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02, 2013

아르누보 ( Art Nouveau )

아르누보 ( Art Nouveau )





 '신 미술' 이라는 뜻으로 1890년대에 자연주의적이고 유기적인 형체를 구사했던 장식미술. 회화만이 아니라 건축과 디자인도 포함된다. ‘아르누보’는 영국·미국에서의 호칭이고 독일에서는 ‘유겐트 양식(Jugendstil)’, 프랑스에서는 ‘기마르양식(Style Guimard)’, 이탈리아에서는 ‘리버티 양식(Stile Liberty:런던의 백화점 리버티의 이름에서 유래)’으로 불린다. 아르누보는 유럽의 전통적 예술에 반발하여 예술을 수립하려는 당시 미술계의 풍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특히 모리스의 미술공예운동, 클림트나 토로프, 블레이크 등의 회화의 영향도 빠뜨릴 수 없다.
 아르누보의 작가들은 대개 전통으로부터의 이탈, 새 양식의 창조를 지향하여 자연주의·자발성·단순 및 기술적 완전을 이상으로 했다. 종래의 건축·공예가 그 전형(典型)을 그리스, 로마 또는 고딕에서 구한 데 대해서, 이들은 모든 역사적인 양식을 부정하고 자연형태에서 모티프를 빌어 새로운 표현을 얻고자 했다. 특히, 덩굴풀이나 담쟁이 등 식물의 형태를 연상하게 하는 유연하고 유동적인 선과, 파상(波狀)·곡선·당초무늬[唐草文] 또는 화염(火焰)무늬 형태 등 특이한 장식성을 자랑했고, 유기적이고 움직임이 있는 모티프를 즐겨 좌우상칭(左右相稱)이나 직선적 구성을 고의로 피했다. 그리하여 디자인은 곡선·곡면의 집적(集積)에 의한 유동적인 미를 낳는 반면 견고한 구축성이라든가 기능에 기초를 둔 합리성이 소홀하여 기능을 무시한 형식주의적이고 탐미적(耽美的)인 장식으로 빠질 위험도 컸다. 아르누보가 비교적 단명(短命)했던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아르누보의 전성기는 1895년경부터 약 10년간이다. 그보다 이전인 1880년대에는 영국의 맥머드, 미국의 설리번, 에스파냐의 가우디 등이 그래픽디자인이나 건축에서의 곡선적인 형태를 다용(多用)한 작품을 발표하고 있는데, 특히 맥머드의 예(교회의 팸플릿 표지)는 분명 아르누보의 선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영국의 매킨토시, 벨기에의 반 디 벨데와 오르타, 프랑스의 기마르와 가이야르, 이탈리아의 다론코 등의 작가가 활발하게 작품을 발표하게 되면서 아르누보는 널리 그리고 급속도로 보급되었다. 특히, 1896년에는 독일의 미술품상인 빙그가 반 디 벨데에게 의뢰해서 내부장식을 한 파리의 상점은 ‘아르누보관(館)’으로 명명되어 독자적인 장식성으로 하여 대단한 인기를 얻고 유명해졌는데 이 신양식(아르누보)의 유행에 박차를 가하였다.
 18세기 산업혁명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하게 되었지만 생산물의 질적가치가 떨어지는가하면 아름답거나 유용성이 결여된물건이 자꾸생겨나면서 대량생산의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었다. 이런 현상이 중세의 수공예품에 대한 향수를 불러 일으켰고 산업기술의 발달로 예술가들이 고립되고 그로 인해 생겨난 사회와 예술의 격차를 줄이고자 아름다움과 유용성의 개념(아름다운 것은 아름답기 때문에유용한것이다)으로 미술공예운동이 일어났다.
 미술공예운동은 과거의 형태와 양식을 거의 그대로 빌어쓰는, 그야말로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중세시대 공예로의 복귀와 같은 것이었다. 역사주의로부터 탈피하고 자유롭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는 움직임에서 구조와 기능과 장식의 통일을 기본원리로 아르누보(신예술)가 생겨나게 되었다. 또한 일본의 개항으로 일본문화가 유럽에 유입되면서 일본미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전통을 과감히 개혁하고 건축, 가구, 제품, 패션, 그라픽등 인공적 생활환경의 전반에 관계했다는 점에서 현대디자인의 문을 열었다고 할수 있다.
