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고전주의 미술 ( Neoclassical Art :
新古典主義美術 )
신고전주의 대가 다비드의 작품‘마라의 죽음’(1793)
신고전주의 미술은 18세기 중반에서 19세기 전반 유럽세계를 풍미한 예술양식으로서, 매너리즘에 빠진 바로크·로코코의 인습에 반발하여 고대 그리스·로마 양식으로의 복귀경향을 보여준다. 신고전주의는 합리주의 미학을 바탕으로 고대 예술의 특징인 형태의 이성적인 단순화를 선호하였는데, 이러한 명징성과 질서·이성은 계몽의 시대인 당시의 문화양상과도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고대에 관한 관심은 이미 18세기 초부터 보이지만 특히 헤라크라네움과 폼페이의 발굴, 그리스 소아시아 조사 여행과 더불어 고대문명에 대한 흥미가 고취되었으며 이러한 고고학적 연구성과에 힘입어 대표적인 이론서들이 출간되기에 이르었다. 그 중 오늘날에도 신고전주의의 선언서로 인식되는 빙켈만의 "그리스 미술 모방론"은 고전주의 미술에 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 일으켜 이후 고전 고대 미술 작품에 대한 다각적 연구, 역사적·비평적 고찰이 활발하게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당시 유럽 사회에 이미 로코코의 전통과 낡아빠진 매너리즘에 대한 반작용으로 로마·에트루스칸·이집트·그리스의 영감(inspiration)으로의 회귀 경향이 널리 유포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피라네시는 1748년 이후 간행한 {로마경관도}에서 고대 유적에 근거한 로마의 베투라·이집트· 에트루스크의 고대 건축 도안들을 싣고 있으며, 이집트 미술의 경우 놀던, 포코코, 피라네시 등의 18세기 중반 저술을 통해 널리 알려지고 1748년에는 capitoline 박물관에 이집트관이 개관되기도 하였다. 또 후에 크게 유행하게된 그리스 미술에 대한 취향은 댈튼, 로이 스튜어트, 찬들러 등의 저술을 통해 고취되었다.
발생 초기부터 유럽 전역에 걸쳐 국제성을 획득한 신고전주의는 명료한 이론을 이루어냈는데, 대표적인 신고전주의 이론가로는 맹그스와 밀리지아, 앞서 언급한 빙켈만을 들 수 있다. 먼저 맹그스는 그의 {회화에 있어서의 美와 양식에 대한 고찰} (Gedanken uber die Schouheit und Geschmack in der Malerei, 1762년)에서 美를 관념의 완벽한 표현이며 그 관념은 思考에 의해 마음 속에 존재하는 표현이라고 하였다. 나아가 '회화실기수업' 강의에서 '진정한 예술'이 되기 위해 회화는 일정한 방법과 고정된 규칙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빙켈만에게서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나, 그는 미의 근본적인 원칙은 정확한 비례와 단순함 속에서 배려된 다양함을 동반한 '통일'과 '단순성'이라고 정의하였다. 또 작품은 개성이나 특정 상태의 심리를 드러내어서는 안되며 내부의 평온함이 구체적인 구성과 외부정신의 표현으로 반영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한편 밀리지아는 건축도시계획에 있어 선구자적인 생각을 해낸 인물로서, 단순한 그리스 모델의 '모방'이 아닌 '그리스인들의 자연관' 자체를 따를 것을 주장하였다. 그에게 있어 이상적인 미는 보다 철저한 연구와 상상력이 요구되는 선택적인 과정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었다. 특히 건축이 완벽함을 얻기 위해서는 첫째, 균형·조화·적합성 추구, 둘째, 안락함 추구, 세째, 견고함 추구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건축에 있어 자연스러운 단순함, 이성의 법칙을 요구하는 신고전양식은 건물의 '이성'을 추구, 방 배치에 있어서의 명확성·새로운 비율·형태의 간결성·부분의 조화·윤곽선과 표면의 매끈함 등을 특징으로 한다. 고대 그리스·로마 건축이 가장 집중적으로 연구되면서 도리아 이오니아 코린트식 기둥이 많이 사용되었으나 단, 합성된 것은 배제하였다. 로마의 파르테논 신전을 연상시케는 건물, 돔(dome)구조, 삼각 아치나 기념주, 정원 건축이 유행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 영국의 로버트 아담 윌리암 챔벌즈, 프랑스의 수플로, 독일의 쉰켈 등을 들 수 있다. 그 중 영국에서는 주로 그리스·로마양식의 두 경향이 공존하고 있었는데, 로버트 아담의 <호움하우스>(1772-1773년)의 객실은 로마의 치장벽토 장식을 채용함으로써 로코코 건축 내부의 섬세함을 간직하고 평활한 평면이나 대칭성·기하학적 정확성에 독특한 신고전주의적 주장을 보이고 있다. 이밖에 토마스 해밀턴의 <에딘버러 중학교>는 그리스 양식을 간직하고 있으며 윌리암 챔벌즈의 <서머셋하우스> 등이 유명하다.
