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7, 2013

신인상주의 ( Neo-impressionnisme : 新印象主義 )

신인상주의 ( Neo-impressionnisme : 新印象主義 )


쇠라 / 아니에르에서의 물놀이  / 1884 / 캔버스에유채 / 영국 런던 국립미술관 소장

 근대 프랑스 회화의 조류. 인상주의를 과학적 방법으로 추진하고자 한 운동. 신인상주의는 G.쇠라, P.시냐크등을 중심으로 행해진 점묘주의등의 이론과 수법 및 그 운동을 말한다. 쇠라가 죽은 뒤에는 시냐크가 그 대변자가 되었다. 빛의 분석은 인상주의의 수법을 계승하면서도 인상파의 본능적· 직감적인 제작 태도가 빛에만 지나치게 얽매인 나머지 형태를 확산시킨다는 점에 불만을 느끼고, 여기에 엄밀한 이론과 과학성을 부여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색채를 원색으로 환원하여 무수한 점으로 화면을 구성함으로써 통일성을 유지하였다.
 즉, 그림물감을 팔레트나 캔버스 위에서 혼합하지 않고 망막(網膜) 위의 시각혼합으로 필요한 색채를 얻는 방법이다. 예를 들면, 청색과 황색의 작은 점들을 수없이 배열해나가면 시각적으로는 녹색으로 보이는 따위이다. 또한 형태나 구도에서는 ‘황금분할(黃金分割)’ 등을 자주 사용함으로써 고전적인 회화에서처럼 안정성을 찾으려 하였다. 이와 같은 특징을 대표할 만한 작품이 쇠라의 《그랑드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 (1886)와 시냐크의 《펠릭스페네옹의 초상》(1990)이다.
 인상주의가 사용한 기법을 과학적으로 더욱 발전시키면서도 동시에 인상주의의 경험주의적 사실주의에 대한 반발, 고전주의적 정신의 부활을 꾀한다는 기치 하에 쇠라가 1884년 5월의 앵데팡당 전에 출품한 「목욕하는 사람들」을 보고 비평가 펠릭스 페네옹이 신인상주의라 이름붙였다. 쇠라는 거기서 시냑을 만나 함께 '앵데팡당 미술가 협회'라는 새로운 그룹을 만들었다.
 점묘주의 혹은 분할주의는 신인상주의가 사용하는 독창적인 테크닉의 기반을 이루는 것으로써, 캔버스에 색칠을 해 나갈 때 순색만을 사용하되 이를 일체 뒤섞지 않으면서 작은 점으로 찍어나가는 방법을 말한다. 이 경우 색조의 순도는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보는 이의 망막위에서 중간색이 형성되는 효과를 낳게 된다. 이 방법은 와토, 들라크루아, 터너 등이 이미 사용하였으며 인상주의자 중 르노아르가 최초로 사용했다.
 쇠라등의 신인상주의 화가들은 이러한 기법을 좀 더 과학적으로 발전시킨 자신의 기법에 '점묘주의' 대신 '분할주의'라는 용어를 더 어울리는 것으로 생각했다. 1887년부터 1891년 사이 쇠라는 과학적 이론들을 과학적이고 정서적인 선과 색조로 환원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해 나가면서 전통적인 아카데미 이론과의 접목을 시도하기도 한다.
 색채 분할등 인상주의의 기법을 더욱 체계화시키는 동시에, 신인상주의자들은 인상주의자들의 경험주의적 사실주의에 정면으로 대비되는 정신, 즉 그림이란 신중하게 고려되고 계획될 수 있으며 과학적으로 계산된 효과가 예견, 지향될 수 있다는 사고를 도입시켰다. 세잔느와 더불어 쇠라가 현대 회화의 혁신적 인물로 취급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신인상주의는 뤼스, H.크로스, D.피에, C.앙그랑, 리셀베르크 등의 동조자를 얻는 한편, 고흐, 고갱, 피사로 등에게도 한때 영향을 주었다. 또한 조형이론의 존중과 거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 지성주의 및 구도나 형태의 기하학성 등 여러 특색은 20세기의 큐비즘과 오르피즘, 추상회화 등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 회화운동의 이론을 체계화한 시냐크의 저서 《들라크루아에서 신인상주의까지》(1899)가 있다.

쇠라 ( Georges Pierre Seurat : 1859.12.2~1891.3.29 )
 신인상주의미술을 대표하는 프랑스의 화가. 파리 출생. 1878년 파리의 관립미술학교에 입학하여 앵그르의 제자 H.레만의 지도를 받다가, 다음해 지원병으로 입대하여 브레스트의 해안에서 병역을 마쳤다. 파리로 돌아와서는 고전 작품을 연구하고 소묘에 힘을 쏟는 한편, 셔브뢸, 헬름홀츠 등의 색채학과 광학이론을 연구하여, 1881년경 들라크루아의 작품의 색채대비와 보색관계를 해명한 글을 발표하여 세인의 관심을 모았다. 이러한 이론을 창작에 적용하여 점묘(點描)화법에 의한 최초의 대작 《아니에르에서의 물놀이:Une Baignade, Asni뢳es》(1883∼1884)를 완성하였는데, 이 작품은 1884년 살롱에 출품하여 낙선하였으나 앙데팡당전(展)에 출품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일을 인연으로 평생 화우(畵友) P.시냐크와 사귀게 되었다. 1885년 《그랑드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를 제작하여 다음해에 열린 인상파 최후의 전람회에 발표하였다. 이것은 전작(前作)의 수법을 한층 더 발전시켜 순수색의 분할과 그것의 색채대비에 의하여 신인상주의의 확립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이 밖에 《포즈를 취한 여인들:Les Poseuses》(1888) 《기묘한 춤 Le Chahut》(1889∼1890) 《화장하는 여인》(1890) 등의 작품이 있다. 모두 인상파의 색채원리를 과학적으로 체계화하고 인상파가 무시한 화면의 조형질서를 다시 구축한 점에서 매우 의의가 있으며, P.세잔과 더불어 20세기 회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전염성 후두염으로 32세의 젊은 나이에 파리에서 요절하였다.

시냐크 ( Paul Signac : 1863.11.11~1935.8.15 )
 프랑스의 화가. J.P.기요맹의 제자. 파리 출생. C.모네의 작품을 보고 감동하여 화가가 될 뜻을 세워 1883년 20세 때 아카데미 리브르 드방에 들어가 인상파의 화풍을 익혔다. 84년 제1회 앙데팡당전에 처음 출품하고, 그때 출품된 G.쇠라의 작품에 공감하여 그와 친교를 맺고부터는 색채의 동시대비의 이론과 기법을 연구하여 그 성과를 86년의 인상파 최후의 전람회에 쇠라와 함께 발표함으로써, 신인상주의의 기치를 선명하였다. 그의 작풍은 과학적 점묘주의에서 나중에는 쇠라의 점묘보다 큰 점을 이용한 모자이크풍의 묘사법으로 변화했는데, 풍경화가로서 각국의 바다 풍경, 특히 프랑스 각지 해항(海港)의 풍경그림에 특색 있는 작품이 많다. 앙데팡당전의 창설자의 한 사람이며, 1908년부터 종신토록 앙데팡당전의 회장을 지내면서 청년화가들을 격려하였고, 신인상주의의 바이블이라고 일컬어지는 《들라크루아로부터 신인상주의까지:De Delacroix au Neo-impressionnisme》 (1899) 등의 저서를 남기는 등 생애를 신인상파 지도자로서 정열적으로 활약하였다. 주요작품에 《마르세유항의 풍경》(1905) 등이 있다.




개봉동화실

신사실주의 ( 新寫實主義 : Nouveau Realisme )

신사실주의 ( 新寫實主義 : Nouveau Realisme )



 1950년대 초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하여 등장한 유럽에 있어서의 새로운 경험의 전위미술운동. 당시 유럽과 미국의 지배적인 회화 조류이던 앵포르멜 미술, 추상표현주의, 타시즘 등 일련의 추상미술에 대응해서 일어났다. 신사실주의는 공업 제품의 단편이나 일상적인 오브제를 거의 그대로 전시함으로써, '현실의 직접적인 제시'라는 새롭고 적극적인 방법을 추구했던 예술이라는 점에 특색이 있다. 이 방법은 신사실주의의 가장 주요한 이념으로, 이브클랭의 비물질화 사상에서 발전한 것이었다. 즉 공업화된 사회를 현대의 자연으로 보아, 그 속에서 생산되는 물체를 무매개적으로 제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사실주의의 중심이 된 사람은 프랑스의 비평가 피에르 레스타나로서 그는 1960년 4월 밀라노의 아폴리네르 화랑에서 제1회 선언을 발표하고, '누보 레알 리스트전'을 개최했다. 이 전시회에서 처음으로 누보 레알리스트란 호칭이 쓰여졌으나, 정식으로 그룹이 결성된 것은 그해 11월이었다. 이어 60년 말 파리에서 열린 제2회 전위 미술제에서 최초로 작품을 발표했고, 이듬해 5월 파리의 제이 화랑에서 '다다를 넘는 40도'라는 전시회가 조직되어 신사실주의의 존재가 세상에 인정되게 되었다.
이 전시회에서 아르망은 그림물감의 튜브나, 진공관과 같은 대량 생산의 공업 제품을 집적한 작품을 출품하여 '현실의 직접 적인 제시'라는 방법을 구체화시켰다. 한편 다니엘 스포에리는〈타블로 피에지 (함정의 회화)〉라는 작품을 출품했는데, 음식물이 남아있는 식기류를 쟁반 위에 그대로 고착시킨 것이었엇다. 이것은 음식물이 남아 있는 상태를 현상대로 제시한 것으로 팅겔리의 폐품이용의 작품과 상통하는 것이었다. 또 60년의 살롱 드 메에 출품했던 세자르의 폐물 자동차를 입방체 상태로 고정시킨 '압축 조각'은 소재의 특이성과 메티에의 방기라는 점에서 신사실주의의 미학을 잘 나타내주는 작품이다.
 신사실주의의 그룹의 최초의 참가자는 레스타니, 아르망, 뒤프렌, 앵스, 이브 클랭, 마르시안 레이스, 다니엘 스포에리, 팅겔리, 텔라, 니키 드 생 팔, 크리스토 등이 참가했다. 신사실주의의 세 개의 선언을 발표하여 이념적으로는 통일을 보였으나, 구체적인 개개 작품의 신사실주의로서의 공통성은 결코 명확하지 않다. 공통적이라면 '현대의 자연에 대한 공통적인 감각과 집단적 행위의 일시적인 필요성의 자각'이라는 점뿐이다.
 레스타니에 의하면, 기계화되고 공업화되어 광고로 가득 찬 것이 현대의 자연이므로, 신사실주의 화가는 그 자연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제시'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전략적 필요성에 따라 그룹이 결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구로구미술학원 / 전원미술학원 구로 캠퍼스

