만 사실주의자라고 말해질 수 있는 데 그는 르네상스 화가들과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들에게 영향을 받았다. 그의 작품 <십자가에서 내림>에서는 들쭉날쭉한 형태와 한정된 공간을 볼 수 있는 데 이는 큐비즘에서 받은 영향으로 보인다. 그는 후기 고딕과 큐비즘, 독일 표현주의를 혼합시켜 새로운 양식을 모색하였으며, 정치지향적이지는 않지만 전쟁말기의 폭력성과 잔인성에 반응하여 고통, 야만성, 역겨운 느낌의 색채로 표현된 인물들을 그렸다. 표현주의로부터 자라나왔지만 실재를 왜곡하면서도 정확하게 표현하는 베크만의 방법은 마술적 사실주의로 정의되었다. 1930년대 이후에는 나치에 의해 퇴폐미술가로 낙인찍힌 후 미국에서 여생을 보냈으며 이때의 작품에서는 마티스, 피카소의 영향인 듯한 풍부한 색채, 그의 독일인적 성격을 반영하는 문학적 주제에 대한 강조가 나타났다.
 게오르게 그로츠 : 그로츠는 전쟁에 참가하여 독재와 부패, 전쟁의 공포등을 관찰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그림을 그렸으며 전쟁후에도 좌익사상에 이끌리어 현실에 대한 혐오감이 표현되는 그림을 그렸다. <오스카 파니차에게 바침>은 그의 대표적 작품으로 폭동으로 번진 장레식이 선형이나 화염의 붉은 빛으로 만연해 있고 <신체검사합격>이라는 작품은 관료정치에 대한 그로츠의 공포와 혐오감을 보이고 있으며 큐비즘적 공간축약과 간결한 소묘들이 나타난다. <공화국의 자동인형들>은 형이상학파의 양식과 주제를 정치풍자에 이용하고 있다. 그로츠는 나치즘 때문에 미국으로 망명하여 풍자보다는 우호적이기까지 한 그림을 그리다가 2차대전으로 하여 혐오와 환멸의 표현이 나타나는 작품을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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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조형주의 ( neo plasticisme ) / 데 슈틸 (De Stijl)

신조형주의 ( neo plasticisme ) / 데 슈틸 (De Stijl)




  
 네덜란드어의 "양식" 이란 뜻으로서, 반 되스부르크와 몬드리안, 건축가 리트펠트가 1917년부터 1931년까지 주도했던 미술운동의 이름이자, 이들 이념의 강령을 담고 전달한 책자의 이름이기도 하다.
 P.몬드리안을 중심으로 한 기하학적 추상주의의 일파 또는 그 운동. 신조형주의라고 번역한다. 1917년 반 도스부르흐, 반톤게르로 등과 잡지 《데 슈틸:De Stijl》을 발행하고 순수한 조형회화 운동을 추진하였다. 1920년에 발간된 몬드리안의 《새로운 조형:Le neo plasticisme》은 그 이론적 해명이다. 이 책은 25년 《바우하우스 총서》의 한 책으로 출판되었는데 이는 이 운동이 바우하우스에게 영향을 미쳤음을 말해주고 있다.
 네오플라스티시즘은 1925년 이후 점차 분열하여 1932년에는 《데 슈틸》도 폐간되었지만, 그가 내건 합리주의 존중과 형식의 순수성에 대한 주장은 20세기의 반사실적(反寫實的)인 미술운동의 일환으로서 회화뿐만 아니라 건축·공예·상업미술 등에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고 새로운 조형이념의 창조·실현에 기여한 바가 컸다.
 데슈틸 그룹의 중심적인 이념은 이른바 " 신조형주의" 이다. 이는 조형예술에 있어서, 그 구성요소를 가장 기본적으로 요소로 환원하여 이것의 구성만으로 화면을 구성할 것을 주장한다. 즉, 곡선이나 사선은 피하고 주로 수평-수직선의 짜맞춤으로 한정하고, 색채 역시 빨강, 파랑, 노랑의 삼원색과 흰색, 회색, 검은색에 한정하여 구성할 것을 주장했다.
 수학자 쇤매커스의 신플라톤주의 철학(유출설,범신론적 세계관,신과의 합일) 그는 그의 저서 『세계의 새로운 이미지』(1915)에서 " 직각의 우주적인 탁월성" 을 논했다(" 지구공전의 힘의 수평선, 광선의 공간적 운동인 수직선" ). 또한 같은 책에서 적,청,홍의 삼원색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1914년 이후로 모든리안은 이러한 생각을 가진 쇤매커스와 거의 매일 접촉을 하고, 이 결과 순전히 잘려진 수평선과 수직선들로 이뤄진 몬드리안의 최초의 양식이 나타난다.
 첫째시기는 초창기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신조형주의 이념이 그 모습을 찾아가는 형성기(1916~21년)이며, 두번째시기는 리씨츠키 등의 러시아 구성주의 미술과의 조우로 인해 국제적 운동으로 발전하는 성숙기 (1921~25년), 그리고 마지막 시기는 몬드리안과 반 되스부르크의 결별로 인한 분열과 쇠퇴의 시기(1925~31년)로 나눌 수 있다.
 신비주의적 세계관에서 출발한 데 슈틸의 이념은 바로 수직-수평선의 힘들로 이루어진 보편적인 세계의 구성이었다. 수직과 수평의 기본적인 형태의 요소와 삼원색과 흑, 백색의 간결한 색은, 회화와 건축, 디자인에서 공통적으로 실현되었다. 그러나, 데 슈틸 운동의 핵심적인 두 축의 인물 중 한 인물인 반 되스부르크는, 후에 러시아의 구성주의 미술이념의 영향으로 다른 방향으로 접하게 된다.
 반 되스부르크는 이를 통해 다이내믹한 구성과 열린 구조의 데 슈틸의 건축양식을 구체화시키기도 하지만, 구성주의 개념은 신비주의적 관점을 토대로 한 건축과 그 내부 설비, 가구등의 일관된 디자인 방식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를 통해 반 되스부르크는 결국 초기의 데 슈틸 이념과 거리를 두게 된다. (후에 반 되스부르크는 자신의 건축이념이기도 했던 16조항에 따르지 않는다.) 반면, 반 되스부르크와 결별한 몬드리안은 1931년이 지난 후로도 (미국으로 건어가서도) 그의 조형원리에 맞는 그림을 그려나간다.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 원리에 따른 회화는 입체주의를 통해서 순수한 추상미술로 접어드는 한 예를 보여주고 있으며 (신지학의 영향과 입체파의 영향을 통한 초기 추상미술로의 진입은 말레비치의 경우에서도 엿볼 수 있다), 반 되스부르크와 리씨츠키의 만남은 데 슈틸과 러시아 구성주의 미술을 통한 국제적인 추상미술운동의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리고, 반 되스부르크나 리트펠트의 등의 디자인은 바우하우스를 통해서도 기능주의 디자인과 건축의 영향을 주었다.
 몬드리안은 초기에 자연주의적,표현주의적 작품을 보이다가, 1912~13년경에는 입체주의적 경향의 작품을, 그리고 1913~14년에 이르러 단음적 직선과 타원 구도의 작품을 내놓는다.
 1915~16년 경 몬드리안은 쇤매커스와 빈번한 조우를 갖는다. 몬드리안은 이 당시에 신지학에 관심이 있었다. 몬드리안은 그와의 만남을 통해, < 회화에 있어서의 신조형주의> 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발표하고 이 글은 그후 1917~18년에 걸쳐 < 데 슈틸> 을 통해 연재된다. (신조형주의한 말은 쇤매커스의 저서에서 최초로 쓰였다.) 1917년 이후로, 순수한 조형체계에 이르게 된다.
 건축에서는 오우트와 얀 빌스등의 활동이 있었으나 신조형주의 이념과는 거리가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데 슈틸 건축은 1920년 경에 실험적인 실내장식을 디자인 했던 건축가 리트펠트로부터 비롯된다. 그는 반 되스부르크와 몬드리안으로부터 전체적인 데 슈틸의 건축미학을 발전시키게 된다.
 데 슈틸 운동은 1925년경부터 분열이 일어났다. 반 되스부르크가 대각선을 도입하자, 몬드리안이 이에 반발, 결국 몬드리안이 데 슈틸 그룹에서 탈퇴하게 된다. 반 되스부르크의 경우, 구성주의 개념의 영향을 받아 신조형주의의 원리를 거부하였고, 건물과 그 건물 내의 가구 등을 신비주의적 이념에 의해서 일체적으로 디자인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 (데슈틸의) 그러한 공동 작품적 이상은 일상생활의 제품들로부터 동떨어진 자의적인 문화를 초래할 뿐이다" . 그는 건물과 가구, 설비 등의 분리를 주장했던 리씨츠키의 방법을 받아들였는데, 그러나 이는 데 슈틸 건축이념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리트펠트 역시 반 되스부르크와 직접적인 교류 없었으나 다른 방향으로 전개해 나갔다. 즉, 가구디자인에 곡면을 도입했다. 이는 기술적인 문제 때문인데, 둥근 표면이 본래적으로 강력한 구조적 힘을 갖고 있기때문이었다. 그의 건축 역시 25년 이후 변화했다.
 반 되스부르크의 건축 역시 자신의 < 신조형주의 건축이념> 과 다른 건물들을 짓는다. 1928년에 완성된 < 까페 로베트> 와 1928~29년에 지은 자신의 집에 자신의 건축원칙16항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 결국, 1930년에 이르러 보편적 조화의 세계에 대한 신조형주의 이상은 허물어지게 된다. 1931년 반 되스부르크의 사망 후 이 운동의 활기찬 정신은 사라지고, 몬드리안만이 회화의 영역에서 자기의 세계를 전개해나간다.