 1897년 드레스덴의 박람회, 1902년 토리노박람회 등에서는 아르누보의 실내장식과 가구 등 공예품 전시회가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한편 독일·오스트리아에서는 1896년에 뮌헨에서 발간된 잡지 《유겐트(청년)》에 에크만 등 뛰어난 디자이너가 작품을 발표하면서 ‘유겐트 양식’이 태어났는데 이것은 아르누보와 거의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1910년경부터 건축·공예계에는 기능과 사회성을 보다 중요시하는 풍조가 강해지면서 R.랄리크의 보석 디자인, E.가레의 유리공예, 그리고 미국에서의 티파니의 유리그릇과 에스파냐에서 계속된 가우디의 건축활동 등 약간의 예외를 제외하고 아르누보는 소멸해갔다. 그러나 종래의 역사주의·전통주의에 반항하여 빈의 제체시온(secession:분리파)을 불러일으키는 등 현대미술의 확립에 선구적 구실을 했다는 점과 근대운동에 끼친 영향력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해야 한다. 설리번이 설계한 시카고 공회당(1888), 오르타가 설계한 브뤼셀의 P.E.얀손가(街)의 가옥(1892∼1893), 기마르가 설계한 파리의 지하철역(1900) 등이 아르누보의 양식을 오늘에 전하는 대표적인 것이며 뭉크, 로트렉, 나비파도 이 유행의 기조에 관련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 운동의 발단은 1883년 맥크무르도(A.H.Mackmurdo;1851-1942)가 크리스트퍼렌의 <도시 교회당>(City Churches)이라는 책의 장정을 한 데서부터 시작한다. 길고 섬세한 곡선,환상적인 백합의 줄기,곤충의 촉수,실꽃,이것들이 서로 얽힌 모양,모서리에서 자라온 화면을 구불거리며 채운 식물모양,이런 것들이 아르 누보의 현저한 장식수법이다.
 맥크무르도의 이런 종류의 문양(紋樣)의 직접적인 동기는 라파엘전파(pre-Raphaelist), 즉 버언 죤스라든가 로제티의 회화에서 유래한 것이다. 더우기 아르 누보운동은 19세기 말에 예술의 중심지의 감이 있던 부류셀의 예술성이 높은 분위기 속에서 탄생하였다고 생각된다.
 1880년에서 1890년 사이의 부류셀은 대중에게 경멸당하고,무시당한 창조적 예술사들을 환영하고 그들의 말에 유심히 귀를 기울인 높은 문화도시였다. 여기에 1881년 이래 <라르모데르네>(L'Art Moderne)라는 잡지가 간행되어 그 창간호에는 "예술은 인간환경을 개혁하고, 새로운 이상에 일치시키려고 하는 인간 영원의 자발적 자유행위"라고 말하여 아무러한 곳에도 속박을 받지않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제창하고 나섰다. 이 평론잡지는 곧 이어 "르 반티엠"(Les XX)이라는 젊은 에술가 그루프를 결집시켰다. 이 중에는 핀치(A.W.Finch)도 있어 그는 1891년 영국에서 모리스의 공예품을 사들여 이것이 그들 그루프를 감동시킨 끝에 영국의 공예운동을 벨기에에 연결하였다.
 "레 반티엠"이 다음다음 개최한 전람회는 매우 대담하였다. 1884년에는 로댕(Rodin),크놉프(Khnopff), 앙소르(Ensor),휘슬러(Whistler) 등, 1886년에는 모네(Monet),르노아르(Renoir),르동(Redon) 등, 1887년에는 스라(Seurat), 1888년에는 로오뜨렉(Toulouse Lautrec)과 시니약(Signac) 등, 1889년에는 고오갱(Gauguin), 1890년에는 세잔느(Cezanne),고흐(van Gogh),시슬레(Sisley) 등, 1892년에는 약간의 스테인드 글래스,자수,도기,책의 장정, 즉 응용예술이라고 멸시당하여 오던 작품들이 당당히 전시되었다.
 이러한 환경속에서 아르 누보의 중심인물인 반 데 벨데와 빅터 오르타는 강한 영향을 받았다. 또 다른 면으로는 1890년부터 시작한 비어드즐리(Aufrey Beadsley;1872-1898)의 많은 삽화, 투우롭(Toorop;1858-1928)의 "삼인의 자매",홀더(Holder;1853-1918)의 "선발된 사람", 데니스(Denis;1870-1945)의 "4월", 뭉크(Munch;1863-1944)의 "통곡","마돈나" 등의 회화가 작용하여 점차로 유럽 전역에 만연하게 되었다.
 아르 누보운동은 회화에서 몇 개의 의의있는 작품을 볼 수 있으나, 실제로는 회화의 한 흐름으로 이 운동이 발상한 것도 아니고, 또 "아르 누보"라는 명명은 회화운동을 지목하여 쓰여진 것만도 아니다. 단지 한 장식수법의 양식으로서 비교적 짧은 기간이지만 건축에 적용되어 유행한 양식을 지칭할 따름이다.