신라고분 (新羅古墳)

신라고분 (新羅古墳)



 신라는 무덤을 통해볼 때 크게 3기로 나눌 수 있다. 조기(早期)는 원삼국시대로 움무덤[土壙墓]을 축조한 시기이며, 전기(前期)는 4세기 전반~6세기 초로 경주에서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 영남에서는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墳]이 축조되었다. 마지막 시기는 6세기 전반 이후로 경주에서는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 축조되나, 지방에서는 고분이 소멸되는 양상을 보인다. 신라의 주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논란이 되는 것은 돌무지덧널무덤의 선행묘제로서 돌무지무덤이 존재하였는가 하는 문제이다. 대표적 전파론자인 최병현과 김원룡은 돌무지덧널무덤의 나무곽 구조 위에 별도의 목조시설이 있는 것은 시베리아에서 유행한 묘제와 일치하는 것으로 돌무지무덤이 선행되지 않았다고 본다. 반면, 일제강점기 때 우매하라[梅原末治]의 낙랑 나무덧널[木槨]과 대구 대봉동 고인돌돌무지의 결합설 이래, 북한의 박진욱이 고구려의 돌무지무덤[積石墓]과 나무관무덤[木棺墓]의 결합형태로, 강인구가 초기의 고구려계 돌무지무덤에 뒤에 다시 봉토(封土)를 부가하였다고 보았다. 사실, 돌무지덧널무덤은 경주지역에 한정된 묘제로 당시 영남지방에서는 구덩식돌덧널무덤, 굴식돌덧널무덤, 그리고 독무덤 등이 나타난다. 그러나 최근 울산지역 중산리유적의 발굴조사 결과 나무덧널무덤에서 돌무지덧널무덤으로의 영향을 받아 성립했다는 자체발생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대체로 경주지역에서의 무덤축조는 언덕 위에서 평지로, 소형무덤에서 대형무덤으로 변하면서, 한편으로는 나무덧널을 보존 연장하고, 한편으로는 봉토의 거대화를 위해 고인돌과 같은 돌무지 전통이 새로 채용되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경주의 돌무지덧널무덤은 귀족층의 묘제로 보이며, 관의 위치에 따라 지하식·지상식·반지하식 등으로 나뉘는데, 대부분 지하식이다. 이는 지하에 광을 파고 상자형 나무관을 짠 다음, 냇돌로 둥글게 쌓고 다시 봉토를 덮고 둘레돌[護石]을 돌린 것으로 추가장(追加葬)이 되지 않는다. 초기에는 주곽(主槨) 외에 부곽(副槨)이 있었으나, 부곽이 사라지고 유물은 주곽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돌무지덧널무덤에서는 다곽묘(多槨墓)와 단곽묘(單槨墓)가 있는데, 연구 초기에는 이것이 시기적으로 변하는 것으로 보았으나 근래에는 계급 차이의 반영으로 보고 있다.
 대표적 돌무지덧널무덤으로는 황남동 109호분과 천마총·호우총 등이 있다. 돌무지덧널무덤 이후에 등장한 묘제는 굴식돌방무덤으로, 평면이 장방형이면서 평천정(平天井)을 한 것과, 방형널방에 궁륭식 천정을 가진 것으로 나뉜다. 관대에는 대개 머리베게[頭枕]와 족좌(足座)가 있다. 출현시기는 경주 보문리 부부총이 돌무지덧널무덤과 굴식돌방무덤이 쌍분을 이루므로 가장 고식으로 보이며, 그 토기의 양상으로 6세기 중기로 편년된다. 평면이 대체로 방형이고 ‘ㄱ’자형의 널길[羨道]이 있는 이러한 굴식돌방무덤은 김해·고령·합천· 현풍·인산·경산·경주 등에서 발견된다. 한편, 순흥 읍내리에서는 고분벽화가 나와서 신라· 가야와는 이질적인 고구려계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며, 쌍상총(雙床塚)에서는 방형널방의 남벽 중앙에 ‘모’자형 널길이 나 있다.

천마총 (天馬塚)
 경주 황남동 고분군 일대를 정비, 정화하여 대릉원이라 이름지은 고분공원 안 서북쪽에 위치한 고분으로 원래 경주 155호분 이라고 불려왔던 밑지름 47m, 높이 12.7m의 원형분이다. 고분은 지표에 큰 냇돌을 고르게 깔아 목곽 바닥으로 삼고 거기에 동서 6.6m, 남북 4.2m, 높이 2.1m로 추정되는 목곽을 설치하였다. 목곽안에는 중앙에서 서쪽으로 약간 치우쳐서 길이2.2m, 너비 80cm의 목관을 동서로 길게 놓고, 그 주위에 자갈로 너비 50cm, 높이 40cm의 석단을 쌓았다. 석단 동쪽에 접하여 길이 1.8m, 너비 1.0m, 높이 0.8m의 나무로 짠 부장품수장궤(副葬品收藏櫃)를 남북으로 길게 놓았다.
 4세기부터 6세기 전반까지 조형된 대형의 돌무지 덧널무 덤(적석목곽분)은 당시 신라의 힘과 부를 상징하고 있다. 1973년에 발굴되었는데 장신구류 8,766점, 무기류 1,234점, 마구류 504점, 그릇류 226점, 기타 796점으로 모두 1만 15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중 일부가 국립경주박물관 별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금관(金冠)과 천마도장니(天馬圖障泥)이다.
 목곽 주위에는 큰 냇돌을 밑지름 23.6m의 원형으로 목곽과 같은 높이까지 경사지게 쌓아 올리고, 목곽 위에는 약4m 높이로 냇돌을 반구형(半球形)으로 쌓아 그 표면에 진흙을 약 30cm 두께로 바르고 정상부에는 진흙속에 마주장식품(馬具裝飾品)들을 묻었다. 진흙 밖으 로는 산흙을 쌓아 봉토를 만들었고 봉토 기슭에는 냇돌을 높이 1.2m로 쌓아 호석(護石)으로 삼았다. 목관안에서는 피장자(被葬者)가 착용하였던 금관, 금제과대(金製 帶), 요패(腰佩), 팔지, 반지, 목걸이 등의 장신구류와 환두대도(頭大刀)가 발견되었고, 부장품수장궤 뚜껑 위 에서는 금제조익형관식(金製鳥翼形冠飾)과 금제접형관식 (金製蝶形冠飾) 및 금동모(金銅帽), 금동제경갑(金銅製脛甲) 등의 파편이 발견되었다.
 수장궤 안에서는 투조금동판식죽심장니(透彫金銅板飾竹心障泥), 백화수피제(白樺樹皮製), 천마도장니, 은제/금동제 안장 등의 마구류가 위쪽에 놓였고, 그 밑에 백화수피제 채화판 (彩畵板)이 있었다. 이들 밑에는 금·은·금동 및 청동으로 된 각종 그릇과 많은 칠기와 유리그릇이 있었고, 맨 밑에는 쇠솥과 각종 토기들이 가득 차 있었다.
 석단위에서는 동쪽에서 금모(金帽)·은제과대 등의 장신구류가 발견되었고 그밖의 자리에서는 환두대도를 비롯한 각종 무기류와 철정(鐵鋌)이 나왔으며, 금동제식리(金銅製飾履)는 서북쪽 모서리에서 발견되었다.
 금관은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시대 금관 가운데 금판(金板)이 가장 두꺼우며 금의 성분도 우수하다. 또한 천마도장니는 천마총 출토품 가운데 세상을 가장 놀라게 한 유품이다. 장니란, 말 양쪽 배에 가리는 가리개로, 흙이나 먼지를 막는 외에 장식물로도 사용되었다. 자작나무 껍데기를 여러 겹으로 겹쳐서 누빈 위에 하늘을 나는 천마를 능숙한 솜씨로 그렸는데, 지금까지 회화 자료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던 고신라의 유일한 미술품이라는 데 큰 뜻이 있다. 이 고분의 명칭을 천마총이라고 한 것도 여기에 연유한 것이다. 이 무덤은 지하나 지상에 덧널(목곽)을 짜놓고 그 속에 널과 껴묻거리를 넣은 후 목곽의 위에 돌을 쌓고 그 위에 봉토를 씌우는 특이한 구조이다. 주 부분이 목곽이기 때문에 세월이 지나면 썩고 위의 적석과 봉토가 내려앉아 내부가 노출되기 어렵다. 구조상 합장이 어려워 단독묘가 되며 후장의 풍습에 따라 많은 유물이 부장됨으로써 오늘날 신라의 유물을 많이 접할 수 있게 된 원인이 되었다.

