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07, 2013

신즉물주의 ( 新卽物主義 : Neue Sachlichkeit )

신즉물주의 ( 新卽物主義 : Neue Sachlichkeit )



Otto Dix (German, 1891-1969) / To Beauty
1922 / Oil on canvas _ 55 1/8 x 48 1/16 in. (140 x 122 cm)
Von der Heydt-Museum, Wuppertal



  20세기 독일에서 일어난 반(反)표현주의적인 전위예술운동. 신현실주의 또는 독일어로 노이에 자흐리히 카이트라고 한다. 이 명칭은 1923년 하르트라우프가 1920년대 회화에 있어서 사실주의적 경향을 총칭하기 위해 “신자연주의”라 칭하였다가 만하임미술관에서 미술관장 하르트라우프가 기획하여 열린 전람회[신즉물주의:표현주의 이후 독일회화]의 이름에서 나왔다.

 신즉물주의 회화는 전쟁후 표현주의가 찬미했던 인간과 그가 만들어낸 가치척도 전체를 부정하는 데서 출발하였으며 바우하우스나 러시아 전위 미술가들의 활약을 통해 산업사회의 합리적 이상과 결합하였다.
 키리코에 의해 1910년 이후 시작된 형이상학적 회화를 연상시키면서 불가사의한 분위기를 내는 풍경화나 인물화에서 기계와 같은 정확함과 수공업적 소묘기술로 그려진 차가운 느낌의 정물화,고도의 인플레이션 이후 경제의 합리화 과정에서 파생된 사회와 시민의 변모를 보여주는 도시풍경화 까지 모두를 총칭한다. 신즉물주의는 발달함에 따라 사회비판적 의도나 효과에 따라 좌익과 우익으로 분리되는 데, 좌익은 진실주의라 불리웠다가 신즉물주의로 정의되고, 우익은 불가사의한 사실주의라 칭해지게 된다.
 당사의 표현주의가 주관의 표출에만 전념한 나머지 대상의 실재파악을 등한시하고 비합리주의적인 경향으로 흐르는 데 반대하여, 즉물적인 대상 파악에 의한 실재감의 회복을 기도한 운동이다. 주동한 화가로는 베를린의 다다이즘운동에 가담한 G.그로스 및 O.딕스가 있다. 그로스는 처음 디자인 관계의 일에 종사했고, 또 신문이나 잡지에 풍자적인 데생을 발표하여 인정받았으나, 제1차 세계대전 후 혼란한 사회에 직면하자 좌익적인 입장에 서서 독일의 군국주의와 부르주아지에 대해 통열한 비판자가 되었다. 한편, 노동자의 아들인 딕스는 사회의 암흑 속에 사는 인간의 비참함과 추악함을 박진감 넘치는 묘사력으로 폭로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크라나하’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 밖에 주목되는 화가로는 실내나 정물을 소박한 기법으로 그린 G.슈림프, 기하학적 형태를 골격으로 하여 식물을 그린 A.카놀트 등이 있다.
 신즉물주의의 회화는 의도적으로 대상을 소묘적으로 정확히 그렸으며 감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비감상적 사물관찰방식으로 냉정하고 날카로운 시각을 가지고 추한 것을 꺼리지 않으며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대상이 고립적이며 정적인 것을 선호하고 또한 붓자국을 없앰으로써 개인의 필체와는 무관하게 표현된다.
 신즉물주의의 표현형식상 특징은 “콜라주원칙”이라 말해질 수 있는 데, 이는 다른 맥락으로부터 대상을 가져와 모은 듯하고 인물이 동떨어지고 주변이 진공상태처럼 느껴지는 효과이며 이는 전통회화나 사진과의 구별점이라 할 수 있다.
 신즉물주의는 시대의 표정이라 불릴 정도롤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대상을 직시하고 격렬하게 사회를 비판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그리하여 사회여론으로부터 거센 비난과 법적 제재를 받았으며 전시금지의 제약을 받았고 그 후에도 이데올로기에 의한 정치적 해석으로 공정한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금세기 후반의 사실주의적 미술(신구상회화, 포토리얼리즘 등)의 모델이 되었다. 이 운동을 포함한 후기 표현파의 양식을 마적(魔的) 리얼리즘이라고 표현하였고 나치스의 대두와 함께 이 운동은 박해받아 소멸하였다.


  오토딕스 : 노동자계급 출신인 오토 딕스는 형언하기 어려운 공포를 그린 전쟁그림을 그렸으며 타협이 없는 - 추상미술에 대한 전후의 반동과도 같은 - 사실주의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단순한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비현실적 느낌, 과장, 상세한 솔직성이 드러나는 마술적 사실주의라 할 수 있다. 그는 전후에 신비적이고 종교적인 표현으로 돌아섰다.

 막스 베크만 : 베크만은 단지 잠시동안만 사실주의자라고 말해질 수 있는 데 그는 르네상스 화가들과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들에게 영향을 받았다. 그의 작품 <십자가에서 내림>에서는 들쭉날쭉한 형태와 한정된 공간을 볼 수 있는 데 이는 큐비즘에서 받은 영향으로 보인다. 그는 후기 고딕과 큐비즘, 독일 표현주의를 혼합시켜 새로운 양식을 모색하였으며, 정치지향적이지는 않지만 전쟁말기의 폭력성과 잔인성에 반응하여 고통, 야만성, 역겨운 느낌의 색채로 표현된 인물들을 그렸다. 표현주의로부터 자라나왔지만 실재를 왜곡하면서도 정확하게 표현하는 베크만의 방법은 마술적 사실주의로 정의되었다. 1930년대 이후에는 나치에 의해 퇴폐미술가로 낙인찍힌 후 미국에서 여생을 보냈으며 이때의 작품에서는 마티스, 피카소의 영향인 듯한 풍부한 색채, 그의 독일인적 성격을 반영하는 문학적 주제에 대한 강조가 나타났다.
 게오르게 그로츠 : 그로츠는 전쟁에 참가하여 독재와 부패, 전쟁의 공포등을 관찰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그림을 그렸으며 전쟁후에도 좌익사상에 이끌리어 현실에 대한 혐오감이 표현되는 그림을 그렸다. <오스카 파니차에게 바침>은 그의 대표적 작품으로 폭동으로 번진 장레식이 선형이나 화염의 붉은 빛으로 만연해 있고 <신체검사합격>이라는 작품은 관료정치에 대한 그로츠의 공포와 혐오감을 보이고 있으며 큐비즘적 공간축약과 간결한 소묘들이 나타난다. <공화국의 자동인형들>은 형이상학파의 양식과 주제를 정치풍자에 이용하고 있다. 그로츠는 나치즘 때문에 미국으로 망명하여 풍자보다는 우호적이기까지 한 그림을 그리다가 2차대전으로 하여 혐오와 환멸의 표현이 나타나는 작품을 제작했다.



구로구입시미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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