프랑스의 경우 최초의 기념비적인 신고전주의양식의 건물로 수플로(Jaque Germain Soufflot, 1713-80)의 걸작 <팡테옹>(생 즈느비에브 성당, 1755-1792년)을 들 수 있는데, 차갑고도 명확한 외관을 가진 이 건물의 주랑현관은 고대 로마의 신전에서 따온 것이었다. 이에 비해 가브리엘의 <트리아뇽 성>은 그리스 건축에 비견될 수 있으며 빅터 루이의 극장은 19세기 극장의 모범이 되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도래한 제정시대의 건축-샤루글랭의 방돔(Vendome)궁전, 개선문 등-은 19세기초 프랑스의 '제정(Empire)양식'을 보여주는데, 이는 나폴레옹에 의해 이상으로 여겨진 고대 로마 건축의 재현을 기도한데서 생긴 양식이다.
불레(Etienne-louis Boullelee, 1728-99)와 그의 제자 르두(Claude Nicolas Ledoux)는 이 시대의 탁월한 건축가들로서, 환상적 건축(visionary architecture)의 전통을 창조하는데 이바지하였다. 블레의 이상은 '장엄한 고귀성'을 가진 건축, 거대하고 단순한 괴체를 결합함으로써 이룩하고자 한 효과에 있었다. 그러나 그의 설계의 대부분은 그 규모가 지나치게 큰 것이어서 오늘날에 있어서도 거의 건립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는 球體를 완벽한 형태라고 했다. 어떠한 원근법상의 트릭도 球體적 외모를 변형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우주를 반영하는 아이작 뉴우튼 기념관을 설계했다. 블레와 그 후계자들은 19세기에는 거의 잊혀져 있다가 20세기 초에 재인식되어 '생각해볼 수 없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되었다. 독일의 대표적 건축가인 쉰켈은 그리스 양식의 <베를린위병소>(Hauptwache), <베를린 왕립극장>(Schauspielhaus) 등을 설계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그리스 양식을 정확이 인식, 그 가치를 충분히 발휘하고 있다.
엄격하고 단순한 규칙들은 적용하는 이러한 건축개념은 점차 그 힘과 영향력이 전세계적으로 퍼지고 있던 '이성'의 옹호자들에게 강한 공감을 불러 일으키면서 미국의 건국 공로자의 하나인 제퍼슨같은 사람은 몬티첼로 있던 자신의 저택을 이러한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설계했고 각종 관공서가 있는 워싱턴 시가 '그리스 복고'양식으로 계획되었다. 그의 제자인 라트로브(Benjamin Latrobe, 1764-1820)의 <볼티모어 대성당>은 신고적주의 양식을 채택하되 고딕양식이 적극적으로 도입된 건물이다. 성당의 내부는 고대 로마의 돔(dome)과 궁륭이 덮인 공간(vaulted spaces)에서 따온 것이지만 외부는 고딕 바로크계의 종탑을 가지고 있다. 결국 이 건물은 신고전주의 양식의 자유롭고도 상상력이 풍부한 표현을 나타내주고 있는 것이다.
조각 역시 고대조각에 주어진 범례에 압도되고 있었으며 가장 성장한 분야는 초상이었다. 먼저 우동(Jean Antoine Houdon, 1741-1828)의 작품 <볼테르>(1808년)는 모델의 날카로운 기지와 통찰력 있는 지성, 위대한 정신의 깊은 동정심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으며, 고전적 의상도 어설픈데가 없다. 한편 이탈리아의 유명한 조각가 카노바(Antonio Canova, 1757-1822)는 神과도 같은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 나상으로 제작된 고대 지배자들의 초상을 본떠서 거대한 나폴레옹상을 제작했으며 극히 명백하게 이상화된 <비너스 모습의 파울리자 보르게제>(1808년)를 조각했다. 이 작품은 정면과 후면만을 고려해서 만든 일종의 '환조의 부조'이며 전체에 걸쳐 흐르는듯한 윤곽선의 우아함은 이 작품의 매력을 더해주고 있다.