[천마도]  신라(6세기경), 53×75cm, 국립경주박물관 소장(경북 경주시 황남동 천마총 출토). 국보 제207호. 천마총은 1973년에 황남대총의 발굴을 위해 시험발굴을 하여 알려지게된 5세기 말∼6세기 초의 전형적인 단곽식(單槨式) 돌무지덧널무덤이다. 지상에 높이 2m 정도의 덧널을 짜 놓고 그 안에 널을 안치한 후, 이 덧널 위에 높이 약 4m의 돌무지를 쌓고 그 위에 봉토를 덮은 구조로 무덤 전체의 규모는 바닥밑지름 51.6m, 높이 12.7m의 규모이다. 이 무덤은 원래 155호분이라 불리어 왔는데, 천마총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천마도가 그려진 말다래가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이 무덤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제21대 소지마립간(479-499)이라는 설과 지증마립간(500-513)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천마도는 신라의 그림 수준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말다래는 말을 탄 사람의 옷자락에 진흙 등이 튀어 묻지 않도록 말의 배 양쪽에 늘어뜨린 네모난 판인데, 자작나무 껍질로 판을 만들어 중앙에 하늘을 나는 말을 그리고 그 가장자리에 당초문(唐草文)을 돌렸다. 말다래는 가로 75cm, 세로 53cm의 크기이다. 안쪽 주공간에 백마를 그린 것인데 말은 네다리 겨드랑이에서 고사리형 날개가 나오고 길게 내민 혀바람에 나부끼는 갈기와 위로 솟은 꼬리 등이 하늘을 나르는 천마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 천마는 사실적인 그림이 아니고 백색 일색이기 때문에 말의 몸에 힘이 나타나 있지는 않으나 실루엣으로서는 잘 묘사되었고 둘레의 인동당초문에도 각부가 정확한 비율로 구성되었으며 고구려 사신총 등에서 보는 완숙한 당초문에 비해 손색이 없다.


[천마총 금과대(天馬塚金죡聖) : 허리장식]  신라(6세기경)의 허리띠 및 허리 패물. 국보 제190호.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과대(44개) 길이 125 cm, 요패(13개) 최장 길이 73.5 cm인 이 허리띠는 목관 안의 피장자의 허리 위치에서 착용된 채 발견되었다. 허리띠 안쪽에 대어 있던 가죽은 이미 모두 삭아 없어져버렸다. 금허리띠는 44개의 과판(띠를 구성하는 판)과 그 양끝은 띠고리와 고리에 끼우는 부분으로 되어 있으며 모두 13조의 허리장식이 달려 있다. 과판은 구름 모양이 뚫은 무늬로 새겨져 있고, 전면에 9개의 작은 구멍이 뚫려 있어 안에 댄 가죽에 못을 박게 되어 있다. 이 과대는 신라 과대로서는 가장 큰 것이다. 허리 장식은 기본적으로 긴 타원형 금판이 사각형의 연결판에 의해 다섯 개가 연결되어지고, 그 끝에 꼬리장식으로 숫돌 모양, 곡옥, 유리옥, 족집개, 구멍 뚫은 병 모양, 고기 모양 등이 달려 있다. 신라의 금관과 함께 신라의 독특한 장신구이며, 중국 남조(南朝) 양(梁)나라 때의 고분에서도 비슷한 과판들이 발견되었으나 요패수식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구로구입시미술학원


3월 24, 2013

신고전주의 미술 ( Neoclassical Art : 新古典主義美術 )

신고전주의 미술 ( Neoclassical Art : 新古典主義美術 )

신고전주의 대가 다비드의 작품‘마라의 죽음’(1793)