몬드리안 ( Piet Mondrian : 1872.3.7~1944.2.1 )
 네덜란드의 화가. 아머르즈포르트 출생. 칸딘스키와 더불어 추상화의 선구자로 1894년 암스테르담미술학교를 졸업했다. 자연주의 화풍에 철저하였으며 쓸쓸한 겨울풍경과 정물 등을 그렸는데, 뭉크의 영향을 받아 섬세하면서도 어딘지 병적이었다. 그 후 신비주의 화가 얀 투로프를 알게 되어, 《나무》의 연작(連作)을 권유받아 차차 추상으로 바뀌었다. 칸딘스키의 우발적인 비대상(非對象)의 추상과 비교하면, 그의 경우는 문자 그대로 나무면 나무, 모래언덕이면 모래언덕의 핵의 추상으로서 추상화가 탄생한다. 1910년 파리에서 포브의 감화를 받았으나, 17년 도스부르크 등과 ‘데 슈틸운동’을 일으켰으며, 끝내는 수평과 수직의 순수추상으로 향하였다. 이는 질서와 비율과 균형의 미이며, 자신도 고독과 청빈에 만족하며, 종교적인 엄격한 경지를 지녔다. 38년 런던을 거쳐, 40년 뉴욕으로 망명하였다. 주요작품에 《햇빛 속의 풍차:Windmill in Sunlight》 《빨간 나무:The Red Tree》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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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7, 2013

신인상주의 ( Neo-impressionnisme : 新印象主義 )

신인상주의 ( Neo-impressionnisme : 新印象主義 )


쇠라 / 아니에르에서의 물놀이  / 1884 / 캔버스에유채 / 영국 런던 국립미술관 소장

 근대 프랑스 회화의 조류. 인상주의를 과학적 방법으로 추진하고자 한 운동. 신인상주의는 G.쇠라, P.시냐크등을 중심으로 행해진 점묘주의등의 이론과 수법 및 그 운동을 말한다. 쇠라가 죽은 뒤에는 시냐크가 그 대변자가 되었다. 빛의 분석은 인상주의의 수법을 계승하면서도 인상파의 본능적· 직감적인 제작 태도가 빛에만 지나치게 얽매인 나머지 형태를 확산시킨다는 점에 불만을 느끼고, 여기에 엄밀한 이론과 과학성을 부여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색채를 원색으로 환원하여 무수한 점으로 화면을 구성함으로써 통일성을 유지하였다.
 즉, 그림물감을 팔레트나 캔버스 위에서 혼합하지 않고 망막(網膜) 위의 시각혼합으로 필요한 색채를 얻는 방법이다. 예를 들면, 청색과 황색의 작은 점들을 수없이 배열해나가면 시각적으로는 녹색으로 보이는 따위이다. 또한 형태나 구도에서는 ‘황금분할(黃金分割)’ 등을 자주 사용함으로써 고전적인 회화에서처럼 안정성을 찾으려 하였다. 이와 같은 특징을 대표할 만한 작품이 쇠라의 《그랑드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 (1886)와 시냐크의 《펠릭스페네옹의 초상》(1990)이다.
 인상주의가 사용한 기법을 과학적으로 더욱 발전시키면서도 동시에 인상주의의 경험주의적 사실주의에 대한 반발, 고전주의적 정신의 부활을 꾀한다는 기치 하에 쇠라가 1884년 5월의 앵데팡당 전에 출품한 「목욕하는 사람들」을 보고 비평가 펠릭스 페네옹이 신인상주의라 이름붙였다. 쇠라는 거기서 시냑을 만나 함께 '앵데팡당 미술가 협회'라는 새로운 그룹을 만들었다.
 점묘주의 혹은 분할주의는 신인상주의가 사용하는 독창적인 테크닉의 기반을 이루는 것으로써, 캔버스에 색칠을 해 나갈 때 순색만을 사용하되 이를 일체 뒤섞지 않으면서 작은 점으로 찍어나가는 방법을 말한다. 이 경우 색조의 순도는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보는 이의 망막위에서 중간색이 형성되는 효과를 낳게 된다. 이 방법은 와토, 들라크루아, 터너 등이 이미 사용하였으며 인상주의자 중 르노아르가 최초로 사용했다.
 쇠라등의 신인상주의 화가들은 이러한 기법을 좀 더 과학적으로 발전시킨 자신의 기법에 '점묘주의' 대신 '분할주의'라는 용어를 더 어울리는 것으로 생각했다. 1887년부터 1891년 사이 쇠라는 과학적 이론들을 과학적이고 정서적인 선과 색조로 환원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해 나가면서 전통적인 아카데미 이론과의 접목을 시도하기도 한다.
 색채 분할등 인상주의의 기법을 더욱 체계화시키는 동시에, 신인상주의자들은 인상주의자들의 경험주의적 사실주의에 정면으로 대비되는 정신, 즉 그림이란 신중하게 고려되고 계획될 수 있으며 과학적으로 계산된 효과가 예견, 지향될 수 있다는 사고를 도입시켰다. 세잔느와 더불어 쇠라가 현대 회화의 혁신적 인물로 취급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신인상주의는 뤼스, H.크로스, D.피에, C.앙그랑, 리셀베르크 등의 동조자를 얻는 한편, 고흐, 고갱, 피사로 등에게도 한때 영향을 주었다. 또한 조형이론의 존중과 거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 지성주의 및 구도나 형태의 기하학성 등 여러 특색은 20세기의 큐비즘과 오르피즘, 추상회화 등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 회화운동의 이론을 체계화한 시냐크의 저서 《들라크루아에서 신인상주의까지》(1899)가 있다.

쇠라 ( Georges Pierre Seurat : 1859.12.2~1891.3.29 )
 신인상주의미술을 대표하는 프랑스의 화가. 파리 출생. 1878년 파리의 관립미술학교에 입학하여 앵그르의 제자 H.레만의 지도를 받다가, 다음해 지원병으로 입대하여 브레스트의 해안에서 병역을 마쳤다. 파리로 돌아와서는 고전 작품을 연구하고 소묘에 힘을 쏟는 한편, 셔브뢸, 헬름홀츠 등의 색채학과 광학이론을 연구하여, 1881년경 들라크루아의 작품의 색채대비와 보색관계를 해명한 글을 발표하여 세인의 관심을 모았다. 이러한 이론을 창작에 적용하여 점묘(點描)화법에 의한 최초의 대작 《아니에르에서의 물놀이:Une Baignade, Asni뢳es》(1883∼1884)를 완성하였는데, 이 작품은 1884년 살롱에 출품하여 낙선하였으나 앙데팡당전(展)에 출품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일을 인연으로 평생 화우(畵友) P.시냐크와 사귀게 되었다. 1885년 《그랑드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를 제작하여 다음해에 열린 인상파 최후의 전람회에 발표하였다. 이것은 전작(前作)의 수법을 한층 더 발전시켜 순수색의 분할과 그것의 색채대비에 의하여 신인상주의의 확립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이 밖에 《포즈를 취한 여인들:Les Poseuses》(1888) 《기묘한 춤 Le Chahut》(1889∼1890) 《화장하는 여인》(1890) 등의 작품이 있다. 모두 인상파의 색채원리를 과학적으로 체계화하고 인상파가 무시한 화면의 조형질서를 다시 구축한 점에서 매우 의의가 있으며, P.세잔과 더불어 20세기 회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전염성 후두염으로 32세의 젊은 나이에 파리에서 요절하였다.

시냐크 ( Paul Signac : 1863.11.11~1935.8.15 )
 프랑스의 화가. J.P.기요맹의 제자. 파리 출생. C.모네의 작품을 보고 감동하여 화가가 될 뜻을 세워 1883년 20세 때 아카데미 리브르 드방에 들어가 인상파의 화풍을 익혔다. 84년 제1회 앙데팡당전에 처음 출품하고, 그때 출품된 G.쇠라의 작품에 공감하여 그와 친교를 맺고부터는 색채의 동시대비의 이론과 기법을 연구하여 그 성과를 86년의 인상파 최후의 전람회에 쇠라와 함께 발표함으로써, 신인상주의의 기치를 선명하였다. 그의 작풍은 과학적 점묘주의에서 나중에는 쇠라의 점묘보다 큰 점을 이용한 모자이크풍의 묘사법으로 변화했는데, 풍경화가로서 각국의 바다 풍경, 특히 프랑스 각지 해항(海港)의 풍경그림에 특색 있는 작품이 많다. 앙데팡당전의 창설자의 한 사람이며, 1908년부터 종신토록 앙데팡당전의 회장을 지내면서 청년화가들을 격려하였고, 신인상주의의 바이블이라고 일컬어지는 《들라크루아로부터 신인상주의까지:De Delacroix au Neo-impressionnisme》 (1899) 등의 저서를 남기는 등 생애를 신인상파 지도자로서 정열적으로 활약하였다. 주요작품에 《마르세유항의 풍경》(1905) 등이 있다.