회화에 있어 신고전주의 양식의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다비드(Jacque Louis David, 1748-1825)의 경우, 초기 작품에는 18세기 프랑스의 관능적인 로코코 취미가 잔존하고 있었으나 1775-1871년 로마유학 시기 이후 신고전주의화풍을 발전시켰다.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1785년), <소크라테스의 죽음>(1787년)은 푸생적인 요소-즉 구도는 화면과 평행해서 부조와같이 전개되며 인물은 彫像과도 같이 확고하고 부동의 느낌을 준다-뿐 아니라 예리하게 집중되어 정확한 음영을 이루는 채광법은 카라밧지오에게서 따온 것이다. 이 그림은 새로운 이상적 양식을 보여주는 동시에 삶의 생생한 모습을 담고 있다. 그는 프랑스 혁명 시기 그의 최고 걸작품인 <마라의 죽음>(1793년)을 그렸다. 프랑스혁명의 지도자중 하나였던 마라를 기념하기 위한 이 그림에는 헌신적인 심상과 역사적인 설명이 함께 녹아 있다.
다비드는 '미술이란 자연을 가장 아름답게, 완벽하게 모방하는 것이며 미술작품의 목적은 눈을 즐겁게 해줄뿐 아니라 영혼 속에 파고들어 현실 그 자체에서 얻어지는 인상을 마음속에 새겨준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나폴레옹 대관식>(1805-7년)에서는 이전의 차가운 색, 엄격한 역사화 구성에서 벗어남으로써, 낭만주의 양식을 암시해주고 있다. 한편 그의 제자 앵그르(Jean-Auguste Dominique Ingres, 1780-1867)는 <루이 베르탱>(1832년)과 같은 작품에서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에서와 같은 엄격한 리얼리즘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의 유채화는 강조와 비례와의 미묘한 변화에 의해서 엄중한 개성의 힘을 모델에 부여, 내면적 깊이와 외면적인 정확성의 통일을 이루고 있다. 그의 후계자들이 외관의 정확성에만 몰두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는 심리적 측면을 놓치지 않았음이 주목된다. 그밖에 이탈리아에 있어서는 로마의 Vincenzo Camuccini의 <시저의 살인>과 <버지니아의 죽음> 등이 유명하며 밀라노의 Andre Appiani는 초상화가로 유명하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고전주의 양식은 18세기 중후반 유럽 등지에서 순수하고 단순한 형태로 발전, 1)19세기 아카데미즘 예술의 기본 원리로서 오래 이어졌으나 그 영감(inspiration)을 상실, 기계적인 모방과 무의미한 복제로 나가면서 먼 고대나 이국에 대한 뜨거운 동경과 관능적인 경향으로 기울어짐에 따라 2)낭만주의 예술의 선구자로서의 구실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앞서 라트르보나 다비드의 예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는 명확하게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연속선상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건축에 있어 미국의 경우 1922년 완성된 링컨 기념관에서 보듯이 독립전쟁 이후 신고전주의 양식이 명맥을 이어오고 있었으며, 러시아에서는 1930년대에 슈코와 겔프라이히의 <레닌도서관>, 랭그만(Langman)의 <국무회의를 위한 건물>, 슈세프(Schusev)의 <모스크바 호텔>, 알비얀(Albyan)의 <붉은 군대 극장> 등 많은 건물들이 신고전주의적인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특히 이탈리아나 독일에서는 각각 파시즘과 나치즘이라는 정치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신고전주의 양식은 '위엄'을 표현하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변모되어갔다. 뭇솔리니는 '고대 로마의 위대함을 상실케 하는 평범한 건축에서 탈피하고 고대 로마의 모든 위대한 건축물들의 보존에 힘을 기울여야 하는 동시에 20세기의 기념비적인 로마를 창출해야한다'고 역설하면서, <로마 만국박람회>와 같은 대규모의 신고전적 기념물을 건설하였다. 한편 독일에서는 그로피우스(Gropius)와 미스(Mies), 바우하우스(Bauhaus) 등으로 대표되는 국제주의양식이 개발되고 있었으나 히틀러의 건축 취향은 나폴레옹과 같은 신고전주의적인 것과 토속적인 것이었다. 독일의 신고전주의적 건물로서, 트루스트가 설계한 뮌헨의 <독일미술관>은 쉰켈의 <알테스 뮤지엄>에서 사용한 양식에서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밖에 스피어의 <독일수상관저>(베를린), <런던주재 독일대사관>등을 들 수 있다.