 신고전주의 미술은 18세기 중반에서 19세기 전반 유럽세계를 풍미한 예술양식으로서, 매너리즘에 빠진 바로크·로코코의 인습에 반발하여 고대 그리스·로마 양식으로의 복귀경향을 보여준다. 신고전주의는 합리주의 미학을 바탕으로 고대 예술의 특징인 형태의 이성적인 단순화를 선호하였는데, 이러한 명징성과 질서·이성은 계몽의 시대인 당시의 문화양상과도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고대에 관한 관심은 이미 18세기 초부터 보이지만 특히 헤라크라네움과 폼페이의 발굴, 그리스 소아시아 조사 여행과 더불어 고대문명에 대한 흥미가 고취되었으며 이러한 고고학적 연구성과에 힘입어 대표적인 이론서들이 출간되기에 이르었다. 그 중 오늘날에도 신고전주의의 선언서로 인식되는 빙켈만의 "그리스 미술 모방론"은 고전주의 미술에 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 일으켜 이후 고전 고대 미술 작품에 대한 다각적 연구, 역사적·비평적 고찰이 활발하게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당시 유럽 사회에 이미 로코코의 전통과 낡아빠진 매너리즘에 대한 반작용으로 로마·에트루스칸·이집트·그리스의 영감(inspiration)으로의 회귀 경향이 널리 유포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피라네시는 1748년 이후 간행한 {로마경관도}에서 고대 유적에 근거한 로마의 베투라·이집트· 에트루스크의 고대 건축 도안들을 싣고 있으며, 이집트 미술의 경우 놀던, 포코코, 피라네시 등의 18세기 중반 저술을 통해 널리 알려지고 1748년에는 capitoline 박물관에 이집트관이 개관되기도 하였다. 또 후에 크게 유행하게된 그리스 미술에 대한 취향은 댈튼, 로이 스튜어트, 찬들러 등의 저술을 통해 고취되었다.
 발생 초기부터 유럽 전역에 걸쳐 국제성을 획득한 신고전주의는 명료한 이론을 이루어냈는데, 대표적인 신고전주의 이론가로는 맹그스와 밀리지아, 앞서 언급한 빙켈만을 들 수 있다. 먼저 맹그스는 그의 {회화에 있어서의 美와 양식에 대한 고찰} (Gedanken uber die Schouheit und Geschmack in der Malerei, 1762년)에서 美를 관념의 완벽한 표현이며 그 관념은 思考에 의해 마음 속에 존재하는 표현이라고 하였다. 나아가 '회화실기수업' 강의에서 '진정한 예술'이 되기 위해 회화는 일정한 방법과 고정된 규칙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빙켈만에게서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나, 그는 미의 근본적인 원칙은 정확한 비례와 단순함 속에서 배려된 다양함을 동반한 '통일'과 '단순성'이라고 정의하였다. 또 작품은 개성이나 특정 상태의 심리를 드러내어서는 안되며 내부의 평온함이 구체적인 구성과 외부정신의 표현으로 반영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한편 밀리지아는 건축도시계획에 있어 선구자적인 생각을 해낸 인물로서, 단순한 그리스 모델의 '모방'이 아닌 '그리스인들의 자연관' 자체를 따를 것을 주장하였다. 그에게 있어 이상적인 미는 보다 철저한 연구와 상상력이 요구되는 선택적인 과정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었다. 특히 건축이 완벽함을 얻기 위해서는 첫째, 균형·조화·적합성 추구, 둘째, 안락함 추구, 세째, 견고함 추구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건축에 있어 자연스러운 단순함, 이성의 법칙을 요구하는 신고전양식은 건물의 '이성'을 추구, 방 배치에 있어서의 명확성·새로운 비율·형태의 간결성·부분의 조화·윤곽선과 표면의 매끈함 등을 특징으로 한다. 고대 그리스·로마 건축이 가장 집중적으로 연구되면서 도리아 이오니아 코린트식 기둥이 많이 사용되었으나 단, 합성된 것은 배제하였다. 로마의 파르테논 신전을 연상시케는 건물, 돔(dome)구조, 삼각 아치나 기념주, 정원 건축이 유행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 영국의 로버트 아담 윌리암 챔벌즈, 프랑스의 수플로, 독일의 쉰켈 등을 들 수 있다. 그 중 영국에서는 주로 그리스·로마양식의 두 경향이 공존하고 있었는데, 로버트 아담의 <호움하우스>(1772-1773년)의 객실은 로마의 치장벽토 장식을 채용함으로써 로코코 건축 내부의 섬세함을 간직하고 평활한 평면이나 대칭성·기하학적 정확성에 독특한 신고전주의적 주장을 보이고 있다. 이밖에 토마스 해밀턴의 <에딘버러 중학교>는 그리스 양식을 간직하고 있으며 윌리암 챔벌즈의 <서머셋하우스> 등이 유명하다.
 프랑스의 경우 최초의 기념비적인 신고전주의양식의 건물로 수플로(Jaque Germain Soufflot, 1713-80)의 걸작 <팡테옹>(생 즈느비에브 성당, 1755-1792년)을 들 수 있는데, 차갑고도 명확한 외관을 가진 이 건물의 주랑현관은 고대 로마의 신전에서 따온 것이었다. 이에 비해 가브리엘의 <트리아뇽 성>은 그리스 건축에 비견될 수 있으며 빅터 루이의 극장은 19세기 극장의 모범이 되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도래한 제정시대의 건축-샤루글랭의 방돔(Vendome)궁전, 개선문 등-은 19세기초 프랑스의 '제정(Empire)양식'을 보여주는데, 이는 나폴레옹에 의해 이상으로 여겨진 고대 로마 건축의 재현을 기도한데서 생긴 양식이다.
 불레(Etienne-louis Boullelee, 1728-99)와 그의 제자 르두(Claude Nicolas Ledoux)는 이 시대의 탁월한 건축가들로서, 환상적 건축(visionary architecture)의 전통을 창조하는데 이바지하였다. 블레의 이상은 '장엄한 고귀성'을 가진 건축, 거대하고 단순한 괴체를 결합함으로써 이룩하고자 한 효과에 있었다. 그러나 그의 설계의 대부분은 그 규모가 지나치게 큰 것이어서 오늘날에 있어서도 거의 건립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는 球體를 완벽한 형태라고 했다. 어떠한 원근법상의 트릭도 球體적 외모를 변형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우주를 반영하는 아이작 뉴우튼 기념관을 설계했다. 블레와 그 후계자들은 19세기에는 거의 잊혀져 있다가 20세기 초에 재인식되어 '생각해볼 수 없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되었다. 독일의 대표적 건축가인 쉰켈은 그리스 양식의 <베를린위병소>(Hauptwache), <베를린 왕립극장>(Schauspielhaus) 등을 설계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그리스 양식을 정확이 인식, 그 가치를 충분히 발휘하고 있다.
 엄격하고 단순한 규칙들은 적용하는 이러한 건축개념은 점차 그 힘과 영향력이 전세계적으로 퍼지고 있던 '이성'의 옹호자들에게 강한 공감을 불러 일으키면서 미국의 건국 공로자의 하나인 제퍼슨같은 사람은 몬티첼로 있던 자신의 저택을 이러한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설계했고 각종 관공서가 있는 워싱턴 시가 '그리스 복고'양식으로 계획되었다. 그의 제자인 라트로브(Benjamin Latrobe, 1764-1820)의 <볼티모어 대성당>은 신고적주의 양식을 채택하되 고딕양식이 적극적으로 도입된 건물이다. 성당의 내부는 고대 로마의 돔(dome)과 궁륭이 덮인 공간(vaulted spaces)에서 따온 것이지만 외부는 고딕 바로크계의 종탑을 가지고 있다. 결국 이 건물은 신고전주의 양식의 자유롭고도 상상력이 풍부한 표현을 나타내주고 있는 것이다.
 조각 역시 고대조각에 주어진 범례에 압도되고 있었으며 가장 성장한 분야는 초상이었다. 먼저 우동(Jean Antoine Houdon, 1741-1828)의 작품 <볼테르>(1808년)는 모델의 날카로운 기지와 통찰력 있는 지성, 위대한 정신의 깊은 동정심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으며, 고전적 의상도 어설픈데가 없다. 한편 이탈리아의 유명한 조각가 카노바(Antonio Canova, 1757-1822)는 神과도 같은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 나상으로 제작된 고대 지배자들의 초상을 본떠서 거대한 나폴레옹상을 제작했으며 극히 명백하게 이상화된 <비너스 모습의 파울리자 보르게제>(1808년)를 조각했다. 이 작품은 정면과 후면만을 고려해서 만든 일종의 '환조의 부조'이며 전체에 걸쳐 흐르는듯한 윤곽선의 우아함은 이 작품의 매력을 더해주고 있다.
 회화에 있어 신고전주의 양식의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다비드(Jacque Louis David, 1748-1825)의 경우, 초기 작품에는 18세기 프랑스의 관능적인 로코코 취미가 잔존하고 있었으나 1775-1871년 로마유학 시기 이후 신고전주의화풍을 발전시켰다.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1785년), <소크라테스의 죽음>(1787년)은 푸생적인 요소-즉 구도는 화면과 평행해서 부조와같이 전개되며 인물은 彫像과도 같이 확고하고 부동의 느낌을 준다-뿐 아니라 예리하게 집중되어 정확한 음영을 이루는 채광법은 카라밧지오에게서 따온 것이다. 이 그림은 새로운 이상적 양식을 보여주는 동시에 삶의 생생한 모습을 담고 있다. 그는 프랑스 혁명 시기 그의 최고 걸작품인 <마라의 죽음>(1793년)을 그렸다. 프랑스혁명의 지도자중 하나였던 마라를 기념하기 위한 이 그림에는 헌신적인 심상과 역사적인 설명이 함께 녹아 있다.
 다비드는 '미술이란 자연을 가장 아름답게, 완벽하게 모방하는 것이며 미술작품의 목적은 눈을 즐겁게 해줄뿐 아니라 영혼 속에 파고들어 현실 그 자체에서 얻어지는 인상을 마음속에 새겨준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나폴레옹 대관식>(1805-7년)에서는 이전의 차가운 색, 엄격한 역사화 구성에서 벗어남으로써, 낭만주의 양식을 암시해주고 있다. 한편 그의 제자 앵그르(Jean-Auguste Dominique Ingres, 1780-1867)는 <루이 베르탱>(1832년)과 같은 작품에서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에서와 같은 엄격한 리얼리즘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의 유채화는 강조와 비례와의 미묘한 변화에 의해서 엄중한 개성의 힘을 모델에 부여, 내면적 깊이와 외면적인 정확성의 통일을 이루고 있다. 그의 후계자들이 외관의 정확성에만 몰두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는 심리적 측면을 놓치지 않았음이 주목된다. 그밖에 이탈리아에 있어서는 로마의 Vincenzo Camuccini의 <시저의 살인>과 <버지니아의 죽음> 등이 유명하며 밀라노의 Andre Appiani는 초상화가로 유명하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고전주의 양식은 18세기 중후반 유럽 등지에서 순수하고 단순한 형태로 발전, 1)19세기 아카데미즘 예술의 기본 원리로서 오래 이어졌으나 그 영감(inspiration)을 상실, 기계적인 모방과 무의미한 복제로 나가면서 먼 고대나 이국에 대한 뜨거운 동경과 관능적인 경향으로 기울어짐에 따라 2)낭만주의 예술의 선구자로서의 구실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앞서 라트르보나 다비드의 예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는 명확하게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연속선상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건축에 있어 미국의 경우 1922년 완성된 링컨 기념관에서 보듯이 독립전쟁 이후 신고전주의 양식이 명맥을 이어오고 있었으며, 러시아에서는 1930년대에 슈코와 겔프라이히의 <레닌도서관>, 랭그만(Langman)의 <국무회의를 위한 건물>, 슈세프(Schusev)의 <모스크바 호텔>, 알비얀(Albyan)의 <붉은 군대 극장> 등 많은 건물들이 신고전주의적인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특히 이탈리아나 독일에서는 각각 파시즘과 나치즘이라는 정치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신고전주의 양식은 '위엄'을 표현하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변모되어갔다. 뭇솔리니는 '고대 로마의 위대함을 상실케 하는 평범한 건축에서 탈피하고 고대 로마의 모든 위대한 건축물들의 보존에 힘을 기울여야 하는 동시에 20세기의 기념비적인 로마를 창출해야한다'고 역설하면서, <로마 만국박람회>와 같은 대규모의 신고전적 기념물을 건설하였다. 한편 독일에서는 그로피우스(Gropius)와 미스(Mies), 바우하우스(Bauhaus) 등으로 대표되는 국제주의양식이 개발되고 있었으나 히틀러의 건축 취향은 나폴레옹과 같은 신고전주의적인 것과 토속적인 것이었다. 독일의 신고전주의적 건물로서, 트루스트가 설계한 뮌헨의 <독일미술관>은 쉰켈의 <알테스 뮤지엄>에서 사용한 양식에서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밖에 스피어의 <독일수상관저>(베를린), <런던주재 독일대사관>등을 들 수 있다.
 회화에 있어 신고전주의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특히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지에서 성행하였으나 독일에서는 실제 작품보다는 이론적인 면에서 더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스웨덴의 경우 다비드 신고전주의회화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러시아에 있어서는 -특히 '러시아 미술아카데미'(Russian Academy of Fine Arts)의 설립 이후- 프랑스 이탈리아의 신고전주의가 러시아의 초상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인 화가로 Alexander Ivanov, Karl Briullov 등을 들 수 있다. 미국의 신고전주의는 역사화에서 특히 두드러지며, 유럽의 신고전주의는 라틴 아메리카에까지 퍼져 멕시코의 Rafael Ximeno y Planes, 아르헤티나의 P. Pueyrredon등이 있었다. 또한 신고전주의 미술은 19세기 중반 '라파엘로 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로 이어진다.
 한편 신고전주의회화 내부에 잠재되어 있던 낭만주의적인 요소는 이미 인습화·형식화로 기울던 신고전주의 회화에 반발하면서 화려한 세계와 환상의 세계, 동적인 세계를 표현하고자 하였다. 회화에 있어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경향은 거의 동시에 일어나고 있었는데, 예를 들면 다비드와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고야 (Francisco Goya, 1746-1828)는 <거인>(1820년경)에서와 같이 환상적인 주제를 채택, 화려한 색채를 거부하지 않고 작품을 제작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에 와서 더욱 신비주의적으로 흘러 <太古>(1794년)와 같은 환상적인 작품을 남겼다. 터너 역시 <폭풍 속의 증기선>(1842년)처럼 빛으로 가득차고 눈부신 아름다움을 지닌 세계를 그렸다.
 고대의 유물과 예술품들을 소개하는 학자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카일루스의 『고대 이집트, 에트루리아, 그리스, 로마, 갈리아 지방의 유적 목록집』이나 피라네시의 『로마의 위대성』『로마의 유적』등은 그 중 대표적인 것들이다.
 이 운동의 미학적 근거를 이룬 사람은 독일의 예술사학자 빈켈만이며, 대표적 예술가로는 화가 멩스를 들 수 있다. 그는 이 운동의 본부격이라고 할만한 로마에서 자신의 스튜디오를 만들어 이 새로운 이념을 전파하는 국제적인 사교장으로 사용하였다. 멩스는 자신의 명성은 라파엘로, 코렛지오, 티티안등 대가들의 수법을 사용하고 조용한 단순성과 고귀한 위풍이 적절히 표현된 고대의 모범들의 제 요소에 기초해 이른바 그랜드 매너를 추구한 덕분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실제 조각에서는 멩스 자신의 작품「파르나수스」라든지 그의 절친한 친구들 - 가뱅 해밀튼, 요셉-마리 비엥등 - 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무미건조하고 인공적인 양식이 등장했다. 이러한 작품들은 빈켈만의 사상과 이론에 영향을 받은바가 컸다.
 멩스와 마찬가지로 빈켈만도 현대 예술은 모름지기 고대의 조각이 이상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바와 자연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고대 예술에서 발견되는 도덕적 품성, 즉 명성을 구하는 모든 예술가들에게 기본적으로 필요한 도덕적 품성을 특히 강조했다.
 프랑스에서 신고전주의 운동은 로코코양식의 번잡스러움에 대한 일종의 반발, 루이 14세 시기의 그랜드 매너에 대한 향수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났다. 사회의 제반 혁명적 변화나 시민사회의 삶 속에 고대 로마적 덕성들을 세워보고자 하는 욕구등이 이 운동과 관련되어 있다. 대표적인 화가로는 자크 루이 다비드가 있으며 그의 작품 「호라티의 맹세」 「레카미에부인의초상」 등은 신고전주의 정신을 잘 나타내고 있다.
 신고전주의는 건축에서도 충분히 발현되었는데 영국의 아담 형제, 독일의 랑한스, 프랑스의 장-프랑스와 샬그랭, 알렉산드르 테오도르 브로냐르, 클로드 니콜라스 르두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조각가로는 이탈리아의 카노바와 토발트센등이 활발하게 활동했다.
 신고전주의 운동은 미국으로도 전해져 조각가 히램 파워스, 호레이쇼 그리너프, 화가 존 반델린등이 등장했다. 신고전주의는 고대의 모범들을 신중하고도 의식적으로 모방한다는 점에서 그전에 간헐적으로 일어났던 고전 부흥 운동과는 사뭇 달랐다.
 근대사회의 출현과 더불어 시작된 신고전주의 미술은 이와같이 그 발생에 있어 당시의 역사적·사상적·학문적 배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으며 유럽 전역에 걸쳐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 19세기 이후 미술 전개에 또 하나의 배경을 이루게 된 것이다.