개봉동화실

신사실주의 ( 新寫實主義 : Nouveau Realisme )

신사실주의 ( 新寫實主義 : Nouveau Realisme )



 1950년대 초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하여 등장한 유럽에 있어서의 새로운 경험의 전위미술운동. 당시 유럽과 미국의 지배적인 회화 조류이던 앵포르멜 미술, 추상표현주의, 타시즘 등 일련의 추상미술에 대응해서 일어났다. 신사실주의는 공업 제품의 단편이나 일상적인 오브제를 거의 그대로 전시함으로써, '현실의 직접적인 제시'라는 새롭고 적극적인 방법을 추구했던 예술이라는 점에 특색이 있다. 이 방법은 신사실주의의 가장 주요한 이념으로, 이브클랭의 비물질화 사상에서 발전한 것이었다. 즉 공업화된 사회를 현대의 자연으로 보아, 그 속에서 생산되는 물체를 무매개적으로 제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사실주의의 중심이 된 사람은 프랑스의 비평가 피에르 레스타나로서 그는 1960년 4월 밀라노의 아폴리네르 화랑에서 제1회 선언을 발표하고, '누보 레알 리스트전'을 개최했다. 이 전시회에서 처음으로 누보 레알리스트란 호칭이 쓰여졌으나, 정식으로 그룹이 결성된 것은 그해 11월이었다. 이어 60년 말 파리에서 열린 제2회 전위 미술제에서 최초로 작품을 발표했고, 이듬해 5월 파리의 제이 화랑에서 '다다를 넘는 40도'라는 전시회가 조직되어 신사실주의의 존재가 세상에 인정되게 되었다.
이 전시회에서 아르망은 그림물감의 튜브나, 진공관과 같은 대량 생산의 공업 제품을 집적한 작품을 출품하여 '현실의 직접 적인 제시'라는 방법을 구체화시켰다. 한편 다니엘 스포에리는〈타블로 피에지 (함정의 회화)〉라는 작품을 출품했는데, 음식물이 남아있는 식기류를 쟁반 위에 그대로 고착시킨 것이었엇다. 이것은 음식물이 남아 있는 상태를 현상대로 제시한 것으로 팅겔리의 폐품이용의 작품과 상통하는 것이었다. 또 60년의 살롱 드 메에 출품했던 세자르의 폐물 자동차를 입방체 상태로 고정시킨 '압축 조각'은 소재의 특이성과 메티에의 방기라는 점에서 신사실주의의 미학을 잘 나타내주는 작품이다.
 신사실주의의 그룹의 최초의 참가자는 레스타니, 아르망, 뒤프렌, 앵스, 이브 클랭, 마르시안 레이스, 다니엘 스포에리, 팅겔리, 텔라, 니키 드 생 팔, 크리스토 등이 참가했다. 신사실주의의 세 개의 선언을 발표하여 이념적으로는 통일을 보였으나, 구체적인 개개 작품의 신사실주의로서의 공통성은 결코 명확하지 않다. 공통적이라면 '현대의 자연에 대한 공통적인 감각과 집단적 행위의 일시적인 필요성의 자각'이라는 점뿐이다.
 레스타니에 의하면, 기계화되고 공업화되어 광고로 가득 찬 것이 현대의 자연이므로, 신사실주의 화가는 그 자연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제시'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전략적 필요성에 따라 그룹이 결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구로구미술학원 / 전원미술학원 구로 캠퍼스

신라고분 (新羅古墳)

신라고분 (新羅古墳)



 신라는 무덤을 통해볼 때 크게 3기로 나눌 수 있다. 조기(早期)는 원삼국시대로 움무덤[土壙墓]을 축조한 시기이며, 전기(前期)는 4세기 전반~6세기 초로 경주에서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 영남에서는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墳]이 축조되었다. 마지막 시기는 6세기 전반 이후로 경주에서는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 축조되나, 지방에서는 고분이 소멸되는 양상을 보인다. 신라의 주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논란이 되는 것은 돌무지덧널무덤의 선행묘제로서 돌무지무덤이 존재하였는가 하는 문제이다. 대표적 전파론자인 최병현과 김원룡은 돌무지덧널무덤의 나무곽 구조 위에 별도의 목조시설이 있는 것은 시베리아에서 유행한 묘제와 일치하는 것으로 돌무지무덤이 선행되지 않았다고 본다. 반면, 일제강점기 때 우매하라[梅原末治]의 낙랑 나무덧널[木槨]과 대구 대봉동 고인돌돌무지의 결합설 이래, 북한의 박진욱이 고구려의 돌무지무덤[積石墓]과 나무관무덤[木棺墓]의 결합형태로, 강인구가 초기의 고구려계 돌무지무덤에 뒤에 다시 봉토(封土)를 부가하였다고 보았다. 사실, 돌무지덧널무덤은 경주지역에 한정된 묘제로 당시 영남지방에서는 구덩식돌덧널무덤, 굴식돌덧널무덤, 그리고 독무덤 등이 나타난다. 그러나 최근 울산지역 중산리유적의 발굴조사 결과 나무덧널무덤에서 돌무지덧널무덤으로의 영향을 받아 성립했다는 자체발생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대체로 경주지역에서의 무덤축조는 언덕 위에서 평지로, 소형무덤에서 대형무덤으로 변하면서, 한편으로는 나무덧널을 보존 연장하고, 한편으로는 봉토의 거대화를 위해 고인돌과 같은 돌무지 전통이 새로 채용되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경주의 돌무지덧널무덤은 귀족층의 묘제로 보이며, 관의 위치에 따라 지하식·지상식·반지하식 등으로 나뉘는데, 대부분 지하식이다. 이는 지하에 광을 파고 상자형 나무관을 짠 다음, 냇돌로 둥글게 쌓고 다시 봉토를 덮고 둘레돌[護石]을 돌린 것으로 추가장(追加葬)이 되지 않는다. 초기에는 주곽(主槨) 외에 부곽(副槨)이 있었으나, 부곽이 사라지고 유물은 주곽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돌무지덧널무덤에서는 다곽묘(多槨墓)와 단곽묘(單槨墓)가 있는데, 연구 초기에는 이것이 시기적으로 변하는 것으로 보았으나 근래에는 계급 차이의 반영으로 보고 있다.
 대표적 돌무지덧널무덤으로는 황남동 109호분과 천마총·호우총 등이 있다. 돌무지덧널무덤 이후에 등장한 묘제는 굴식돌방무덤으로, 평면이 장방형이면서 평천정(平天井)을 한 것과, 방형널방에 궁륭식 천정을 가진 것으로 나뉜다. 관대에는 대개 머리베게[頭枕]와 족좌(足座)가 있다. 출현시기는 경주 보문리 부부총이 돌무지덧널무덤과 굴식돌방무덤이 쌍분을 이루므로 가장 고식으로 보이며, 그 토기의 양상으로 6세기 중기로 편년된다. 평면이 대체로 방형이고 ‘ㄱ’자형의 널길[羨道]이 있는 이러한 굴식돌방무덤은 김해·고령·합천· 현풍·인산·경산·경주 등에서 발견된다. 한편, 순흥 읍내리에서는 고분벽화가 나와서 신라· 가야와는 이질적인 고구려계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며, 쌍상총(雙床塚)에서는 방형널방의 남벽 중앙에 ‘모’자형 널길이 나 있다.

천마총 (天馬塚)
 경주 황남동 고분군 일대를 정비, 정화하여 대릉원이라 이름지은 고분공원 안 서북쪽에 위치한 고분으로 원래 경주 155호분 이라고 불려왔던 밑지름 47m, 높이 12.7m의 원형분이다. 고분은 지표에 큰 냇돌을 고르게 깔아 목곽 바닥으로 삼고 거기에 동서 6.6m, 남북 4.2m, 높이 2.1m로 추정되는 목곽을 설치하였다. 목곽안에는 중앙에서 서쪽으로 약간 치우쳐서 길이2.2m, 너비 80cm의 목관을 동서로 길게 놓고, 그 주위에 자갈로 너비 50cm, 높이 40cm의 석단을 쌓았다. 석단 동쪽에 접하여 길이 1.8m, 너비 1.0m, 높이 0.8m의 나무로 짠 부장품수장궤(副葬品收藏櫃)를 남북으로 길게 놓았다.
 4세기부터 6세기 전반까지 조형된 대형의 돌무지 덧널무 덤(적석목곽분)은 당시 신라의 힘과 부를 상징하고 있다. 1973년에 발굴되었는데 장신구류 8,766점, 무기류 1,234점, 마구류 504점, 그릇류 226점, 기타 796점으로 모두 1만 15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중 일부가 국립경주박물관 별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금관(金冠)과 천마도장니(天馬圖障泥)이다.
 목곽 주위에는 큰 냇돌을 밑지름 23.6m의 원형으로 목곽과 같은 높이까지 경사지게 쌓아 올리고, 목곽 위에는 약4m 높이로 냇돌을 반구형(半球形)으로 쌓아 그 표면에 진흙을 약 30cm 두께로 바르고 정상부에는 진흙속에 마주장식품(馬具裝飾品)들을 묻었다. 진흙 밖으 로는 산흙을 쌓아 봉토를 만들었고 봉토 기슭에는 냇돌을 높이 1.2m로 쌓아 호석(護石)으로 삼았다. 목관안에서는 피장자(被葬者)가 착용하였던 금관, 금제과대(金製 帶), 요패(腰佩), 팔지, 반지, 목걸이 등의 장신구류와 환두대도(頭大刀)가 발견되었고, 부장품수장궤 뚜껑 위 에서는 금제조익형관식(金製鳥翼形冠飾)과 금제접형관식 (金製蝶形冠飾) 및 금동모(金銅帽), 금동제경갑(金銅製脛甲) 등의 파편이 발견되었다.
 수장궤 안에서는 투조금동판식죽심장니(透彫金銅板飾竹心障泥), 백화수피제(白樺樹皮製), 천마도장니, 은제/금동제 안장 등의 마구류가 위쪽에 놓였고, 그 밑에 백화수피제 채화판 (彩畵板)이 있었다. 이들 밑에는 금·은·금동 및 청동으로 된 각종 그릇과 많은 칠기와 유리그릇이 있었고, 맨 밑에는 쇠솥과 각종 토기들이 가득 차 있었다.
 석단위에서는 동쪽에서 금모(金帽)·은제과대 등의 장신구류가 발견되었고 그밖의 자리에서는 환두대도를 비롯한 각종 무기류와 철정(鐵鋌)이 나왔으며, 금동제식리(金銅製飾履)는 서북쪽 모서리에서 발견되었다.
 금관은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시대 금관 가운데 금판(金板)이 가장 두꺼우며 금의 성분도 우수하다. 또한 천마도장니는 천마총 출토품 가운데 세상을 가장 놀라게 한 유품이다. 장니란, 말 양쪽 배에 가리는 가리개로, 흙이나 먼지를 막는 외에 장식물로도 사용되었다. 자작나무 껍데기를 여러 겹으로 겹쳐서 누빈 위에 하늘을 나는 천마를 능숙한 솜씨로 그렸는데, 지금까지 회화 자료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던 고신라의 유일한 미술품이라는 데 큰 뜻이 있다. 이 고분의 명칭을 천마총이라고 한 것도 여기에 연유한 것이다. 이 무덤은 지하나 지상에 덧널(목곽)을 짜놓고 그 속에 널과 껴묻거리를 넣은 후 목곽의 위에 돌을 쌓고 그 위에 봉토를 씌우는 특이한 구조이다. 주 부분이 목곽이기 때문에 세월이 지나면 썩고 위의 적석과 봉토가 내려앉아 내부가 노출되기 어렵다. 구조상 합장이 어려워 단독묘가 되며 후장의 풍습에 따라 많은 유물이 부장됨으로써 오늘날 신라의 유물을 많이 접할 수 있게 된 원인이 되었다.