회화에 있어 신고전주의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특히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지에서 성행하였으나 독일에서는 실제 작품보다는 이론적인 면에서 더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스웨덴의 경우 다비드 신고전주의회화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러시아에 있어서는 -특히 '러시아 미술아카데미'(Russian Academy of Fine Arts)의 설립 이후- 프랑스 이탈리아의 신고전주의가 러시아의 초상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인 화가로 Alexander Ivanov, Karl Briullov 등을 들 수 있다. 미국의 신고전주의는 역사화에서 특히 두드러지며, 유럽의 신고전주의는 라틴 아메리카에까지 퍼져 멕시코의 Rafael Ximeno y Planes, 아르헤티나의 P. Pueyrredon등이 있었다. 또한 신고전주의 미술은 19세기 중반 '라파엘로 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로 이어진다.
한편 신고전주의회화 내부에 잠재되어 있던 낭만주의적인 요소는 이미 인습화·형식화로 기울던 신고전주의 회화에 반발하면서 화려한 세계와 환상의 세계, 동적인 세계를 표현하고자 하였다. 회화에 있어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경향은 거의 동시에 일어나고 있었는데, 예를 들면 다비드와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고야 (Francisco Goya, 1746-1828)는 <거인>(1820년경)에서와 같이 환상적인 주제를 채택, 화려한 색채를 거부하지 않고 작품을 제작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에 와서 더욱 신비주의적으로 흘러 <太古>(1794년)와 같은 환상적인 작품을 남겼다. 터너 역시 <폭풍 속의 증기선>(1842년)처럼 빛으로 가득차고 눈부신 아름다움을 지닌 세계를 그렸다.
고대의 유물과 예술품들을 소개하는 학자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카일루스의 『고대 이집트, 에트루리아, 그리스, 로마, 갈리아 지방의 유적 목록집』이나 피라네시의 『로마의 위대성』『로마의 유적』등은 그 중 대표적인 것들이다.
이 운동의 미학적 근거를 이룬 사람은 독일의 예술사학자 빈켈만이며, 대표적 예술가로는 화가 멩스를 들 수 있다. 그는 이 운동의 본부격이라고 할만한 로마에서 자신의 스튜디오를 만들어 이 새로운 이념을 전파하는 국제적인 사교장으로 사용하였다. 멩스는 자신의 명성은 라파엘로, 코렛지오, 티티안등 대가들의 수법을 사용하고 조용한 단순성과 고귀한 위풍이 적절히 표현된 고대의 모범들의 제 요소에 기초해 이른바 그랜드 매너를 추구한 덕분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실제 조각에서는 멩스 자신의 작품「파르나수스」라든지 그의 절친한 친구들 - 가뱅 해밀튼, 요셉-마리 비엥등 - 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무미건조하고 인공적인 양식이 등장했다. 이러한 작품들은 빈켈만의 사상과 이론에 영향을 받은바가 컸다.
멩스와 마찬가지로 빈켈만도 현대 예술은 모름지기 고대의 조각이 이상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바와 자연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고대 예술에서 발견되는 도덕적 품성, 즉 명성을 구하는 모든 예술가들에게 기본적으로 필요한 도덕적 품성을 특히 강조했다.
프랑스에서 신고전주의 운동은 로코코양식의 번잡스러움에 대한 일종의 반발, 루이 14세 시기의 그랜드 매너에 대한 향수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났다. 사회의 제반 혁명적 변화나 시민사회의 삶 속에 고대 로마적 덕성들을 세워보고자 하는 욕구등이 이 운동과 관련되어 있다. 대표적인 화가로는 자크 루이 다비드가 있으며 그의 작품 「호라티의 맹세」 「레카미에부인의초상」 등은 신고전주의 정신을 잘 나타내고 있다.
신고전주의는 건축에서도 충분히 발현되었는데 영국의 아담 형제, 독일의 랑한스, 프랑스의 장-프랑스와 샬그랭, 알렉산드르 테오도르 브로냐르, 클로드 니콜라스 르두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조각가로는 이탈리아의 카노바와 토발트센등이 활발하게 활동했다.
신고전주의 운동은 미국으로도 전해져 조각가 히램 파워스, 호레이쇼 그리너프, 화가 존 반델린등이 등장했다. 신고전주의는 고대의 모범들을 신중하고도 의식적으로 모방한다는 점에서 그전에 간헐적으로 일어났던 고전 부흥 운동과는 사뭇 달랐다.