앵그르 ( 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 1780.8.29~1867.1.14 )
 프랑스의 화가. 몽토방 출생. 19세기 프랑스의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16세 때 파리로 나와 당시 화단의 중진으로 명성을 떨치던 J.L.다비드에게 사사하였다. 1801년 《아가멤논의 사절들》로 로마대상을 받고 1806~24년에는 이탈리아에 체류하면서 고전회화와 르네상스의 거장 라파엘로의 화풍을 연구하였다. 로마 체재 중의 대표작으로는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목욕하는 여자》 《유피테르와 테티스》 《라파엘과 포르나리나》 등을 꼽을 수 있다. 한편, 초상화가로서도 천재적인 소묘력과 고전풍의 세련미를 발휘, 많은 작품을 남겼으나, 본국인 프랑스에서는 그리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1824년 파리로 돌아와 살롱에 출품한 《루이 13세의 성모에의 서약》으로 이름을 떨치면서부터는, 들라크루아가 이끄는 신흥낭만주의운동에 대항하는 고전파의 중심적 존재가 되었다. 1834년 로마에 있는 프랑스 아카데미의 관장으로 다시 이탈리아에 갔다가, 1841년 파리로 돌아왔다. 이 무렵의 대표작으로는 《나폴레옹 1세 예찬》 《잔다르크》 《샘》 《터키 목욕탕》 《박사들과 함께 있는 예수》 등을 비롯하여 《앵그르 부인》 등 많은 초상화가 있다. 그의 작품은 초상화·역사화, 특히 그리스조각을 연상케 하는 우아한 나체화에서 묘기를 발휘하였으며, 현재 루브르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오달리스크》 《샘》 《발팽송의 욕녀》 《호메로스 예찬》 《리비에르부인상》 《베르탱씨의 초상》 《자화상》 등은 19세기 고전주의의 불멸의 명작으로 꼽히고 있다. 앵그르의 영향은 후대에까지 미쳐, 드가, 르누아르, 피카소 등도 한때 그의 감화를 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다비드 ( Jacques Louis David : 1748.8.30~1825.12.29 )
 프랑스의 화가. 파리 출생. 19세기 초 프랑스 화단에 군림하였던 고전주의 미술의 대표자이다. 1774년 당시의 화가 지망생들이 동경하던 로마상을 획득하고, 이듬해부터 1780년까지 로마에 머무르면서 고전미술을 연구하였다.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Oath of the Horatii》(1784)의 스타일은 그의 고전연구의 성과를 나타내는 명작으로, 당시 점차 높아지기 시작한 애국사상의 뛰어난 표현으로서 일약 유명해졌다. 프랑스 혁명 당시 자코뱅 당원으로서 혁신측에 가담하여,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하자 투옥되었다. 그렇지만 후에 나폴레옹에게 중용되어, 예술적·정치적으로 미술계 최대의 권력자가 되어 화단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앵그르, 그로, 제라르를 비롯하여 19세기 중엽에 활약한 고전파 화가들은 모두 그의 밑에서 나왔다. 역사적 주제를 그린 작품은, 18세기 로코코 미술의 우아·섬려한 것에 비해, 고대조각이 지니는 조화와 질서를 존중하고 장대한 구도 속에서 세련된 선에 의하여 고대조각 그대로와 같은 형태미를 만들어내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형식적으로는 잘 다듬어진 대구상화(大構想畵)이긴 하지만, 다소 생동감이 결핍되어 있다. 이와는 달리 초상화에서는 고전적인 형식미 속에서 사실적인 묘사력을 충분히 살려 참신한 느낌이 약동하고 있다. 나폴레옹 실각 후 추방되어 1816년 브뤼셀로 망명하였고,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였다. 그 밖에도 《마라의 죽음》(1793) 《사비니의 여인들》(1799) 《나폴레옹의 대관》 《레카미에부인의초상》 등의 대표작이 있다. 또 《라부아지에 부처상(夫妻像)》(1788)과 같은 초상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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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각요판 (Aquatint)

식각요판 (Aquatint)

고야 (Goya) (1799)

  이 기법은 광범위한 명암도와 색조를 제공한다. 이 기법에서는 열처리 되기 전의 판의 수지(Colophony)와 역청(Bitumen)을 이용한다. 수지와 역청은 산이 퍼져 금속을 부식시키는 과정을 통해, 마르면서 작은 구멍을 형성하는 특성이 있다. 이에 의해 낟알 모양의 결과물이 얻어지며, 그 색조는 산성 용액의 지속 정도에 따라 백색에서 흑색까지 다양하다. 화이트나 블랙으로 매겨지는 금속판의 여러가지들을 얻기위한 과정, 금속은 이것을 부분적 으로 보호하는 작은 투명 미립자를 형성하기 위한 열 작용하에서 결합된 가루수지에 의해 덮혀져서 어떤것은 규칙적으로, 어떤것은 좋게, 도돌도돌하게 되어있다. 판은 그 이후에 미립자 사이 사이가 급속 부식제에 부식된다. 강도의 진가는 산에 계속 가라 앉혔을 때와 미립자 크기에 달려있다. 따라서 미리 계획된 기간하에서 반복하면서 계속 일할수 있고 충분히 부식된 곳을 보호할 수 있다. 가루 아스파탕 또한 판을 그레인(도돌하게 만들기, 나뭇결로만들기)하는데 사용 한다. 판을 가열하지 않고 아쿠아틴트를 얻기 위해선 스프레이 페인트나 액체 아스파탕을 에어 브러쉬로 써서 사용해야한다. 명암을 기묘하게 바꾸기 위해 다양한 형판을 사용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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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티메팅 페이팅 ( Systimetic painting )

시스티메팅 페인팅 ( Systimetic painting )

앤디 하퍼

 하나의 비구상적인 형태를 반복해서 그리는 것으로, 화가가 화면 구성의 일관된 시스템을 표현하려는 회화. 미니멀아트의 일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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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인드 그라스 ( Stained Glass )

스테인드 그라스 ( Stained Glass )