[천마도]  신라(6세기경), 53×75cm, 국립경주박물관 소장(경북 경주시 황남동 천마총 출토). 국보 제207호. 천마총은 1973년에 황남대총의 발굴을 위해 시험발굴을 하여 알려지게된 5세기 말∼6세기 초의 전형적인 단곽식(單槨式) 돌무지덧널무덤이다. 지상에 높이 2m 정도의 덧널을 짜 놓고 그 안에 널을 안치한 후, 이 덧널 위에 높이 약 4m의 돌무지를 쌓고 그 위에 봉토를 덮은 구조로 무덤 전체의 규모는 바닥밑지름 51.6m, 높이 12.7m의 규모이다. 이 무덤은 원래 155호분이라 불리어 왔는데, 천마총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천마도가 그려진 말다래가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이 무덤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제21대 소지마립간(479-499)이라는 설과 지증마립간(500-513)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천마도는 신라의 그림 수준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말다래는 말을 탄 사람의 옷자락에 진흙 등이 튀어 묻지 않도록 말의 배 양쪽에 늘어뜨린 네모난 판인데, 자작나무 껍질로 판을 만들어 중앙에 하늘을 나는 말을 그리고 그 가장자리에 당초문(唐草文)을 돌렸다. 말다래는 가로 75cm, 세로 53cm의 크기이다. 안쪽 주공간에 백마를 그린 것인데 말은 네다리 겨드랑이에서 고사리형 날개가 나오고 길게 내민 혀바람에 나부끼는 갈기와 위로 솟은 꼬리 등이 하늘을 나르는 천마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 천마는 사실적인 그림이 아니고 백색 일색이기 때문에 말의 몸에 힘이 나타나 있지는 않으나 실루엣으로서는 잘 묘사되었고 둘레의 인동당초문에도 각부가 정확한 비율로 구성되었으며 고구려 사신총 등에서 보는 완숙한 당초문에 비해 손색이 없다.


[천마총 금과대(天馬塚金죡聖) : 허리장식]  신라(6세기경)의 허리띠 및 허리 패물. 국보 제190호.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과대(44개) 길이 125 cm, 요패(13개) 최장 길이 73.5 cm인 이 허리띠는 목관 안의 피장자의 허리 위치에서 착용된 채 발견되었다. 허리띠 안쪽에 대어 있던 가죽은 이미 모두 삭아 없어져버렸다. 금허리띠는 44개의 과판(띠를 구성하는 판)과 그 양끝은 띠고리와 고리에 끼우는 부분으로 되어 있으며 모두 13조의 허리장식이 달려 있다. 과판은 구름 모양이 뚫은 무늬로 새겨져 있고, 전면에 9개의 작은 구멍이 뚫려 있어 안에 댄 가죽에 못을 박게 되어 있다. 이 과대는 신라 과대로서는 가장 큰 것이다. 허리 장식은 기본적으로 긴 타원형 금판이 사각형의 연결판에 의해 다섯 개가 연결되어지고, 그 끝에 꼬리장식으로 숫돌 모양, 곡옥, 유리옥, 족집개, 구멍 뚫은 병 모양, 고기 모양 등이 달려 있다. 신라의 금관과 함께 신라의 독특한 장신구이며, 중국 남조(南朝) 양(梁)나라 때의 고분에서도 비슷한 과판들이 발견되었으나 요패수식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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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4, 2013

신고전주의 미술 ( Neoclassical Art : 新古典主義美術 )

신고전주의 미술 ( Neoclassical Art : 新古典主義美術 )

신고전주의 대가 다비드의 작품‘마라의 죽음’(1793)

