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조형주의 ( neo plasticisme ) / 데 슈틸 (De
Stijl)
P.몬드리안을 중심으로 한 기하학적 추상주의의 일파 또는 그 운동. 신조형주의라고 번역한다. 1917년 반 도스부르흐, 반톤게르로 등과 잡지 《데 슈틸:De Stijl》을 발행하고 순수한 조형회화 운동을 추진하였다. 1920년에 발간된 몬드리안의 《새로운 조형:Le neo plasticisme》은 그 이론적 해명이다. 이 책은 25년 《바우하우스 총서》의 한 책으로 출판되었는데 이는 이 운동이 바우하우스에게 영향을 미쳤음을 말해주고 있다.
네오플라스티시즘은 1925년 이후 점차 분열하여 1932년에는 《데 슈틸》도 폐간되었지만, 그가 내건 합리주의 존중과 형식의 순수성에 대한 주장은 20세기의 반사실적(反寫實的)인 미술운동의 일환으로서 회화뿐만 아니라 건축·공예·상업미술 등에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고 새로운 조형이념의 창조·실현에 기여한 바가 컸다.
데슈틸 그룹의 중심적인 이념은 이른바 " 신조형주의" 이다. 이는 조형예술에 있어서, 그 구성요소를 가장 기본적으로 요소로 환원하여 이것의 구성만으로 화면을 구성할 것을 주장한다. 즉, 곡선이나 사선은 피하고 주로 수평-수직선의 짜맞춤으로 한정하고, 색채 역시 빨강, 파랑, 노랑의 삼원색과 흰색, 회색, 검은색에 한정하여 구성할 것을 주장했다.
수학자 쇤매커스의 신플라톤주의 철학(유출설,범신론적 세계관,신과의 합일) 그는 그의 저서 『세계의 새로운 이미지』(1915)에서 " 직각의 우주적인 탁월성" 을 논했다(" 지구공전의 힘의 수평선, 광선의 공간적 운동인 수직선" ). 또한 같은 책에서 적,청,홍의 삼원색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1914년 이후로 모든리안은 이러한 생각을 가진 쇤매커스와 거의 매일 접촉을 하고, 이 결과 순전히 잘려진 수평선과 수직선들로 이뤄진 몬드리안의 최초의 양식이 나타난다.
첫째시기는 초창기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신조형주의 이념이 그 모습을 찾아가는 형성기(1916~21년)이며, 두번째시기는 리씨츠키 등의 러시아 구성주의 미술과의 조우로 인해 국제적 운동으로 발전하는 성숙기 (1921~25년), 그리고 마지막 시기는 몬드리안과 반 되스부르크의 결별로 인한 분열과 쇠퇴의 시기(1925~31년)로 나눌 수 있다.
신비주의적 세계관에서 출발한 데 슈틸의 이념은 바로 수직-수평선의 힘들로 이루어진 보편적인 세계의 구성이었다. 수직과 수평의 기본적인 형태의 요소와 삼원색과 흑, 백색의 간결한 색은, 회화와 건축, 디자인에서 공통적으로 실현되었다. 그러나, 데 슈틸 운동의 핵심적인 두 축의 인물 중 한 인물인 반 되스부르크는, 후에 러시아의 구성주의 미술이념의 영향으로 다른 방향으로 접하게 된다.
반 되스부르크는 이를 통해 다이내믹한 구성과 열린 구조의 데 슈틸의 건축양식을 구체화시키기도 하지만, 구성주의 개념은 신비주의적 관점을 토대로 한 건축과 그 내부 설비, 가구등의 일관된 디자인 방식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를 통해 반 되스부르크는 결국 초기의 데 슈틸 이념과 거리를 두게 된다. (후에 반 되스부르크는 자신의 건축이념이기도 했던 16조항에 따르지 않는다.) 반면, 반 되스부르크와 결별한 몬드리안은 1931년이 지난 후로도 (미국으로 건어가서도) 그의 조형원리에 맞는 그림을 그려나간다.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 원리에 따른 회화는 입체주의를 통해서 순수한 추상미술로 접어드는 한 예를 보여주고 있으며 (신지학의 영향과 입체파의 영향을 통한 초기 추상미술로의 진입은 말레비치의 경우에서도 엿볼 수 있다), 반 되스부르크와 리씨츠키의 만남은 데 슈틸과 러시아 구성주의 미술을 통한 국제적인 추상미술운동의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리고, 반 되스부르크나 리트펠트의 등의 디자인은 바우하우스를 통해서도 기능주의 디자인과 건축의 영향을 주었다.