 시카고의 루이스 설리반(Louis Sullivan)은 본질적으로 독창적 수법이며, 빅터 오르타(Victor Horta)는 영국이나 대륙에서의 이와 비슷한 운동의 영향을 받아 발전시킨 사람이다. 따라서 설리반의 아르누보 수법은 고립된 채 미국에서 소멸되어 버리고 마나, 오르타의 스타일은 전 유럽을 휩쓸게 된다. 설리반이 어떻게 아르누보 스타일을 창안하였는지는 의문점으로 남아있다. 1888년 시카고에 "오디토리움 빌딩"을 건설하여 여기에 그의 독특한 아르누보 스타일을 완성하였다. 다시 1890-91년에 "앤쉬마리브교회당", 1903-4년에는 "카아슨 피리에 스코트백화점" 등 설계에서는 점점 더 강하게 그의 수법이 표현된다.
 설리반의 장식수법은 "넓고 당당한 선으로 구성된 구조에 알맞는 유기적 장식"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오르타 등 유럽의 아르 누보 건축가와는 본질적으로 성격이 다르다.
오르타는 1893년 "폴 에밀 죤슨저택"과 "튜린가의 저택"의 계단실과 실내를 아르누보 스타일로 장식하였는데, 여기서는 전연 구조체와은 관련없이 단순한 철로 된 곡선 모양의 표면장식에 그치고 있다.
 오르타의 좋은 협동자로 헨리 반 데 벨데도 역시 아르 누보에 속하는 장식수법을 썼다. 벨데는 영국의 공예운동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투우롭의 성숙한 작품을 극구 찬양하여 많은 영향을 받은 작가이다. 그는 이론가이며, 바아비존(Barbizon)파에 속하는 화가였는데, 다음 신인상파 화가로 화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나, 1894-95년에 육클(Uccle)에 자기 저택을 설계하고 여기에 들여 놓을 가구설계까지하여 이 작품이 그의 성가를 결정지었다. 소위 육클의 가구라고 불리우는 이 가구는 사용된 곡선은 아르누보 스타일이나 오르타의 섬세한 우아함과는 달리 역학적으로 힘찬 맛이 있다. 즉 오르타가 자연,채소,동물 등의 생생한 자연미를 느끼나, 벨데는 강항 추상화된 형상과 기능을 치중한 경향을 엿볼수 있다.
 벨데의 소위 "다이나모그라피"(Dianamographique)라 함은 "구조화"(構造化)한 장식미를 말한다. 그는 장식미술의 기본이 인력(引力)과 반력(反力)의 과학적 법칙에 기초를 두어야 할 것이지 결코 기술자의 창작으로 되는 우연의 산물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이론이 그가 기계를 찬양하는 심정과 예술적 표현형식을 관련시켜, 지금까지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대담한 시도를 꾀하였다. 그가 베를린에 "하아비 이발관"(Harby's barber)을 설계하였는데 수도관,개스관,전기배관을 노출시킨 환상적 실내를 보고 일반은 놀라 말하기를 "저고리 밖으로 시계줄 늘이듯이 창자를 걸쳐 놓았다"라고 하여 기능주의의 극단인 표현과 아르누보 스타일의 잡탕인 그의 작품을 욕하였다. 그러나 육클의 의자같이 벨데의 기능면에 대한 활동은 주목할 만하다.
 벨데의 이론과 작품을 처음으로 이해한 사람이 사무엘 빙(Samuel Bing)이다. 그는 함부르크의 미술상으로 1871년에는 빠리로 이전하여 계속 미술상을 경영하고 있었다. 1875년에는 극동지방으로 여행을 하고 돌아와서 동양미술을 널리 소개한 바 있고, 1893년에는 정부파견으로 미국에 건너가서, 리챠아드슨이나 설리반의 건축과 기계생산품의 미를 프랑스에 전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가 프로봔스가(街)에 "아르 누보"라는 이름의 미술상을 차렸을 때, 독일의 미술 평론가인 마이어 그레페(Meier Graefe)의 협동을 얻어 자기 점포의 실내장식을 벨데에게 위촉하였다. 벨데는 빠리에 초청을 받아 네 개의 방을 그의 참신하고도 힘찬 아르 누보 스타일로 장식하였다. 방의 상업적 의도는 적중하여 이 사실은 잠깐 사이에 빠리에 호평을 받아 이러한 곡선을 사용한 장식의 유행은 프랑스에서 독일로 번져갔다.
 유리 세공가(細工家)인 에밀 갈레(Emile Galle;1846-1904)와 도공(陶工)인 아우구스테 델라 헤르케(Auguste Delahaerche;1857-?)는 이에 동조한 공예가로 유명하다.
 1895년에서 20세기 초엽까지 아르 누보는 프랑스와 벨기에에서 대성황을 이루었다. 1895년에 젊은 건축가와 공예가의 집단으로 "르 싱그"(Le Cing)라는 그루프가 조직되고, 나중에 챠알스 플르메(Chgarles Plumet;1861-1925)가 참가하여 "르 식스"(Lessix)라는 명칭으로 불리웠는데, 이 그루프 "대중을 위한 예술"(L'Art daus tout)이라는 타이틀의 전람회를 열고, 아르 누보 스타일을 대대적으로 선전하였다.