 신고전주의 미술은 18세기 중반에서 19세기 전반 유럽세계를 풍미한 예술양식으로서, 매너리즘에 빠진 바로크·로코코의 인습에 반발하여 고대 그리스·로마 양식으로의 복귀경향을 보여준다. 신고전주의는 합리주의 미학을 바탕으로 고대 예술의 특징인 형태의 이성적인 단순화를 선호하였는데, 이러한 명징성과 질서·이성은 계몽의 시대인 당시의 문화양상과도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고대에 관한 관심은 이미 18세기 초부터 보이지만 특히 헤라크라네움과 폼페이의 발굴, 그리스 소아시아 조사 여행과 더불어 고대문명에 대한 흥미가 고취되었으며 이러한 고고학적 연구성과에 힘입어 대표적인 이론서들이 출간되기에 이르었다. 그 중 오늘날에도 신고전주의의 선언서로 인식되는 빙켈만의 "그리스 미술 모방론"은 고전주의 미술에 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 일으켜 이후 고전 고대 미술 작품에 대한 다각적 연구, 역사적·비평적 고찰이 활발하게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당시 유럽 사회에 이미 로코코의 전통과 낡아빠진 매너리즘에 대한 반작용으로 로마·에트루스칸·이집트·그리스의 영감(inspiration)으로의 회귀 경향이 널리 유포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피라네시는 1748년 이후 간행한 {로마경관도}에서 고대 유적에 근거한 로마의 베투라·이집트· 에트루스크의 고대 건축 도안들을 싣고 있으며, 이집트 미술의 경우 놀던, 포코코, 피라네시 등의 18세기 중반 저술을 통해 널리 알려지고 1748년에는 capitoline 박물관에 이집트관이 개관되기도 하였다. 또 후에 크게 유행하게된 그리스 미술에 대한 취향은 댈튼, 로이 스튜어트, 찬들러 등의 저술을 통해 고취되었다.
 발생 초기부터 유럽 전역에 걸쳐 국제성을 획득한 신고전주의는 명료한 이론을 이루어냈는데, 대표적인 신고전주의 이론가로는 맹그스와 밀리지아, 앞서 언급한 빙켈만을 들 수 있다. 먼저 맹그스는 그의 {회화에 있어서의 美와 양식에 대한 고찰} (Gedanken uber die Schouheit und Geschmack in der Malerei, 1762년)에서 美를 관념의 완벽한 표현이며 그 관념은 思考에 의해 마음 속에 존재하는 표현이라고 하였다. 나아가 '회화실기수업' 강의에서 '진정한 예술'이 되기 위해 회화는 일정한 방법과 고정된 규칙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빙켈만에게서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나, 그는 미의 근본적인 원칙은 정확한 비례와 단순함 속에서 배려된 다양함을 동반한 '통일'과 '단순성'이라고 정의하였다. 또 작품은 개성이나 특정 상태의 심리를 드러내어서는 안되며 내부의 평온함이 구체적인 구성과 외부정신의 표현으로 반영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한편 밀리지아는 건축도시계획에 있어 선구자적인 생각을 해낸 인물로서, 단순한 그리스 모델의 '모방'이 아닌 '그리스인들의 자연관' 자체를 따를 것을 주장하였다. 그에게 있어 이상적인 미는 보다 철저한 연구와 상상력이 요구되는 선택적인 과정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었다. 특히 건축이 완벽함을 얻기 위해서는 첫째, 균형·조화·적합성 추구, 둘째, 안락함 추구, 세째, 견고함 추구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건축에 있어 자연스러운 단순함, 이성의 법칙을 요구하는 신고전양식은 건물의 '이성'을 추구, 방 배치에 있어서의 명확성·새로운 비율·형태의 간결성·부분의 조화·윤곽선과 표면의 매끈함 등을 특징으로 한다. 고대 그리스·로마 건축이 가장 집중적으로 연구되면서 도리아 이오니아 코린트식 기둥이 많이 사용되었으나 단, 합성된 것은 배제하였다. 로마의 파르테논 신전을 연상시케는 건물, 돔(dome)구조, 삼각 아치나 기념주, 정원 건축이 유행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 영국의 로버트 아담 윌리암 챔벌즈, 프랑스의 수플로, 독일의 쉰켈 등을 들 수 있다. 그 중 영국에서는 주로 그리스·로마양식의 두 경향이 공존하고 있었는데, 로버트 아담의 <호움하우스>(1772-1773년)의 객실은 로마의 치장벽토 장식을 채용함으로써 로코코 건축 내부의 섬세함을 간직하고 평활한 평면이나 대칭성·기하학적 정확성에 독특한 신고전주의적 주장을 보이고 있다. 이밖에 토마스 해밀턴의 <에딘버러 중학교>는 그리스 양식을 간직하고 있으며 윌리암 챔벌즈의 <서머셋하우스> 등이 유명하다.
 프랑스의 경우 최초의 기념비적인 신고전주의양식의 건물로 수플로(Jaque Germain Soufflot, 1713-80)의 걸작 <팡테옹>(생 즈느비에브 성당, 1755-1792년)을 들 수 있는데, 차갑고도 명확한 외관을 가진 이 건물의 주랑현관은 고대 로마의 신전에서 따온 것이었다. 이에 비해 가브리엘의 <트리아뇽 성>은 그리스 건축에 비견될 수 있으며 빅터 루이의 극장은 19세기 극장의 모범이 되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도래한 제정시대의 건축-샤루글랭의 방돔(Vendome)궁전, 개선문 등-은 19세기초 프랑스의 '제정(Empire)양식'을 보여주는데, 이는 나폴레옹에 의해 이상으로 여겨진 고대 로마 건축의 재현을 기도한데서 생긴 양식이다.
 불레(Etienne-louis Boullelee, 1728-99)와 그의 제자 르두(Claude Nicolas Ledoux)는 이 시대의 탁월한 건축가들로서, 환상적 건축(visionary architecture)의 전통을 창조하는데 이바지하였다. 블레의 이상은 '장엄한 고귀성'을 가진 건축, 거대하고 단순한 괴체를 결합함으로써 이룩하고자 한 효과에 있었다. 그러나 그의 설계의 대부분은 그 규모가 지나치게 큰 것이어서 오늘날에 있어서도 거의 건립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는 球體를 완벽한 형태라고 했다. 어떠한 원근법상의 트릭도 球體적 외모를 변형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우주를 반영하는 아이작 뉴우튼 기념관을 설계했다. 블레와 그 후계자들은 19세기에는 거의 잊혀져 있다가 20세기 초에 재인식되어 '생각해볼 수 없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되었다. 독일의 대표적 건축가인 쉰켈은 그리스 양식의 <베를린위병소>(Hauptwache), <베를린 왕립극장>(Schauspielhaus) 등을 설계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그리스 양식을 정확이 인식, 그 가치를 충분히 발휘하고 있다.
 엄격하고 단순한 규칙들은 적용하는 이러한 건축개념은 점차 그 힘과 영향력이 전세계적으로 퍼지고 있던 '이성'의 옹호자들에게 강한 공감을 불러 일으키면서 미국의 건국 공로자의 하나인 제퍼슨같은 사람은 몬티첼로 있던 자신의 저택을 이러한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설계했고 각종 관공서가 있는 워싱턴 시가 '그리스 복고'양식으로 계획되었다. 그의 제자인 라트로브(Benjamin Latrobe, 1764-1820)의 <볼티모어 대성당>은 신고적주의 양식을 채택하되 고딕양식이 적극적으로 도입된 건물이다. 성당의 내부는 고대 로마의 돔(dome)과 궁륭이 덮인 공간(vaulted spaces)에서 따온 것이지만 외부는 고딕 바로크계의 종탑을 가지고 있다. 결국 이 건물은 신고전주의 양식의 자유롭고도 상상력이 풍부한 표현을 나타내주고 있는 것이다.
 조각 역시 고대조각에 주어진 범례에 압도되고 있었으며 가장 성장한 분야는 초상이었다. 먼저 우동(Jean Antoine Houdon, 1741-1828)의 작품 <볼테르>(1808년)는 모델의 날카로운 기지와 통찰력 있는 지성, 위대한 정신의 깊은 동정심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으며, 고전적 의상도 어설픈데가 없다. 한편 이탈리아의 유명한 조각가 카노바(Antonio Canova, 1757-1822)는 神과도 같은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 나상으로 제작된 고대 지배자들의 초상을 본떠서 거대한 나폴레옹상을 제작했으며 극히 명백하게 이상화된 <비너스 모습의 파울리자 보르게제>(1808년)를 조각했다. 이 작품은 정면과 후면만을 고려해서 만든 일종의 '환조의 부조'이며 전체에 걸쳐 흐르는듯한 윤곽선의 우아함은 이 작품의 매력을 더해주고 있다.
 회화에 있어 신고전주의 양식의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다비드(Jacque Louis David, 1748-1825)의 경우, 초기 작품에는 18세기 프랑스의 관능적인 로코코 취미가 잔존하고 있었으나 1775-1871년 로마유학 시기 이후 신고전주의화풍을 발전시켰다.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1785년), <소크라테스의 죽음>(1787년)은 푸생적인 요소-즉 구도는 화면과 평행해서 부조와같이 전개되며 인물은 彫像과도 같이 확고하고 부동의 느낌을 준다-뿐 아니라 예리하게 집중되어 정확한 음영을 이루는 채광법은 카라밧지오에게서 따온 것이다. 이 그림은 새로운 이상적 양식을 보여주는 동시에 삶의 생생한 모습을 담고 있다. 그는 프랑스 혁명 시기 그의 최고 걸작품인 <마라의 죽음>(1793년)을 그렸다. 프랑스혁명의 지도자중 하나였던 마라를 기념하기 위한 이 그림에는 헌신적인 심상과 역사적인 설명이 함께 녹아 있다.
 다비드는 '미술이란 자연을 가장 아름답게, 완벽하게 모방하는 것이며 미술작품의 목적은 눈을 즐겁게 해줄뿐 아니라 영혼 속에 파고들어 현실 그 자체에서 얻어지는 인상을 마음속에 새겨준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나폴레옹 대관식>(1805-7년)에서는 이전의 차가운 색, 엄격한 역사화 구성에서 벗어남으로써, 낭만주의 양식을 암시해주고 있다. 한편 그의 제자 앵그르(Jean-Auguste Dominique Ingres, 1780-1867)는 <루이 베르탱>(1832년)과 같은 작품에서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에서와 같은 엄격한 리얼리즘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의 유채화는 강조와 비례와의 미묘한 변화에 의해서 엄중한 개성의 힘을 모델에 부여, 내면적 깊이와 외면적인 정확성의 통일을 이루고 있다. 그의 후계자들이 외관의 정확성에만 몰두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는 심리적 측면을 놓치지 않았음이 주목된다. 그밖에 이탈리아에 있어서는 로마의 Vincenzo Camuccini의 <시저의 살인>과 <버지니아의 죽음> 등이 유명하며 밀라노의 Andre Appiani는 초상화가로 유명하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고전주의 양식은 18세기 중후반 유럽 등지에서 순수하고 단순한 형태로 발전, 1)19세기 아카데미즘 예술의 기본 원리로서 오래 이어졌으나 그 영감(inspiration)을 상실, 기계적인 모방과 무의미한 복제로 나가면서 먼 고대나 이국에 대한 뜨거운 동경과 관능적인 경향으로 기울어짐에 따라 2)낭만주의 예술의 선구자로서의 구실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앞서 라트르보나 다비드의 예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는 명확하게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연속선상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건축에 있어 미국의 경우 1922년 완성된 링컨 기념관에서 보듯이 독립전쟁 이후 신고전주의 양식이 명맥을 이어오고 있었으며, 러시아에서는 1930년대에 슈코와 겔프라이히의 <레닌도서관>, 랭그만(Langman)의 <국무회의를 위한 건물>, 슈세프(Schusev)의 <모스크바 호텔>, 알비얀(Albyan)의 <붉은 군대 극장> 등 많은 건물들이 신고전주의적인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특히 이탈리아나 독일에서는 각각 파시즘과 나치즘이라는 정치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신고전주의 양식은 '위엄'을 표현하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변모되어갔다. 뭇솔리니는 '고대 로마의 위대함을 상실케 하는 평범한 건축에서 탈피하고 고대 로마의 모든 위대한 건축물들의 보존에 힘을 기울여야 하는 동시에 20세기의 기념비적인 로마를 창출해야한다'고 역설하면서, <로마 만국박람회>와 같은 대규모의 신고전적 기념물을 건설하였다. 한편 독일에서는 그로피우스(Gropius)와 미스(Mies), 바우하우스(Bauhaus) 등으로 대표되는 국제주의양식이 개발되고 있었으나 히틀러의 건축 취향은 나폴레옹과 같은 신고전주의적인 것과 토속적인 것이었다. 독일의 신고전주의적 건물로서, 트루스트가 설계한 뮌헨의 <독일미술관>은 쉰켈의 <알테스 뮤지엄>에서 사용한 양식에서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밖에 스피어의 <독일수상관저>(베를린), <런던주재 독일대사관>등을 들 수 있다.
 회화에 있어 신고전주의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특히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지에서 성행하였으나 독일에서는 실제 작품보다는 이론적인 면에서 더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스웨덴의 경우 다비드 신고전주의회화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러시아에 있어서는 -특히 '러시아 미술아카데미'(Russian Academy of Fine Arts)의 설립 이후- 프랑스 이탈리아의 신고전주의가 러시아의 초상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인 화가로 Alexander Ivanov, Karl Briullov 등을 들 수 있다. 미국의 신고전주의는 역사화에서 특히 두드러지며, 유럽의 신고전주의는 라틴 아메리카에까지 퍼져 멕시코의 Rafael Ximeno y Planes, 아르헤티나의 P. Pueyrredon등이 있었다. 또한 신고전주의 미술은 19세기 중반 '라파엘로 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로 이어진다.
 한편 신고전주의회화 내부에 잠재되어 있던 낭만주의적인 요소는 이미 인습화·형식화로 기울던 신고전주의 회화에 반발하면서 화려한 세계와 환상의 세계, 동적인 세계를 표현하고자 하였다. 회화에 있어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경향은 거의 동시에 일어나고 있었는데, 예를 들면 다비드와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고야 (Francisco Goya, 1746-1828)는 <거인>(1820년경)에서와 같이 환상적인 주제를 채택, 화려한 색채를 거부하지 않고 작품을 제작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에 와서 더욱 신비주의적으로 흘러 <太古>(1794년)와 같은 환상적인 작품을 남겼다. 터너 역시 <폭풍 속의 증기선>(1842년)처럼 빛으로 가득차고 눈부신 아름다움을 지닌 세계를 그렸다.
 고대의 유물과 예술품들을 소개하는 학자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카일루스의 『고대 이집트, 에트루리아, 그리스, 로마, 갈리아 지방의 유적 목록집』이나 피라네시의 『로마의 위대성』『로마의 유적』등은 그 중 대표적인 것들이다.
 이 운동의 미학적 근거를 이룬 사람은 독일의 예술사학자 빈켈만이며, 대표적 예술가로는 화가 멩스를 들 수 있다. 그는 이 운동의 본부격이라고 할만한 로마에서 자신의 스튜디오를 만들어 이 새로운 이념을 전파하는 국제적인 사교장으로 사용하였다. 멩스는 자신의 명성은 라파엘로, 코렛지오, 티티안등 대가들의 수법을 사용하고 조용한 단순성과 고귀한 위풍이 적절히 표현된 고대의 모범들의 제 요소에 기초해 이른바 그랜드 매너를 추구한 덕분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실제 조각에서는 멩스 자신의 작품「파르나수스」라든지 그의 절친한 친구들 - 가뱅 해밀튼, 요셉-마리 비엥등 - 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무미건조하고 인공적인 양식이 등장했다. 이러한 작품들은 빈켈만의 사상과 이론에 영향을 받은바가 컸다.
 멩스와 마찬가지로 빈켈만도 현대 예술은 모름지기 고대의 조각이 이상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바와 자연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고대 예술에서 발견되는 도덕적 품성, 즉 명성을 구하는 모든 예술가들에게 기본적으로 필요한 도덕적 품성을 특히 강조했다.
 프랑스에서 신고전주의 운동은 로코코양식의 번잡스러움에 대한 일종의 반발, 루이 14세 시기의 그랜드 매너에 대한 향수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났다. 사회의 제반 혁명적 변화나 시민사회의 삶 속에 고대 로마적 덕성들을 세워보고자 하는 욕구등이 이 운동과 관련되어 있다. 대표적인 화가로는 자크 루이 다비드가 있으며 그의 작품 「호라티의 맹세」 「레카미에부인의초상」 등은 신고전주의 정신을 잘 나타내고 있다.
 신고전주의는 건축에서도 충분히 발현되었는데 영국의 아담 형제, 독일의 랑한스, 프랑스의 장-프랑스와 샬그랭, 알렉산드르 테오도르 브로냐르, 클로드 니콜라스 르두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조각가로는 이탈리아의 카노바와 토발트센등이 활발하게 활동했다.
 신고전주의 운동은 미국으로도 전해져 조각가 히램 파워스, 호레이쇼 그리너프, 화가 존 반델린등이 등장했다. 신고전주의는 고대의 모범들을 신중하고도 의식적으로 모방한다는 점에서 그전에 간헐적으로 일어났던 고전 부흥 운동과는 사뭇 달랐다.
 근대사회의 출현과 더불어 시작된 신고전주의 미술은 이와같이 그 발생에 있어 당시의 역사적·사상적·학문적 배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으며 유럽 전역에 걸쳐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 19세기 이후 미술 전개에 또 하나의 배경을 이루게 된 것이다.