 미술재료 가운데 하나인 '색유리'를 가르키는 말. 유리그림, 즉 유리화이라고도 지칭. 스테인드 글라스가 유리화라는 개념이 강한것은 색유리를 재료로 하여 창작한 예술품 가운데 유리화의 비중이 가장 크기 때문일 것이다.
 금속산화물을 녹여 붙이거나, 표면에 안료를 구워서 붙인 색판 유리조각을 접합시키는 방법으로 채색한 유리판. 착색에는 구리·철·망간과 같은 여러 가지 금속화합물이 이용되며, 세부적인 디자인은 갈색의 에나멜유약을 써서 표현한다. 색유리를 창이나 천장에 이용하기 시작한 것은 7세기경 중동지방에서 비롯되었으며, 이슬람건축에는 대리석판에 구멍을 뚫어서 유리 조각을 끼워, 채광과 장식을 겸하는 방식을 많이 이용하였다. 서구(西歐)에는 11세기에 이 기법이 전해졌으며, 12세기 이후의 교회당 건축에서 이 예술은 본격적으로 발달하였다. 특히 고딕건축은 그 구조상 거대한 창을 달 수 있으며, 창을 통해서 성당 안으로 들어오는 빛의 신비한 효과가 인식되어, 스테인드글라스는 교회당 건축에 불가결한 것으로 되어 큰 발전을 해 왔다.
 신의 속성으로서 위대함(Magnitudo), 영광스러움(Claritas),조화로움(Propotio)을 고딕시대의 3대 미적 관점이라고 한다면 이 시대 대표하는 성당 건축은 바로 신의 속성을 지상에 드러내 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건축물 안에 설치된 스테인드 글라스는 곧 빛으로 상징된 신의 영광스러움과 그 명료성을 시사한 것이다. 인간 내면의 세계를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요소를 빛이라 규정한 헤겔의 말처럼 빛은 신적인 것의 물질화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시각체험을 구성하는 3가지 조형요소를 빛, 색채, 형태라고 할 때 특히 회화에서의 빛은 색채와 결합하여 형태의 변화와 깊이를 좌우한다. 그러나 다른 장르와는 달리 스테인드 글라스는 자연광의 무한한 변화가 투명한 색유리를 통하여 나타나는 것으로서 빛이 색채 속에 구현되어 불가사의한 변화와 신비를 창출해내게 된다.
 중세 그리스도교의 무명장인으로부터 시작하여 13세기 고딕시대에 절정을 이루고 6백년의 휴지기간 후 19세기 아르누보(Art Nouveau)작가들에 의해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했으며 20세기 전후 독일을 중심으로 하여 새로운 의미에서 본격적인 발전을 이룬다.
 20세기의 스테인드 글라스는 교회건축이라는 한정된 범위를 넘어 현대미술과 현대건축, 현대의 다양한 기법과 소재의 테크놀러지가 접목하여 조형예술 전반에 걸쳐 이용되기에 이르렀으며 그 어느 시대보다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룩하였다.
 프랑스의 샤르트르대성당, 르망대성당, 영국의 요크 및 캔터베리 같은 여러 성당의 것은 12∼13세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유명하다. 현존하는 것으로는 독일의 아우크스부르크성당에 있는 예언자 다니엘상을 나타낸 스테인드글라스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1065년 또는 12세기 전반이라고도 함). 일반적으로 초기의 것은 유리의 질이 고르지 못하여 착색에 얼룩이 지고, 섬세한 표현이 잘 안되었으나, 광선의 투과·굴절에 미묘한 변화가 있어서 오히려 매력을 더하고 있다. 14세기 이후 유리의 제작기술이 향상되어 세부적인 표현이 잘 되게 되었으나, 이는 오히려 표현이 그림과 같이 되어 초기의 유리가 나타내는 독특한 미가 없어졌다. 19세기 후반 W.모리스, V.존스 등의 예술운동을 계기로 해서 중세기의 스테인드글라스의 미가 재인식되고, 다시 20세기에 들어와서는 F.레제, 마티스, H.루오 등이 현대건축에 스테인드글라스를 활용하게 되었다.

*어원
 영어의 stained라는 어휘는 원래 '끈적끈적한 핏자국이 있는'이라는 의미였으나, 후에 '더럽히다, 착색하다, 채색하다, 달구어 녹여 붙이다'라는 어의로 발전했다. 따라서 stained glass란 '유리에 그림을 그려서 녹여 붙인 것'이라는 의미이다. 한편 독어의 Glasmalerei는 '유리'의 뜻을 지닌 glass와 '그림'의 뜻을 지닌 malerei의 합성어이며, 불어의 Vitrail은 '판유리'를 뜻하는 Vitre와 '납틀'을 의미하는 aile의 합성어이다. 스테인드 글라스란 어원분석을 통하여 볼 때 '여러가지의 금속 산화물질에 의하여 착색된 투명, 또는 반투명의 유리단편을 봉합체 납틀이나 동테이프로 결합하여 만들어낸 장식과 그림의 표현'이라고 정의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그리스도 교회 공간과 함께 하는 미적표현 방법으로 고유명사화 되었다.

*성분
 스테인드글라스의 색유리는 투과된 빛에 의해 보이는 단순한 색유리로 생각되지만, 하나의 색유리는 규석분, 장석, 석회석, 아비산, 안티몬, 산화크롬, 산화니켈, 형석 등 11~12가지 낱낱의 금속산화물질의 혼합체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와 같이 색유리는 화학합성 물질이며 이것은 1450~1500'c로 가열하여, 유리질속에 색채가 흡수된 색유리이기 때문에 퇴색되거나 변색되는 일이 거의 없다. 따라서 그 유리의 생명은 거의 영구적이어서 중세시대의 화려하고 신비스러운 색채가 오늘날까지도 경이롭게 빛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스테인드 글라스의 색채는 어둠과 밝음의 공간에 빛의 시간적 변화,즉 빛의 강약, 빛의 좌우.전후.상하 방향에 따라 신비한 변화를 보여주며, 동시에 색유리의 면적과 두께에 따라 투영되는 빛이 각양각색을 이루어 가볍고 밝은 빛에서부터 무겁고 심오한 빛에 이르기까지 일대 색채의 교향악이 연출된다.

*제작 기법
 금속산화물이 포함된 색유리를 조각조각 붙이기 위하여 가장 많이 사용하는 전통적인 납틀(Leaded glass) 기법은 규모가 넓은 공간에 이용되는 대표적인 방법이다.
동(銅) 테이프(Copper foiled glass) 기법은 실내장식이나 공예품 등과 인공 조명을 함께 이용할 수 있는 기법이다.
 평판 유리(Faceted glass)나 유리 벽돌 기법은 현대 건축의 재질적 변화에 따라 발전한 방법이다. 유리벽돌 기법은 보석 같은 25mm 두께의 유리를 콘크리트에 파묻혀 있게 하는 방법인데 이 재료는 납틀을 붙인 유리보다 더 단단하므로 현대적인 건축 구조에 어울리는 벽을 만드는 데 사용한다.
 이것은 납틀 대신에 사용하는 폴리에스털 수지나 합성수지인 에폭시 수지, 시멘트 등으로 접합하여 만들거나 조각과 설치물, 건축 디자인 등에 응용하거나 입체화 또는 벽체화할 수 있다. 최근에는 합성수지나 에폭시수지에 안료를 혼합한 뒤 비닐 병이나 튜브에 넣어 일반 투명 유리 위에 짜서 경화시켜 스테인드 그라스를 흉내낸 방법도 등장했다. 이것은 서로 다른 팽창률이나 수지 자체의 약한 내광성으로 인하여 수개월 이내에 깨어지거나 유리 면에서 분리될 수도 있으므로 영구적인 건물에 제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한편 그라스 페인팅은 유리에 직접 그림을 그리거나 모자이크 방법의 납틀 기법에서 표현할 수 없는 미세한 표현에 응용하기도 하며 유리의 투명성을 조절하거나 빛을 차단하는 효과를 내기도 한다.
 그라스 페인팅에 사용되는 안료나 미디엄은 특별한 재료를 이용해야 한다. 여기에는 열경화성 아크릴수지계 미디엄으로 만든 물감을 사용하는 것이 좋고 내광성이 우수한 안료를 선별해서 사용하면 금상첨화이다.
스테인드 그라스는 사진과 같이 색상이나 무늬가 다양하게 제조된다. 투명 색유리가 있는가 하면 반투명 또는 불투명한 색유리도 있다. 빛의 투과에 의한 최상의 굴절 효과를 표현하기 위해서 굴절각이나 투과력 등에 대한 세심한 분석이 필요하다. 따라서 제작자는 스테인드 그라스의 주제나 표현 기법이 결정되면 다음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 좋다.
1. 건물 내부의 창문의 위치에 따른 빛의 양과 떨어지는 방향을 분석한다. 자연 채광은 시간에 따라 밝기나 방향이 다르므로 최적의 시간대를 결정하여 그에 상응하는 효과를 내도록 하고 방위 따른 채광 효과도 계획한다.
2. 어두울수록 색유리의 광채가 빛나므로 실내 밝기 조절과 야간 조명에 의한 색 채 효과를 예상한다. 스테인드 그라스는 실내에서 감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야간에는 실내의 인공 조명에 의한 외부 감상에 대한 배려도 잊지 말아야 한다.
3. 빛이 색유리를 투과해서 일어나는 굴절 효과가 다양하므로 색유리의 특성을 파 악하고 그에 따라 색유리와 같은 재료나 제작 용구를 준비한다.
4. 폭우나 자연 재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한 다. 조각난 색유리의 틈새로 빗물이 누수 되면 겨울철 결빙으로 인한 팽창으로 접 합 부위가 파손되거나 색유리 자체가 깨 어질 수 있으므로 방수와 방음에 대한 계획도 뒤따라야한다.