 건축면에서는 헥토르기마드(Hector Guimard;1867-1942)의 빠리 지하철 역사라든가 1894-8년에 "파시의 폰탄가(家)의 주택"은 표준적 프랑스 아르 누보 스타일의 건물로 유명하다.
 아르 누보와 철의 사용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 운동이 구태의연한 장식주의에 그치고 말았음에도 불구하고 근대적 성격을 띤 운동으로 높이 평가받느 이유의 한 단면도 여기에 있다.
 독일에서는 벨기에보다 좀 늦게 이 운동에 들어섰으나 건축가들간에 협조가 잘 이루어지지 못하고 또 독일에서 원래 뿌리깊게 침투하고 있는 즉물적 과학성 때문에 아르 누보운동은 오래 계속되지 못하고 또 큰 실적도 거두지 못한다. 벨데의 영향을 받은 작가로 오토 엑크만(Otto Eckmann)과 헤르만 오브리스트가 있다. 이들은 모두 아르 누보의 독일에서의 유파인 유겐트스틸의 작가이다.
 이러한 아르 누보는 확실히 새로운 양상이기는 하지만 혁명운동치고는 너무 보수적이고, 사회적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에 뿌리없는 표면상의 예술운동에 지나지 않은 감이 있다. 그래서 영국에서는 빅토리아 스타일과 근대와의 과도적 스타일로 보아왔고, 따라서 모리스들의 "예술과 수공예운동"과도 비교되는 운동이다. 모리스의 "예술과 수공예운동"은 예술가의 정당한 지위의 확보와 공예에 대한 합리적인 태도를 가질 것을 위하여 과감히 투쟁한 큰 공헌이 있으나, 아르 누보는 피상적이며, 예술지상주의자들의 직접적인 표상(表象)의 한 발로 이상으로 더 큰 운동으로서의 중요성이나 사회성은 찾을 수 없다.
 그들이 아무리 19세기의 역사주의자들의 형태를 벗어난 독창적 형태를 창안하였다고 주장하지만 냉정히 판단하여 19세기적 기반을 벗어날 수 없었다. 단지 한 가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은 예술과 건축의 발전사상 아르 누보가 도달할 수 있었던 가장 괄목할 만한 예가 유럽 변두리의 한 지방에서 순교자와도 같은 한 건축가에 의하여 이루어진 사실이다. 그는 바로 안토니오 가우디(Antonio Gaudi;1852-1926)의 행적이다.
 가우디는 바로셀로나에서만 일하였다. 그는 후기 고딕부흥주의로 알려져 있으나 어디까지나 독창적 표현의 작가이다. 그러나 맥크무르도와 평행하여 대담한 자유자재로운 곡선을 쓰기 시작하였다.
 1900년 이후에 제작한 산타 콜로마 디세르벨로(Santa Colima de Cervello)나 규엘공원(Parque Guel)은 어느 지방 아르 누보 보다도 훨씬 앞선 곡선과 자유분망한 건축가의 환상이 표현되어 있다. 이외에도 그의 성숙기의 작품인 사그라다 파밀리아성당(Church of Sagrada Familia;1903-26), 카사밀라(Casamila,Barocelona;1905-7),카사 바틀로(Casa Batllo,Barocelona;1905-7)등은 아르 누보의 절정에 서 있는 가우디의 걸작들이고, 나중에 표현파운동과도 연결을 지으면서 1950년 이후에 르 꼬르뷰지에 등의 좀 더 광폭한 건축들과도 관련지을 수 있는 건축이다.
 미술 공예 운동이 중세라는 이상에 근거하여 수공예를 통한 생활의 개혁을 지향한 것이라면, 아르누보는 자기를 그린 장식과 환상을 바탕으로 이를 실천하려 한 운동이다. 그러므로 아르누보는 과거에서 이상을 찾기 보다는 자기를 추가한 것이며, 실재하는 육체가 아니라 정령(精靈)을 형상화하였다. 때문에 아르 누보의 예술에서는 현실 자체를 소재로 한 것이 드물다. 동시에 아르누보는 장인적 생산 체계를 도입하여 근대의 기술을 병합하려 했다는 점에서는 공업 사회의 예술이지만, 결국은 작가와 주문자의 취미의 세계에 머물고 합리적인 근대 사회에 충분히 대응하지 못했다는 결함을 지닌 예술 운동이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아르누보는 쇠퇴하기 시작되었다. 아르누보의 작품들과 가구들은 한정되어있고 유일한 것이었다. 포스터와 잡지의 그래픽 디자인으로 아르누보가 대중화되자 많은 양이 제작되었고 필연적으로 질이 떨어지게되는 현상을 가져왔다. 장식의 그 본질적의미는 생각하지 않은채 표면적인 장식의 스타일만을 본뜬 모방자들의 조악한 제품을 생산함으로써 그 가치는 최하의 수준으로 떨어졌다. 1차세계대전으로 자연히 소멸되어갔으나 지금 그 운동의 소재, 방법, 의의를 지향하는 아르누보의 기본 태도를 받아들인 20세기의 디자이너에 의해 변모, 발전해갔다.