앵그르 ( 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 1780.8.29~1867.1.14 )
 프랑스의 화가. 몽토방 출생. 19세기 프랑스의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16세 때 파리로 나와 당시 화단의 중진으로 명성을 떨치던 J.L.다비드에게 사사하였다. 1801년 《아가멤논의 사절들》로 로마대상을 받고 1806~24년에는 이탈리아에 체류하면서 고전회화와 르네상스의 거장 라파엘로의 화풍을 연구하였다. 로마 체재 중의 대표작으로는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목욕하는 여자》 《유피테르와 테티스》 《라파엘과 포르나리나》 등을 꼽을 수 있다. 한편, 초상화가로서도 천재적인 소묘력과 고전풍의 세련미를 발휘, 많은 작품을 남겼으나, 본국인 프랑스에서는 그리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1824년 파리로 돌아와 살롱에 출품한 《루이 13세의 성모에의 서약》으로 이름을 떨치면서부터는, 들라크루아가 이끄는 신흥낭만주의운동에 대항하는 고전파의 중심적 존재가 되었다. 1834년 로마에 있는 프랑스 아카데미의 관장으로 다시 이탈리아에 갔다가, 1841년 파리로 돌아왔다. 이 무렵의 대표작으로는 《나폴레옹 1세 예찬》 《잔다르크》 《샘》 《터키 목욕탕》 《박사들과 함께 있는 예수》 등을 비롯하여 《앵그르 부인》 등 많은 초상화가 있다. 그의 작품은 초상화·역사화, 특히 그리스조각을 연상케 하는 우아한 나체화에서 묘기를 발휘하였으며, 현재 루브르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오달리스크》 《샘》 《발팽송의 욕녀》 《호메로스 예찬》 《리비에르부인상》 《베르탱씨의 초상》 《자화상》 등은 19세기 고전주의의 불멸의 명작으로 꼽히고 있다. 앵그르의 영향은 후대에까지 미쳐, 드가, 르누아르, 피카소 등도 한때 그의 감화를 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다비드 ( Jacques Louis David : 1748.8.30~1825.12.29 )
 프랑스의 화가. 파리 출생. 19세기 초 프랑스 화단에 군림하였던 고전주의 미술의 대표자이다. 1774년 당시의 화가 지망생들이 동경하던 로마상을 획득하고, 이듬해부터 1780년까지 로마에 머무르면서 고전미술을 연구하였다.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Oath of the Horatii》(1784)의 스타일은 그의 고전연구의 성과를 나타내는 명작으로, 당시 점차 높아지기 시작한 애국사상의 뛰어난 표현으로서 일약 유명해졌다. 프랑스 혁명 당시 자코뱅 당원으로서 혁신측에 가담하여,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하자 투옥되었다. 그렇지만 후에 나폴레옹에게 중용되어, 예술적·정치적으로 미술계 최대의 권력자가 되어 화단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앵그르, 그로, 제라르를 비롯하여 19세기 중엽에 활약한 고전파 화가들은 모두 그의 밑에서 나왔다. 역사적 주제를 그린 작품은, 18세기 로코코 미술의 우아·섬려한 것에 비해, 고대조각이 지니는 조화와 질서를 존중하고 장대한 구도 속에서 세련된 선에 의하여 고대조각 그대로와 같은 형태미를 만들어내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형식적으로는 잘 다듬어진 대구상화(大構想畵)이긴 하지만, 다소 생동감이 결핍되어 있다. 이와는 달리 초상화에서는 고전적인 형식미 속에서 사실적인 묘사력을 충분히 살려 참신한 느낌이 약동하고 있다. 나폴레옹 실각 후 추방되어 1816년 브뤼셀로 망명하였고,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였다. 그 밖에도 《마라의 죽음》(1793) 《사비니의 여인들》(1799) 《나폴레옹의 대관》 《레카미에부인의초상》 등의 대표작이 있다. 또 《라부아지에 부처상(夫妻像)》(1788)과 같은 초상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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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각요판 (Aquatint)

식각요판 (Aquatint)

고야 (Goya) (1799)

  이 기법은 광범위한 명암도와 색조를 제공한다. 이 기법에서는 열처리 되기 전의 판의 수지(Colophony)와 역청(Bitumen)을 이용한다. 수지와 역청은 산이 퍼져 금속을 부식시키는 과정을 통해, 마르면서 작은 구멍을 형성하는 특성이 있다. 이에 의해 낟알 모양의 결과물이 얻어지며, 그 색조는 산성 용액의 지속 정도에 따라 백색에서 흑색까지 다양하다. 화이트나 블랙으로 매겨지는 금속판의 여러가지들을 얻기위한 과정, 금속은 이것을 부분적 으로 보호하는 작은 투명 미립자를 형성하기 위한 열 작용하에서 결합된 가루수지에 의해 덮혀져서 어떤것은 규칙적으로, 어떤것은 좋게, 도돌도돌하게 되어있다. 판은 그 이후에 미립자 사이 사이가 급속 부식제에 부식된다. 강도의 진가는 산에 계속 가라 앉혔을 때와 미립자 크기에 달려있다. 따라서 미리 계획된 기간하에서 반복하면서 계속 일할수 있고 충분히 부식된 곳을 보호할 수 있다. 가루 아스파탕 또한 판을 그레인(도돌하게 만들기, 나뭇결로만들기)하는데 사용 한다. 판을 가열하지 않고 아쿠아틴트를 얻기 위해선 스프레이 페인트나 액체 아스파탕을 에어 브러쉬로 써서 사용해야한다. 명암을 기묘하게 바꾸기 위해 다양한 형판을 사용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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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티메팅 페이팅 ( Systimetic painting )

시스티메팅 페인팅 ( Systimetic painting )

앤디 하퍼

 하나의 비구상적인 형태를 반복해서 그리는 것으로, 화가가 화면 구성의 일관된 시스템을 표현하려는 회화. 미니멀아트의 일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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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인드 그라스 ( Stained Glass )

스테인드 그라스 ( Stained Glass )