채색 유리 모자이크
 유리 모자이크는 유리면에 내광성이나 내구성이 강한 물감으로 채색을 한 후 조각조각 붙여서 만든다. 비교적 재료 구입이 용이하고 제작방법이 손쉬워 공동으로 제작하면 그 진가가 발휘된다.
1. 재료와 용구
1) 깨진 유리 조각이나 유리판(투명 유리나 반투명 유리, 요철이 있는 유리 등)
2) 유리 칼
3) 채색 물감과 용구
4) 접착제(초산비닐 수지 와 아크릴 미디엄)
5) 분말 석고
6) 채색 유리를 담을 상 자

2. 제작 과정
1. 벽면이나 견고한 패널을 준비하고 바탕 처리를 한다. 수성 페인트로 도색된 시멘트 벽면은 거친 사포나 그라인드로 겉 재질을 벗겨 내는 것이 좋다.
2. 밑그림을 간결하게 그린다. 조각난 면을 붙이므로 밑그림이 단순한 것이 좋으며 장차 붙이게 될 색상과 면적을 계산해 둔다.
3. 채색 유리를 만든다. 유리판에 묻은 물질을 깨끗하게 닦아낸 후 습기를 제거하고 채색하게 될 페인트를 준 비한다. 원화에 의한 색보다 10% 정도 큰 유리 면적에 붓으로 채색한 후 건조시킨다.
4. 유리칼로 필요한 크기만큼 자른다. 유리 칼은 유리면 위에 경쾌하게 그어서 흰 선 자국을 남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다. 자른 채색 유리는 색상별로 상자에 담아 둔다.
5. 초산비닐수지 70%에 아크릴 폴리머 에 멀션 30%를 혼합한 접착제를 만든다. 초산비닐 수지만을 사용하여 붙이면 연성이 부족하여 수년 후 깨어지거나 이탈 현상이 생겨날 우려가 있음에 유의한다.
6. 물감으로 채색된 면에 접착제를 바르고 압착하여 붙인다. 조각난 유리를 벽면에 압착할 때는 접착제가 약간 밀려나올 정도의 두께로 바르는 것이 좋다. 밀려나온 접착제가 유리 두께보다 높을 경우에는 닦아 낸다.
7. 틈새를 메운 후 굳히면 석고의 흰색 선이 강하게 나타날 수 있는데 물감으로 채색하여 색을 바꾸어 준다. 틈을 메우는 재료는 5항의 접착제에 3-4배 정도의 물을 희석하여 접착액을 만든 후 분말 석고 60%∼70%에 접착액 30%∼40%를 혼합하고 물로 농도를 조절하여 사용한다.
8. 왁스로 닦아 내면서 완성한다. 왁스는 틈새의 기공을 막는 방수 기능과 유리면의 이물질을 제거하여 선명함을 더하게 된다.

*고딕시대의 스테인드글라스 기법의 발전
 크고 많은 창을 처리하기 위하여 당시의 성직자나 예술가들은 스테인드글라스 창과 같은 아름답고 화려하며 신비한 회화적 공간을 마련함으로써 건축의 미적효과를 증대시켰다. 고딕 시대에는 양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괄목할 만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13세기에 발생한 그라자이유(grisaille)창은 화려한 색채보다도 빛과 디자인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이는것으로서 14세기에는 세련도를 더하여 프랑스에서 크게 성행하였다. 또한 14세기초 프랑스에서 기술 상 진보라 할 수 있는 은착색법(silver stained method) 이 창안되었는데, 이는 평판유리에 옅은 황색으로부터 점차 짙은 색에 이르는 여러 가지 황색계의 음영을 표현하는 것이다. 또한 색채의 범위를 보다 폭넓게 하고 보다 빛나게 하기 위하여 이중으로 색유리를 덮은 베르 두블레(verre doubl e) 혹은 플래쉬드 글라스(flashed glass) 기법이 14세기에 발명되었다. 이와 같이 고딕시대에는 스테인드글라스의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당시의 뛰어난 감각을 지닌 예술가들에 의하여 유리의 다양한 색소 발견과 기술적 발명이 이루어져 오늘날까지 전래되고 있다.

*장미 창 1260년경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원형의 장미 또는 바퀴의 창은 인간의 가장 신성한 상징 중의 하나로 나타난다. 선사시대 초기부터, 다양한 형태에서 원은 의식에 사용되왔다. 신석기시대 회화에는 태양이 있었고, 태양의 원은 많은 제사에 의해 숭배되었다. 영원의 상징으로 원은 기독교에서 지속되었고, 원 또는 만돌라는 아시아의 신비주의에서 중요한 것이었다. 융(Jung)은 "인간과 상징"이란 그의 책에서, 만돌라의 가장 화려한 예의 일부로서 장미창을 묘사했고, 유럽.기독교 전통에서 우주와 그 자신에서 영원한 것에 대한 인간의 지각을 표현한 것이라 하였다. 또한 원은 기하학의 기본이고, 모든 호와 구획을 포함하는 것으로부터의 출발점이라고 했다.
 로마네스크 시기의 공통된 바퀴모양 창은 가장 초기의 장미창이다. 그들은 작고, 둥근 창이고, 바퀴와 같은 효과를 주면서, 박공이 건축에서 석공과 가장 큰 평면에 유리직공을 주기 때문에 서쪽문에 위치했고, 차바퀴의 살과 같이 중심으로 뻗어 나온 것은 석재 트레이서리로 되어있다. 초기 예중 하나는 12세기 바빌라의 산 베드로(San Pedro)성당 서쪽 파사드에서이다. 고딕 트레이서리에 발전에 따라, 석재의 패턴이 원형창에 줄무늬를 짓는 것이 더욱 정교해져서, 많은 꽃잎을 단 불꽃모양으로 꽃의 이미지 형태로 전개해갔다.
 샤르트르의 장미창은 13세기 초기의 것으로서 원들로 배열된 플래이트 트레이서리로 되어 있다. 이 트레이서리는 13세기 중반에 랭스 성당에서 바 트레이서리로 바뀌게 된다. 노트르담의 장미창은 샤르트르와 랭스 성당의 중간시기에 위치하여, 플레이트 트레이서리임에도 불구하고, 섬세하고 복잡한 배열을 보여준다. 이 장미창은 그 형태가 원형으로 중심에서 사방으로 그 빛이 퍼져나가는 태양을 닮아, 빛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에 비유되고 있다. 저녁나절 해질녁에 서쪽의 거대한 장미창을 통해 비쳐들어오는 빛은 오색영롱한 색채의 향연을 연출하여 성당 내부를 신비의 빛으로 가득 찬 기적의 공간으로 바꾸어 놓는다. 크기와 색채 의 배합에 있어 차이는 있으나 이와 같은 장미창은 모든 고딕 양식 교회들의 중요한 장식적 요소가 된다.
 랭스 장미창의 바 트레이서리는 고딕 건축에 창문내기에 마지막 해결책이 었다. 이것은 아미엥과 후기 고딕성당에서 이용한 시스템이 되었고 또한 이 장미창은 자주색, 노란색의 많은 사용으로 더욱 화려해지게 되었다. 대부분 장미와 바퀴모양창에 형상은 연결 트레이서리의 방사되는 선에 의해 종속된다. 그러나 14세기에 이탈리안 눈창 은 석재 트레이서리가 없는 창의 유리 패널 중앙점으로부터 방사되어 나오는 철구조에 의해 지탱되거나, 수직 또는 수평의 막대기에 의해 배열된다. 창들의 원형은 추상적인 경계에 의해 강조되지만, 중심구성은 원형에 적용되지 않고, 사각형 창문에도 똑같이 알맞게 적용될 수 있다.
 모든 장미창에 묘사된 가장인기있는 주제 중 두가지는 그리스도와 마리아의 영광과 최후의 심판을 하는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세속의 주제 역시 쓰였는데, 독일 유리직공은 장식적인 잎무늬 패턴을 선호하여 형상적인 주제를 거부했다. 그리고 스페인의 발렌시아(Valencia) 와 팔마(Palma)성당의 특유의 장미창은 다비드의 별의 형상으로 배열된 트레이서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형상적인 세부보다 추상적으로 양식화된 유리로 가득차 있다.
 수레 바퀴 모티프의 논리는 그것내의 디자인에 순환(회전)을 포함한다. 그러기에 레옹(L on)성당에는 형상이 논리적으로 뒤짚어 질 때, 끝이 뾰족해진다. 형상적으로 단지 머리와 어깨는 거꾸로된다. 디자인의 회전은 아미엥 성당의 서쪽 장미창에서처럼 도덕적 또는 상징적 목적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도 있다. 장미창의 상단 부분은 부유한 사람이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거지로서 내려오는 운명의 수레바퀴이다.
 장미창에서 리얼리즘 또는 그것의 결핍은 중요치않다; 모든 것은 정교한 꽃과 같은 이미지에 형태를 양분하는 살의 방사와 잎의 틈에 의해 결정된다. 장미의 추상적인 면이 충분히 평가받는다면, 거기엔 역시 중심에서 발까지 회전하는 형상에 대한 모순이 없을 것이다.
 중세의 유리직공은 석재작업에서 장미창에 유리를 적용하는 필요를 가치있게 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특히 석공술이 복잡해질 때, 그것들은 유리의 면을 할레이션(halation) 때문에 빛의 가장자리로 퍼져나가게 하여, 돌의 살을 더욱더 비현실적으로 만들게 한다. 그들은 창의 둥근 가장자리를 가져와서 원의 효과를 보강했고, 빛이 통과하게 되고, 석재작업의 주조를 무시하게 했다. 할레이션의 타입은 빛에 의해 석재작업을 모호하게 했고, 장미창의 바깥과 건물의 외부로부터 방사창의 폭을 연구할 수 있게 하였다. 그것은 빛이 창문을 어떻게 확장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고, 창의 거대한 확장은 최소의 석재 작업에 포함되어 나타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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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트 (State)

스테이트 (State)



  본 에디션에 들어가기 전단계로 찍어보는 판화. 'EE'로도 표기하는데 가필 수정되어 찍어지는 것으로서 렘브란트 판화에서 이런 것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위 작품은 렘브란트의 판화 중 스테이트가 많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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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퀴즈 (Squeeze)

스퀴즈 (Squeeze)

나무나 플라스틱 손잡이 사이에 고무를 끼워서 물감이나 색소를 고르게 펴주는 도구로 실크스크린에서 사용한다.
사진에서는 물기 제거용 스퀴즈를 사용하며, 요즘은 창문 세척용이나, 청소 도구로 나오는 스퀴즈도 있다.