건축

 아르누보 건축에서는 조형예술가들 사이에 구조와 형태가 건축의 참된 기반이라는 방향이 제시되었으며, 일반 식물 형태에 기본을 둔 부드러운 선의 표현이 주가 되면서 전통적인 건축 장식의 견고하고 직선적인 기학적인 형태와 대조를 이루는 새로운 종류의 건축양식이 출현되었다. 아르누보 건축에서 가장 현저하고 복잡하고 창조적인 특징들을 보여준 사람은 스페인의 바로셀로나에서 활동했던 안토니오 가우디 이다. 그의 탁월한 설계는 기능주의에 거슬리지 않으면서 대담하게 거대하였으며, 육중하게 기획된 건물들은 생물적인 형태나 형상들을 기반으로 설계되었다. 가우디와 함께 아르누보 건축을 가장 화려하게 꽃피운 사람은 벨기에의 빅또르 오르타와 반 데 벨데로 오르따 이다. 그들의 건물들은 아아치형 구조와 솟아나듯이 탄력있는 곡선이나 포도덩쿨과 같이 휘감기고 나선형으로 굽이치는 곡선들로 장식되었는데, 그 선들은 레이스 끈, 채찍의 선이라 불렸다. 또한, 반 데 벨데의 건축은 따뜻하고 생기가 있는 유기적 특성과 20세기 기능주의와 합리주의에 영향을 준 투명하고 윤곽이 뚜렷한 기능적 측면을 공유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1887년에 '에펠탑'이 건설됨으로써 현대적이고 미래주의적인 건물의 본보기를 설정하게 됨으로써 아르누보의 영역을 마련하게 되었고 영국의 아르누보 건축은 매킨토시에 의해 구축되었는데, 곡선보다는 직선적인 취향이 많이 보이는 것이 특색이다. 그의 건축은 네오-고딕적인 창문이나 문 등의 장식이 단순화된 방법에 의해 절제되었고, 한편으로는 전체의 구성과 연결되어 나타났다. 곡선보다는 수직선의 사용이 많았으며 식물의 형태도 선적인 수직상태를 이루어 20세기 합리주의를 예고하였다.