 미술재료 가운데 하나인 '색유리'를 가르키는 말. 유리그림, 즉 유리화이라고도 지칭. 스테인드 글라스가 유리화라는 개념이 강한것은 색유리를 재료로 하여 창작한 예술품 가운데 유리화의 비중이 가장 크기 때문일 것이다.
 금속산화물을 녹여 붙이거나, 표면에 안료를 구워서 붙인 색판 유리조각을 접합시키는 방법으로 채색한 유리판. 착색에는 구리·철·망간과 같은 여러 가지 금속화합물이 이용되며, 세부적인 디자인은 갈색의 에나멜유약을 써서 표현한다. 색유리를 창이나 천장에 이용하기 시작한 것은 7세기경 중동지방에서 비롯되었으며, 이슬람건축에는 대리석판에 구멍을 뚫어서 유리 조각을 끼워, 채광과 장식을 겸하는 방식을 많이 이용하였다. 서구(西歐)에는 11세기에 이 기법이 전해졌으며, 12세기 이후의 교회당 건축에서 이 예술은 본격적으로 발달하였다. 특히 고딕건축은 그 구조상 거대한 창을 달 수 있으며, 창을 통해서 성당 안으로 들어오는 빛의 신비한 효과가 인식되어, 스테인드글라스는 교회당 건축에 불가결한 것으로 되어 큰 발전을 해 왔다.
 신의 속성으로서 위대함(Magnitudo), 영광스러움(Claritas),조화로움(Propotio)을 고딕시대의 3대 미적 관점이라고 한다면 이 시대 대표하는 성당 건축은 바로 신의 속성을 지상에 드러내 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건축물 안에 설치된 스테인드 글라스는 곧 빛으로 상징된 신의 영광스러움과 그 명료성을 시사한 것이다. 인간 내면의 세계를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요소를 빛이라 규정한 헤겔의 말처럼 빛은 신적인 것의 물질화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시각체험을 구성하는 3가지 조형요소를 빛, 색채, 형태라고 할 때 특히 회화에서의 빛은 색채와 결합하여 형태의 변화와 깊이를 좌우한다. 그러나 다른 장르와는 달리 스테인드 글라스는 자연광의 무한한 변화가 투명한 색유리를 통하여 나타나는 것으로서 빛이 색채 속에 구현되어 불가사의한 변화와 신비를 창출해내게 된다.
 중세 그리스도교의 무명장인으로부터 시작하여 13세기 고딕시대에 절정을 이루고 6백년의 휴지기간 후 19세기 아르누보(Art Nouveau)작가들에 의해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했으며 20세기 전후 독일을 중심으로 하여 새로운 의미에서 본격적인 발전을 이룬다.
 20세기의 스테인드 글라스는 교회건축이라는 한정된 범위를 넘어 현대미술과 현대건축, 현대의 다양한 기법과 소재의 테크놀러지가 접목하여 조형예술 전반에 걸쳐 이용되기에 이르렀으며 그 어느 시대보다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룩하였다.
 프랑스의 샤르트르대성당, 르망대성당, 영국의 요크 및 캔터베리 같은 여러 성당의 것은 12∼13세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유명하다. 현존하는 것으로는 독일의 아우크스부르크성당에 있는 예언자 다니엘상을 나타낸 스테인드글라스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1065년 또는 12세기 전반이라고도 함). 일반적으로 초기의 것은 유리의 질이 고르지 못하여 착색에 얼룩이 지고, 섬세한 표현이 잘 안되었으나, 광선의 투과·굴절에 미묘한 변화가 있어서 오히려 매력을 더하고 있다. 14세기 이후 유리의 제작기술이 향상되어 세부적인 표현이 잘 되게 되었으나, 이는 오히려 표현이 그림과 같이 되어 초기의 유리가 나타내는 독특한 미가 없어졌다. 19세기 후반 W.모리스, V.존스 등의 예술운동을 계기로 해서 중세기의 스테인드글라스의 미가 재인식되고, 다시 20세기에 들어와서는 F.레제, 마티스, H.루오 등이 현대건축에 스테인드글라스를 활용하게 되었다.

*어원
 영어의 stained라는 어휘는 원래 '끈적끈적한 핏자국이 있는'이라는 의미였으나, 후에 '더럽히다, 착색하다, 채색하다, 달구어 녹여 붙이다'라는 어의로 발전했다. 따라서 stained glass란 '유리에 그림을 그려서 녹여 붙인 것'이라는 의미이다. 한편 독어의 Glasmalerei는 '유리'의 뜻을 지닌 glass와 '그림'의 뜻을 지닌 malerei의 합성어이며, 불어의 Vitrail은 '판유리'를 뜻하는 Vitre와 '납틀'을 의미하는 aile의 합성어이다. 스테인드 글라스란 어원분석을 통하여 볼 때 '여러가지의 금속 산화물질에 의하여 착색된 투명, 또는 반투명의 유리단편을 봉합체 납틀이나 동테이프로 결합하여 만들어낸 장식과 그림의 표현'이라고 정의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그리스도 교회 공간과 함께 하는 미적표현 방법으로 고유명사화 되었다.

*성분
 스테인드글라스의 색유리는 투과된 빛에 의해 보이는 단순한 색유리로 생각되지만, 하나의 색유리는 규석분, 장석, 석회석, 아비산, 안티몬, 산화크롬, 산화니켈, 형석 등 11~12가지 낱낱의 금속산화물질의 혼합체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와 같이 색유리는 화학합성 물질이며 이것은 1450~1500'c로 가열하여, 유리질속에 색채가 흡수된 색유리이기 때문에 퇴색되거나 변색되는 일이 거의 없다. 따라서 그 유리의 생명은 거의 영구적이어서 중세시대의 화려하고 신비스러운 색채가 오늘날까지도 경이롭게 빛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스테인드 글라스의 색채는 어둠과 밝음의 공간에 빛의 시간적 변화,즉 빛의 강약, 빛의 좌우.전후.상하 방향에 따라 신비한 변화를 보여주며, 동시에 색유리의 면적과 두께에 따라 투영되는 빛이 각양각색을 이루어 가볍고 밝은 빛에서부터 무겁고 심오한 빛에 이르기까지 일대 색채의 교향악이 연출된다.

*제작 기법
 금속산화물이 포함된 색유리를 조각조각 붙이기 위하여 가장 많이 사용하는 전통적인 납틀(Leaded glass) 기법은 규모가 넓은 공간에 이용되는 대표적인 방법이다.
동(銅) 테이프(Copper foiled glass) 기법은 실내장식이나 공예품 등과 인공 조명을 함께 이용할 수 있는 기법이다.
 평판 유리(Faceted glass)나 유리 벽돌 기법은 현대 건축의 재질적 변화에 따라 발전한 방법이다. 유리벽돌 기법은 보석 같은 25mm 두께의 유리를 콘크리트에 파묻혀 있게 하는 방법인데 이 재료는 납틀을 붙인 유리보다 더 단단하므로 현대적인 건축 구조에 어울리는 벽을 만드는 데 사용한다.
 이것은 납틀 대신에 사용하는 폴리에스털 수지나 합성수지인 에폭시 수지, 시멘트 등으로 접합하여 만들거나 조각과 설치물, 건축 디자인 등에 응용하거나 입체화 또는 벽체화할 수 있다. 최근에는 합성수지나 에폭시수지에 안료를 혼합한 뒤 비닐 병이나 튜브에 넣어 일반 투명 유리 위에 짜서 경화시켜 스테인드 그라스를 흉내낸 방법도 등장했다. 이것은 서로 다른 팽창률이나 수지 자체의 약한 내광성으로 인하여 수개월 이내에 깨어지거나 유리 면에서 분리될 수도 있으므로 영구적인 건물에 제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한편 그라스 페인팅은 유리에 직접 그림을 그리거나 모자이크 방법의 납틀 기법에서 표현할 수 없는 미세한 표현에 응용하기도 하며 유리의 투명성을 조절하거나 빛을 차단하는 효과를 내기도 한다.
 그라스 페인팅에 사용되는 안료나 미디엄은 특별한 재료를 이용해야 한다. 여기에는 열경화성 아크릴수지계 미디엄으로 만든 물감을 사용하는 것이 좋고 내광성이 우수한 안료를 선별해서 사용하면 금상첨화이다.
스테인드 그라스는 사진과 같이 색상이나 무늬가 다양하게 제조된다. 투명 색유리가 있는가 하면 반투명 또는 불투명한 색유리도 있다. 빛의 투과에 의한 최상의 굴절 효과를 표현하기 위해서 굴절각이나 투과력 등에 대한 세심한 분석이 필요하다. 따라서 제작자는 스테인드 그라스의 주제나 표현 기법이 결정되면 다음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 좋다.
1. 건물 내부의 창문의 위치에 따른 빛의 양과 떨어지는 방향을 분석한다. 자연 채광은 시간에 따라 밝기나 방향이 다르므로 최적의 시간대를 결정하여 그에 상응하는 효과를 내도록 하고 방위 따른 채광 효과도 계획한다.
2. 어두울수록 색유리의 광채가 빛나므로 실내 밝기 조절과 야간 조명에 의한 색 채 효과를 예상한다. 스테인드 그라스는 실내에서 감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야간에는 실내의 인공 조명에 의한 외부 감상에 대한 배려도 잊지 말아야 한다.
3. 빛이 색유리를 투과해서 일어나는 굴절 효과가 다양하므로 색유리의 특성을 파 악하고 그에 따라 색유리와 같은 재료나 제작 용구를 준비한다.
4. 폭우나 자연 재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한 다. 조각난 색유리의 틈새로 빗물이 누수 되면 겨울철 결빙으로 인한 팽창으로 접 합 부위가 파손되거나 색유리 자체가 깨 어질 수 있으므로 방수와 방음에 대한 계획도 뒤따라야한다.