몬드리안은 초기에 자연주의적,표현주의적 작품을 보이다가, 1912~13년경에는 입체주의적 경향의 작품을, 그리고 1913~14년에 이르러 단음적 직선과 타원 구도의 작품을 내놓는다.
1915~16년 경 몬드리안은 쇤매커스와 빈번한 조우를 갖는다. 몬드리안은 이 당시에 신지학에 관심이 있었다. 몬드리안은 그와의 만남을 통해, < 회화에 있어서의 신조형주의> 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발표하고 이 글은 그후 1917~18년에 걸쳐 < 데 슈틸> 을 통해 연재된다. (신조형주의한 말은 쇤매커스의 저서에서 최초로 쓰였다.) 1917년 이후로, 순수한 조형체계에 이르게 된다.
건축에서는 오우트와 얀 빌스등의 활동이 있었으나 신조형주의 이념과는 거리가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데 슈틸 건축은 1920년 경에 실험적인 실내장식을 디자인 했던 건축가 리트펠트로부터 비롯된다. 그는 반 되스부르크와 몬드리안으로부터 전체적인 데 슈틸의 건축미학을 발전시키게 된다.
데 슈틸 운동은 1925년경부터 분열이 일어났다. 반 되스부르크가 대각선을 도입하자, 몬드리안이 이에 반발, 결국 몬드리안이 데 슈틸 그룹에서 탈퇴하게 된다. 반 되스부르크의 경우, 구성주의 개념의 영향을 받아 신조형주의의 원리를 거부하였고, 건물과 그 건물 내의 가구 등을 신비주의적 이념에 의해서 일체적으로 디자인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 (데슈틸의) 그러한 공동 작품적 이상은 일상생활의 제품들로부터 동떨어진 자의적인 문화를 초래할 뿐이다" . 그는 건물과 가구, 설비 등의 분리를 주장했던 리씨츠키의 방법을 받아들였는데, 그러나 이는 데 슈틸 건축이념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리트펠트 역시 반 되스부르크와 직접적인 교류 없었으나 다른 방향으로 전개해 나갔다. 즉, 가구디자인에 곡면을 도입했다. 이는 기술적인 문제 때문인데, 둥근 표면이 본래적으로 강력한 구조적 힘을 갖고 있기때문이었다. 그의 건축 역시 25년 이후 변화했다.
반 되스부르크의 건축 역시 자신의 < 신조형주의 건축이념> 과 다른 건물들을 짓는다. 1928년에 완성된 < 까페 로베트> 와 1928~29년에 지은 자신의 집에 자신의 건축원칙16항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 결국, 1930년에 이르러 보편적 조화의 세계에 대한 신조형주의 이상은 허물어지게 된다. 1931년 반 되스부르크의 사망 후 이 운동의 활기찬 정신은 사라지고, 몬드리안만이 회화의 영역에서 자기의 세계를 전개해나간다.
몬드리안 ( Piet Mondrian : 1872.3.7~1944.2.1 )
네덜란드의 화가. 아머르즈포르트 출생. 칸딘스키와 더불어 추상화의 선구자로 1894년 암스테르담미술학교를 졸업했다. 자연주의 화풍에 철저하였으며 쓸쓸한 겨울풍경과 정물 등을 그렸는데, 뭉크의 영향을 받아 섬세하면서도 어딘지 병적이었다. 그 후 신비주의 화가 얀 투로프를 알게 되어, 《나무》의 연작(連作)을 권유받아 차차 추상으로 바뀌었다. 칸딘스키의 우발적인 비대상(非對象)의 추상과 비교하면, 그의 경우는 문자 그대로 나무면 나무, 모래언덕이면 모래언덕의 핵의 추상으로서 추상화가 탄생한다. 1910년 파리에서 포브의 감화를 받았으나, 17년 도스부르크 등과 ‘데 슈틸운동’을 일으켰으며, 끝내는 수평과 수직의 순수추상으로 향하였다. 이는 질서와 비율과 균형의 미이며, 자신도 고독과 청빈에 만족하며, 종교적인 엄격한 경지를 지녔다. 38년 런던을 거쳐, 40년 뉴욕으로 망명하였다. 주요작품에 《햇빛 속의 풍차:Windmill in Sunlight》 《빨간 나무:The Red Tree》가 있다.
구로구입시미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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