조각

 아르누보의 조각은 기념물의 조각형식과 실내의 벽난로나 테이블 위의 장식용 작은 조각의 발달이 두드러졌다. 아르누보가 상징주의 미학을 기초로 출발하였기 때문에 조각에서도 상징적 표현성과 장식성이 강조되었다. 아르누보 조각에서 주로 사용한 주제는 여성이었고 식물이나 곤충, 물결적 표현이 사용되기도 하여 주제로 채택한 자연물과 작품에 있어서의 기능을 일치시 키고자 실용성이 중요시 되었다. 아르누보 조각가들은 사회의 진보와 철학의 발달에 따라 구시대 관습에서 해방된 여성을 자유롭고 활기차고 명랑하게 표현 하고자 하여 님프, 나이나드(Naiad :물의 정), 물의 요정 등으로 묘사하였다. 선의 사용에는 대체적으로 파동치는 유기적인 곡선이 과잉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식물의 넝쿨, 꽃, 비틀려져 올라간 줄기와 소용돌이 장식에서 표출되었다. 작가들은 순수 조각 분야보다는 장식 조각 분야에 더 활발하게 참여하여 '미의 대중화'를 추구했던 아르누보의 이상에 부응하였다.



회화

 아르누보 회화는 다른 조형분야와 같이 표현력이 풍부한 유동적인 곡선을 사용하였고, '상징'이 관념에 구체적인 형태를 준 다고 보고 환기적이고 장식적인 형태의 수단을 이용해서 관념을 주관적으로 표현한 점에 특징이 있다. 아르누보 회화의 전체적인 성격을 구성하는 것은 라파엘전파와 상징주의 및 표현주의적 경향이다. 라파엘전파가 목적으로 한 것은 타락한 라파엘 시대와 르네상스 전성기 이전 시대의 예술의 순수함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들의 특징은 흐릿한 배경위 에서 거의 환각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화려하고 밝은 색채를 보여주었고 상세한 부분까지 주의깊게 다루었던 태도에 있다. 상징주의 회화의 특징은 신화를 주제로 하여 환상적인 것으로 악마, 지옥, 광기, 공포들이 내재하는 전설, 혹은 영감의 원천인 자연을 모티브로 작품을 창작했다는 데 있다. '모든 예술의 통합'을 추구하는 아르누보의 이상에 따라 회화 역시 실용성이 있는 예술이 되도록 요청되었다. 그 기능은 장소나 건물을 장식하는 것으로 전체적인 환경과의 조화가 요구되었으며, 이는 '상징주의의 결과론이 장식성의 중요성을 강조'한 데서 연유하였다. 또한 이 시기의 화가들은 세기말과 세기초를 지배한 양식의 흐름에 영향을 받게 되면서 그래픽 예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특히, 앙리 드 뚤루즈 로트렉의 활동이 두드러졌음. 로트렉은 명암이나 광선을 무시하여 형태나 운동에 촛점을 맞추었으며 에드가 드가의 지그재그식 구도와 고갱의 색채 및 굴곡진 윤관선에 영향을 받았다.



공예

 아르누보 예술가들의 '모든 예술의 통합'이라는 노력이 공예를 통해 꽃피웠기 때문에 이 시기의 조형적 걸작품은 공예부문에서 가장 많이 보였다. 단순한 예술 작품의 창조가 아니라 사회생활에 알맞는 환경을 제공하게 될 부문들이나 요소들의 조화롭고 종합된 복합체를 목표로 하였던 것이다. 공예의 주요부분은 가구이고, 그외에도 금속공예, 스테인드 글라스, 램프, 유리, 장신구 등 다양하다. 대표적으로 가구의 특성을 보면, 유기적 모티브를 조용하고 섬세하게 사용했는데, 식물형태에서 보면 줄기가 반복되고 수직선들이 우아하게 굽은 마디에 의해 접합 부분에서 단절되거나, 여린 가지를 엉키게 하거나 가지들을 번성하게 하는 방법으로 형상화시켰다. 로버트 슈므츨러는 이 양식의 주된 테마를 '해초나 식물의 넝쿨 따위를 연상시키는 길고 감각적이며 유연한 선'이라고 말한 바 있다. 





구로구미술학원 / 전원미술학원 구로 캠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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