[ 실크스크린용 스퀴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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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2, 2013

시험 수채화 시범 (사과) / 기초 수채화 / Basic Watercolor


시험 스타일 사과 수채화 시범 (과정)

기초 수채화 / Basic Watercolor / Apple

그림은 계획이다. 계획이 없다면 과정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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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9, 2013

디자인 표현기법 _ Basic design

입시 디자인을 위한 기초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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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표현 기법 / Basic design

구로구 개봉동 '윤아뜨리에' / 사고의 전환 / 기초 디자인 / Basic design


학생 작품





개봉동화실/구로구미술학원


3월 14, 2013

기초 수채화 (사과)_구로구미술학원


기초부터 쉽고 탄탄하게 (기초 수채화 / Basic Watercolor)

사과의 표현 (Apple)

붉은 사과의 표현은 입시에서 크게 두가지로 구분지을 수 있습니다.
어떤 방법을 선택하더라도 전체 화면 안에서 다른 사물과의 어울림이 중요합니다.






구로구미술학원 / 전원미술학원 구로 캠퍼스

디자인 표현기법


기초 디자인 / Basic design




이*화 학생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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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 정물 드로잉 시범

기초정물 드로잉 시범

사과, 오지항아리 / 4절 켄트지에 100분 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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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3, 2013

투구 쓴 여인(무장여인상) 그는 누구인가? / 아테나 [Athena]

투구 쓴 여인(무장여인상) 그는 누구인가?

아테나_Athena



투구 쓴 여인(무장여인상) _ 아테나 [Athena]


우리가 학원에서 “투구 쓴 여인”이나 “무장 여인”으로 불리는 석고상이 사실은 아테나(Athena) 이다.


'하늘의 여왕'을 뜻하는 수메르어 아나타(anatha)에서 유래.
제우스가 혼자 낳은 딸로서 제우스의 머리에서 무장한 채로 태어난 처녀 신으로 로마신화의 미네르바(Minerva)에 해당하며 올림푸스 12신 중 하나이다. 전쟁과 여러 가지 기예(技藝)의 수호신이며 도시의 수호신이기도 하여, 그리스의 여러 주요 도시에 아테나의 신전이 있었다.
처녀 신이었으나, 같은 처녀신인 아르테미스와는 달리 남성을 멀리하지 않고 오히려 남성적인 행동을 즐겼으며, 싸움터에 가는 용사들을 응원했다.
그녀의 성조(聖鳥)는 지혜를 나타내는 올빼미였고, 그녀에게 바쳐진 식물은 올리브였다.

아테나는 헤파이스토스가 도끼로 제우스의 머리를 쳤더니 완전 무장한 성인의 모습으로 뛰어 나왔다고 하는데, 이 아테나의 탄생 경위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가장 일반적인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현명한 티탄 여신인 메티스(지혜로운 충고)에게 구혼하여 결혼하게 된 제우스는 메티스가 알려준 대로 아버지인 크로노스에게 토제(吐劑), 즉 구토약이 섞인 음식을 크로노스에게 먹여 자신의 남매들을 토하게 한다.
그런데 메티스가 제우스의 아이를 배었을 때, 제우스는 조모인 가이아로부터, 만일에 메티스가 제우스의 두 번째 아들을 낳으면 그가 아버지를 쓰러뜨리고 천지를 지배할 것이라는 경고를 들었다. 이 때문에 제우스가 메티스를 통채로 삼켜 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점에 관한 다른 설에 따르면, 제우스는 자신의 지위를 위협 받는 일 없이 메티스의 지혜만을 이어받은 아들을 낳아 달라고 메티스를 열심히 설득했으나, 평생 처녀로 있고 싶었던 그녀는 계속 모습을 바꾸면서 도망쳤다. 이에 제우스는 메티스가 파리로 변신한 기회를 이용하여 그녀를 삼켜버렸다. 그러자 메티스가 아테나를 임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 설에 따르더라도, 메티스가 임신한 아이는 제우스의 머리로 이동하여 아테나 여신으로 태어났다고 하는 점에서는 일치되어 있다.

아테나의 가장 위대한 성역은 아테네의 파르테니온 신전이다. 아테나는 포세이돈과 싸워 이 도시를 손에 넣었다. 포세이돈이 아크로폴리스 언덕의 샘에 소금물이 솟도록하자 아테나는
여기에 올리브 나무를 심어 대항했는데, 올리브 나무가 실용성이 있다고 생각한 아테네 시민들은 자기네 수호신으로 아테나를 택했다.화가 난 포세이돈은 아티카 지방에 홍수가 일어나도록 했다.
그러나 시민들이 아테나에 다음가는 지배권을 그에게 맡기자, 그는 마음이 누그러져
홍수를 물러가게 하고 아테네를 자기 마음에 드는 도시로 만들었다.

아테나 여신과 아테네 시를 결부시키는 이야기로는 또 에릭토니소스 이야기와 오레스테스 재판의 이야기가 있다.
전자의 경우는 이야기가 상당히 황당하다.
트로이 전쟁 때 아테나는 헤파이스토스의 대장간에 찾아가 무기제작을 청하였다. 아테나의 아름다움에 감탄을 하며 쾌히 승락하고, 일에 열중하고 있던 헤파이스토스가 갑자기 돌아서며 아테나를 덮쳐 안았다. 기겁을 하며 놀란 아테나는 몸을 뒤틀었다. 이때 헤파이스토스는 그만 아테나의 넓적다리에 사정(射精)을 해 버리고 말았다. 아테나는 재빨리 올리브 잎으로 이것을 닦아 버렸다.
그런데 이 정액은 공교롭게도 땅에 떨어져 애매한 대지의 여신에게 수태를 시키고 말았다. 억울하게 남의 아이를 낳은 대지의 여신은 노발대발하며 이 아이를 못 기르겠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아테나가 맡아 기르게 되었다.
여신은 아기를 상자에 넣어, 안을 들여다 보아서는 안된다는 엄명과 함께 상자를 케크로프스의 딸들에게 맡겼다. 그러나 두 딸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상자 속을 들여다보니 뱀 한 마리가 있었다.
(또는 뱀의 꼬리를 가진 아기가 있었다고도 하고, 뱀이 아기를 감고 있었다고도 한다.)
이에 놀란 처녀들은 아크로폴리스 언덕에서 투신자살을 했다. 여신은 아기를 상자에서 꺼내 자기 신전에서 키웠다. 어른이 된 에릭토니오스는 아테네 왕이 되었다.

아테나와 아레스는 모두 군신이지만, 양자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리스인, 특히 호메로스는 아테나 여신 쪽을 좋아했다. 아레스가 전투의 난폭한 면을 나타내는 대신, 아테나는 지적인 전술을 나타낸다.

『일리아드』에서도 아테나는 항상 아레스와 대립했다. 한 번은 디오메데스의 창으로 아레스의 복부를 찔러 부상을 입힘으로써 아레스를 싸움터에서 도망치게 했다. 제우스는 아테나를 사랑하고 아레스를 증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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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캔버스 규격 및 패널 사이즈 표


대한민국 캔버스 및 패널 사이즈 표

(캔버스 사이즈 / Canvas size)
 
단위 : Cm
호수
F
P
M
S
Figure (인물형)
Paysage (풍경형)
Marine (해경형)
Square (정방형)
0
18.0 x 14.0


 
1
22.7 x 15.8
22.7 x 14.0
22.7 x 12.0
15.8 x 15.8
2
25.8 x 17.9
25.8 x 16.0
25.8 x 14.0
17.9 x 17.9
3
27.3 x 22.0
27.3 x 19.0
27.3 x 16.0
22.0 x 22.0
4
33.4 x 24.2
33.4 x 21.2
33.4 x 19.0
24.2 x 24.2
5
34.8 x 27.3
34.8 x 24.2
34.8 x 21.2
27.3 x 27.3
6
40.9 x 31.8
40.9 x 27.3
40.9 x 24.2
31.8 x 31.8
8
45.5 x 37.9
45.5 x 33.4
45.5 x 27.3
37.9 x 37.9
10
53.0 x 45.5
53.0 x 40.9
53.0 x 33.4
45.5 x 45.5
12
60.6 x 50.0
60.6 x 45.5
60.6 x 40.9
50.0 x 50.0
15
65.1 x 53.0
65.1 x 50.0
65.1 x 45.5
53.0 x 53.0
20
72.7 x 60.6
72.7 x 53.0
72.7 x 50.0
60.6 x 60.6
25
80.3 x 65.1
80.3 x 60.6
80.3 x 53.0
65.1 x 65.1
30
90.9 x 72.7
90.9 x 65.1
90.9 x 60.6
72.7 x 72.7
40
100.0 x 80.3
100.0 x 72.7
100.0 x 65.1
80.3 x 80.3
50
116.8 x 91.0
116.8 x 80.3
116.8 x 72.7
91.0 x 91.0
60
130.3 x 97.0
130.3 x 89.4
130.3 x 80.3
97.0 x 97.0
80
145.5 x 112.1
145.5 x 97.0
145.5 x 89.4
112.1 x 112.1
100
162.2 x 130.3
162.2 x 112.1
162.2 x 97.0
130.3 x 130.3
120
193.9 x 130.3
193.9 x 112.1
193.9 x 97.0
130.3 x 130.3
150
227.3 x 181.8
227.3 x 162.1
227.3 x 145.5
181.8 x 181.8
200
259.1 x 193.9
259.1 x 181.8
259.1 x 162.1
193.9 x 193.9
300
290.9 x 218.2
290.9 x 197.0
290.9 x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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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
333.3 x 248.5
333.3 x 218.2
333.3 x 197.0
248.5 x 2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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