근대사회의 출현과 더불어 시작된 신고전주의 미술은 이와같이 그 발생에 있어 당시의 역사적·사상적·학문적 배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으며 유럽 전역에 걸쳐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 19세기 이후 미술 전개에 또 하나의 배경을 이루게 된 것이다.
앵그르 ( 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 1780.8.29~1867.1.14 )
프랑스의 화가. 몽토방 출생. 19세기 프랑스의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16세 때 파리로 나와 당시 화단의 중진으로 명성을 떨치던 J.L.다비드에게 사사하였다. 1801년 《아가멤논의 사절들》로 로마대상을 받고 1806~24년에는 이탈리아에 체류하면서 고전회화와 르네상스의 거장 라파엘로의 화풍을 연구하였다. 로마 체재 중의 대표작으로는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목욕하는 여자》 《유피테르와 테티스》 《라파엘과 포르나리나》 등을 꼽을 수 있다. 한편, 초상화가로서도 천재적인 소묘력과 고전풍의 세련미를 발휘, 많은 작품을 남겼으나, 본국인 프랑스에서는 그리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1824년 파리로 돌아와 살롱에 출품한 《루이 13세의 성모에의 서약》으로 이름을 떨치면서부터는, 들라크루아가 이끄는 신흥낭만주의운동에 대항하는 고전파의 중심적 존재가 되었다. 1834년 로마에 있는 프랑스 아카데미의 관장으로 다시 이탈리아에 갔다가, 1841년 파리로 돌아왔다. 이 무렵의 대표작으로는 《나폴레옹 1세 예찬》 《잔다르크》 《샘》 《터키 목욕탕》 《박사들과 함께 있는 예수》 등을 비롯하여 《앵그르 부인》 등 많은 초상화가 있다. 그의 작품은 초상화·역사화, 특히 그리스조각을 연상케 하는 우아한 나체화에서 묘기를 발휘하였으며, 현재 루브르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오달리스크》 《샘》 《발팽송의 욕녀》 《호메로스 예찬》 《리비에르부인상》 《베르탱씨의 초상》 《자화상》 등은 19세기 고전주의의 불멸의 명작으로 꼽히고 있다. 앵그르의 영향은 후대에까지 미쳐, 드가, 르누아르, 피카소 등도 한때 그의 감화를 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다비드 ( Jacques Louis David : 1748.8.30~1825.12.29 )
프랑스의 화가. 파리 출생. 19세기 초 프랑스 화단에 군림하였던 고전주의 미술의 대표자이다. 1774년 당시의 화가 지망생들이 동경하던 로마상을 획득하고, 이듬해부터 1780년까지 로마에 머무르면서 고전미술을 연구하였다.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Oath of the Horatii》(1784)의 스타일은 그의 고전연구의 성과를 나타내는 명작으로, 당시 점차 높아지기 시작한 애국사상의 뛰어난 표현으로서 일약 유명해졌다. 프랑스 혁명 당시 자코뱅 당원으로서 혁신측에 가담하여,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하자 투옥되었다. 그렇지만 후에 나폴레옹에게 중용되어, 예술적·정치적으로 미술계 최대의 권력자가 되어 화단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앵그르, 그로, 제라르를 비롯하여 19세기 중엽에 활약한 고전파 화가들은 모두 그의 밑에서 나왔다. 역사적 주제를 그린 작품은, 18세기 로코코 미술의 우아·섬려한 것에 비해, 고대조각이 지니는 조화와 질서를 존중하고 장대한 구도 속에서 세련된 선에 의하여 고대조각 그대로와 같은 형태미를 만들어내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형식적으로는 잘 다듬어진 대구상화(大構想畵)이긴 하지만, 다소 생동감이 결핍되어 있다. 이와는 달리 초상화에서는 고전적인 형식미 속에서 사실적인 묘사력을 충분히 살려 참신한 느낌이 약동하고 있다. 나폴레옹 실각 후 추방되어 1816년 브뤼셀로 망명하였고,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였다. 그 밖에도 《마라의 죽음》(1793) 《사비니의 여인들》(1799) 《나폴레옹의 대관》 《레카미에부인의초상》 등의 대표작이 있다. 또 《라부아지에 부처상(夫妻像)》(1788)과 같은 초상화도 있다.
개봉동입시미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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