채색 유리 모자이크
 유리 모자이크는 유리면에 내광성이나 내구성이 강한 물감으로 채색을 한 후 조각조각 붙여서 만든다. 비교적 재료 구입이 용이하고 제작방법이 손쉬워 공동으로 제작하면 그 진가가 발휘된다.
1. 재료와 용구
1) 깨진 유리 조각이나 유리판(투명 유리나 반투명 유리, 요철이 있는 유리 등)
2) 유리 칼
3) 채색 물감과 용구
4) 접착제(초산비닐 수지 와 아크릴 미디엄)
5) 분말 석고
6) 채색 유리를 담을 상 자

2. 제작 과정
1. 벽면이나 견고한 패널을 준비하고 바탕 처리를 한다. 수성 페인트로 도색된 시멘트 벽면은 거친 사포나 그라인드로 겉 재질을 벗겨 내는 것이 좋다.
2. 밑그림을 간결하게 그린다. 조각난 면을 붙이므로 밑그림이 단순한 것이 좋으며 장차 붙이게 될 색상과 면적을 계산해 둔다.
3. 채색 유리를 만든다. 유리판에 묻은 물질을 깨끗하게 닦아낸 후 습기를 제거하고 채색하게 될 페인트를 준 비한다. 원화에 의한 색보다 10% 정도 큰 유리 면적에 붓으로 채색한 후 건조시킨다.
4. 유리칼로 필요한 크기만큼 자른다. 유리 칼은 유리면 위에 경쾌하게 그어서 흰 선 자국을 남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다. 자른 채색 유리는 색상별로 상자에 담아 둔다.
5. 초산비닐수지 70%에 아크릴 폴리머 에 멀션 30%를 혼합한 접착제를 만든다. 초산비닐 수지만을 사용하여 붙이면 연성이 부족하여 수년 후 깨어지거나 이탈 현상이 생겨날 우려가 있음에 유의한다.
6. 물감으로 채색된 면에 접착제를 바르고 압착하여 붙인다. 조각난 유리를 벽면에 압착할 때는 접착제가 약간 밀려나올 정도의 두께로 바르는 것이 좋다. 밀려나온 접착제가 유리 두께보다 높을 경우에는 닦아 낸다.
7. 틈새를 메운 후 굳히면 석고의 흰색 선이 강하게 나타날 수 있는데 물감으로 채색하여 색을 바꾸어 준다. 틈을 메우는 재료는 5항의 접착제에 3-4배 정도의 물을 희석하여 접착액을 만든 후 분말 석고 60%∼70%에 접착액 30%∼40%를 혼합하고 물로 농도를 조절하여 사용한다.
8. 왁스로 닦아 내면서 완성한다. 왁스는 틈새의 기공을 막는 방수 기능과 유리면의 이물질을 제거하여 선명함을 더하게 된다.

*고딕시대의 스테인드글라스 기법의 발전
 크고 많은 창을 처리하기 위하여 당시의 성직자나 예술가들은 스테인드글라스 창과 같은 아름답고 화려하며 신비한 회화적 공간을 마련함으로써 건축의 미적효과를 증대시켰다. 고딕 시대에는 양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괄목할 만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13세기에 발생한 그라자이유(grisaille)창은 화려한 색채보다도 빛과 디자인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이는것으로서 14세기에는 세련도를 더하여 프랑스에서 크게 성행하였다. 또한 14세기초 프랑스에서 기술 상 진보라 할 수 있는 은착색법(silver stained method) 이 창안되었는데, 이는 평판유리에 옅은 황색으로부터 점차 짙은 색에 이르는 여러 가지 황색계의 음영을 표현하는 것이다. 또한 색채의 범위를 보다 폭넓게 하고 보다 빛나게 하기 위하여 이중으로 색유리를 덮은 베르 두블레(verre doubl e) 혹은 플래쉬드 글라스(flashed glass) 기법이 14세기에 발명되었다. 이와 같이 고딕시대에는 스테인드글라스의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당시의 뛰어난 감각을 지닌 예술가들에 의하여 유리의 다양한 색소 발견과 기술적 발명이 이루어져 오늘날까지 전래되고 있다.

*장미 창 1260년경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원형의 장미 또는 바퀴의 창은 인간의 가장 신성한 상징 중의 하나로 나타난다. 선사시대 초기부터, 다양한 형태에서 원은 의식에 사용되왔다. 신석기시대 회화에는 태양이 있었고, 태양의 원은 많은 제사에 의해 숭배되었다. 영원의 상징으로 원은 기독교에서 지속되었고, 원 또는 만돌라는 아시아의 신비주의에서 중요한 것이었다. 융(Jung)은 "인간과 상징"이란 그의 책에서, 만돌라의 가장 화려한 예의 일부로서 장미창을 묘사했고, 유럽.기독교 전통에서 우주와 그 자신에서 영원한 것에 대한 인간의 지각을 표현한 것이라 하였다. 또한 원은 기하학의 기본이고, 모든 호와 구획을 포함하는 것으로부터의 출발점이라고 했다.
 로마네스크 시기의 공통된 바퀴모양 창은 가장 초기의 장미창이다. 그들은 작고, 둥근 창이고, 바퀴와 같은 효과를 주면서, 박공이 건축에서 석공과 가장 큰 평면에 유리직공을 주기 때문에 서쪽문에 위치했고, 차바퀴의 살과 같이 중심으로 뻗어 나온 것은 석재 트레이서리로 되어있다. 초기 예중 하나는 12세기 바빌라의 산 베드로(San Pedro)성당 서쪽 파사드에서이다. 고딕 트레이서리에 발전에 따라, 석재의 패턴이 원형창에 줄무늬를 짓는 것이 더욱 정교해져서, 많은 꽃잎을 단 불꽃모양으로 꽃의 이미지 형태로 전개해갔다.
 샤르트르의 장미창은 13세기 초기의 것으로서 원들로 배열된 플래이트 트레이서리로 되어 있다. 이 트레이서리는 13세기 중반에 랭스 성당에서 바 트레이서리로 바뀌게 된다. 노트르담의 장미창은 샤르트르와 랭스 성당의 중간시기에 위치하여, 플레이트 트레이서리임에도 불구하고, 섬세하고 복잡한 배열을 보여준다. 이 장미창은 그 형태가 원형으로 중심에서 사방으로 그 빛이 퍼져나가는 태양을 닮아, 빛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에 비유되고 있다. 저녁나절 해질녁에 서쪽의 거대한 장미창을 통해 비쳐들어오는 빛은 오색영롱한 색채의 향연을 연출하여 성당 내부를 신비의 빛으로 가득 찬 기적의 공간으로 바꾸어 놓는다. 크기와 색채 의 배합에 있어 차이는 있으나 이와 같은 장미창은 모든 고딕 양식 교회들의 중요한 장식적 요소가 된다.
 랭스 장미창의 바 트레이서리는 고딕 건축에 창문내기에 마지막 해결책이 었다. 이것은 아미엥과 후기 고딕성당에서 이용한 시스템이 되었고 또한 이 장미창은 자주색, 노란색의 많은 사용으로 더욱 화려해지게 되었다. 대부분 장미와 바퀴모양창에 형상은 연결 트레이서리의 방사되는 선에 의해 종속된다. 그러나 14세기에 이탈리안 눈창 은 석재 트레이서리가 없는 창의 유리 패널 중앙점으로부터 방사되어 나오는 철구조에 의해 지탱되거나, 수직 또는 수평의 막대기에 의해 배열된다. 창들의 원형은 추상적인 경계에 의해 강조되지만, 중심구성은 원형에 적용되지 않고, 사각형 창문에도 똑같이 알맞게 적용될 수 있다.
 모든 장미창에 묘사된 가장인기있는 주제 중 두가지는 그리스도와 마리아의 영광과 최후의 심판을 하는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세속의 주제 역시 쓰였는데, 독일 유리직공은 장식적인 잎무늬 패턴을 선호하여 형상적인 주제를 거부했다. 그리고 스페인의 발렌시아(Valencia) 와 팔마(Palma)성당의 특유의 장미창은 다비드의 별의 형상으로 배열된 트레이서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형상적인 세부보다 추상적으로 양식화된 유리로 가득차 있다.
 수레 바퀴 모티프의 논리는 그것내의 디자인에 순환(회전)을 포함한다. 그러기에 레옹(L on)성당에는 형상이 논리적으로 뒤짚어 질 때, 끝이 뾰족해진다. 형상적으로 단지 머리와 어깨는 거꾸로된다. 디자인의 회전은 아미엥 성당의 서쪽 장미창에서처럼 도덕적 또는 상징적 목적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도 있다. 장미창의 상단 부분은 부유한 사람이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거지로서 내려오는 운명의 수레바퀴이다.
 장미창에서 리얼리즘 또는 그것의 결핍은 중요치않다; 모든 것은 정교한 꽃과 같은 이미지에 형태를 양분하는 살의 방사와 잎의 틈에 의해 결정된다. 장미의 추상적인 면이 충분히 평가받는다면, 거기엔 역시 중심에서 발까지 회전하는 형상에 대한 모순이 없을 것이다.
 중세의 유리직공은 석재작업에서 장미창에 유리를 적용하는 필요를 가치있게 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특히 석공술이 복잡해질 때, 그것들은 유리의 면을 할레이션(halation) 때문에 빛의 가장자리로 퍼져나가게 하여, 돌의 살을 더욱더 비현실적으로 만들게 한다. 그들은 창의 둥근 가장자리를 가져와서 원의 효과를 보강했고, 빛이 통과하게 되고, 석재작업의 주조를 무시하게 했다. 할레이션의 타입은 빛에 의해 석재작업을 모호하게 했고, 장미창의 바깥과 건물의 외부로부터 방사창의 폭을 연구할 수 있게 하였다. 그것은 빛이 창문을 어떻게 확장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고, 창의 거대한 확장은 최소의 석재 작업에 포함되어 나타나게 되었다.





구로구입시미술학원/광명시입시미술학원

스테이트 (State)

스테이트 (State)



  본 에디션에 들어가기 전단계로 찍어보는 판화. 'EE'로도 표기하는데 가필 수정되어 찍어지는 것으로서 렘브란트 판화에서 이런 것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위 작품은 렘브란트의 판화 중 스테이트가 많은 작품이다.


개봉동입시미술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