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現代美術:Contemporary Art)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초두의 약 20년 사이에 유럽 각지에서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과격하고 혁신적인 미술운동이 거의 동시에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야수주의(野獸主義:포비슴) 와 입체주의(큐비즘), 독일에서는 그것을 한데 묶어서 독일표현주의라고 부르는 ‘다리 ’ 와 ‘청기사(靑騎士)’(데르 블라에라이터) 운동, 네덜란드에서는 신조형주의(네오플라스티시슴) 운동, 그리고 혁명 전후 소련의 절대주의(쉬프레마티슴), 시기적으로는 약간 처지는 구성주의 (컨스트럭티비즘), 이탈리아의 미래주의(퓨처리즘), 마지막으로 제1차 세계대전중에 스위스와 미국에서 거의 때를 같이하여 일어난 ‘다다’ 운동 등이다. 그리고 이들이 지향하고 나선 것은 강도의 차이는 있으나, 다같이 르네상스 이래 가꾸어온 전통적 미술의 거부였다. 20세기 미술은 야수주의의 봉화와 함께 막이 열린다. 1905년 살롱 도톤전(展)에서 진열된 일군의 젊은 화가들의 작품들을 보고 “야수의 우리 안에 갇힌 도나텔로”라고 한 어느 신문기자의 말이 그대로 이 새로운 운동의 명칭이 되었다. 그만큼, 그 ‘우리’ 안에 진열된 회화작품들은 강렬한 원색과 대담한 필치에 의한 분방한 구성이었다. 그 주요 화가들은 마티스를 비롯하여 드랭, 블라맹크, 마르케, 뒤피, 프리스, 그리고 한 발 뒤늦게 이에 참가한 브라크, 반 동겐 등이다. 이와 때를 거의 같이 하여 독일의 드레스덴에서는 키르히너를 중심으로 ‘다리’그룹이 형성되며, 여기에 E.놀데, 페히슈타인 등이 가세함으로써 20세기의 독일 표현주의 운동이 등장한다. 불안과 고뇌가 얽히고 다분히 비극적인 화풍은 프랑스 야수주의의 개방적인 관능성과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이어 뮌헨에서 ‘청기사’그룹이 형성되고, 여기에는 칸딘스키, 클레, F.마르크, A.마케 등이 참여하여 주로 색채와 형태를 통한 순수한 조형적 세계를 지향하며, 이들 중 칸딘스키는 이미 10년에 최초의 추상회화를 만들어냈다.
프랑스의 야수주의운동은 얼마 가지 않아 매우 준엄한 조형적 규율을 앞세우는 입체주의(큐비즘)에 자리를 물려준다. 피카소와 브라크를 주축으로 하는 이 운동에는 J.그리스, 레제, 들로네, J.비용 외에도 재능 있는 여러 작가들이 호응하여 입체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때까지 한 시대를 풍미하게 되었다. 또, 조각가로서는 리프시츠, 아르키펭코, 로랑스, 자킨 등이 입체주의 미학에 동조하였다. 이 입체주의는 그 미학적 이념에 바로 추상미술을 예고하는 것이었으며, 이 점에서도 그 조형적 혁신의 의의는 크다. 20세기 전반기의 추상미술의 움직임은 상당히 다양하게 전개된다. 칸딘스키의 색채에 의한 표현주의적인 추상, 오르피즘이라 불리는 음악적 색채주의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 들로네의 추상, 엄격한 기하학적 구성을 추구한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 그리고 감성의 절대적 순수성의 표현을 지향한 말레비치의 절대주의가 그것이다. 흔히 추상미술의 주류를 칸딘스키 등의 ‘뜨거운 추상’과 몬드리안의 기하학적인 ‘차가운 추상’의 양극으로 구분하고 있으나, 이는 도식적(圖式的)인 풀이이다. 추상회화의 가장 중요한 과제인 색채와 형태, 표현과 조형의 자율성의 문제는 실상은 미묘하게 서로 얽히면서 전후 추상미술로 계승된다.
한편, 이 순수 조형의 추구라는 20세기 전반기 미술의 기조와는 달리, 현대 문명의 모순 자체에 항거하고 등장한 것이 ‘다다’ 운동이다. 기존의 모든 가치체계를 파괴하려는 이 과격한 운동은, 따라서 철저하게 반예술적(反藝術的), 반윤리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으며, 이와 같은 경향은 역시 기존의 미학을 거부하고 출발하려는 전후 미술 속에서 되살아났다. 이 ‘다다’ 운동은 유럽 전역과 미국으로까지 파급되었는데, 그 주요 작가들로는 M.뒤샹, F.피카비아, M.에른스트, H.아르프, 슈비터스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운동의 무대가 파리로 옮겨지자 곧 이어 초현실주의(쉬르레알리슴) 속에 흡수되었다. 초현실주의는 비단 조형예술뿐만 아니라 문학·사상 분야에 걸쳐 광범위한 영향을 끼친 정신운동으로서, 이제까지는 미지의 영역에 머물러 있던 무의식의 세계에 새로운 조명을 비쳤다. 그리고 이 무의식의 세계를 순수한 상태로 표현하기 위해 창출된 것이 자동기술법(오토마티즘)이며, 이 기법은 전후 추상표현주의의 대표적인 작가들에 의해 다시 계승되었다. 초현실주의 작가는 각기 독특한 방법으로 이를 응용하여 환상적인 세계를 펼쳐보였다. 대표적 작가는 M.에른스트, S.달리, Y.탕기, A.마송, R.마그리트 등이다. 50년대는 추상표현주의의 시대라 불릴 수 있을 만큼 이 운동이 세계적으로 파급되었다. 프랑스에서 일어난 앵포르멜과 뉴욕의 액션페인팅을 묶어서 호칭되는 이 광범위한 ‘반조형(反造形)’의 물결은 한편으로 ‘다다’의 반예술적 정신을 이어받고, 또 한편으로는 초현실주의 자동기술법을 동화시키며 전전(戰前)과는 전혀 다른 추상미술을 전개시켰다. 앵포르멜의 대표적인 작가로서는 포트리에, J.뒤뷔페, 아르퉁, 타피에스, 마티외 등을 들 수 있고, 액션 페인팅의 화가로서는 J.폴록, 데 쿠닝, A.고기 등을 대표적인 작가로 꼽을 수 있다. 이 추상표현주의 세대 이후 현대미술은 지극히 복잡하고 다양한 양상을 띠고 전개되며, 라우션버그와 J.존스에 의해 대변되는 ‘네오 다다’와 함께 오브제(물체)가 다시 등장하고, 아울러 이 오브제와 이미지와의 관계가 중요 관심사가 되었다.
60년대는 특히 미국의 현대미술이 강력하게 활기를 띤 시기이며, 그 초반에는 팝 아트와 오프 아트가 쌍벽을 이루었다. 주로 매스미디어의 이미지를 그대로 화면에 도입하는 팝 아트는 가장 미국적인 회화라고 평가되며 대표적인 화가로는 A.워홀, 리히텐슈타인, 로젠퀴스트, 웨슬만 등을 들 수 있으며, 이들은 각기 개성적인 화풍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시각적 환각의 효과를 직접적으로 추구하는 오프 아트는 바자렐리를 비롯하여 브리지트 라일리, 아감, 줄리오 르 파르크 등을 배출하였고, 이 경향은 그 영역을 확장해가면서 라이트 아트(發光藝術)와 키네틱 아트(動力藝術)라는 보다 규모가 크고 환각적인 예술형태로 발전해 갔다. 6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다시 선명한 순색과 명쾌한 기하학적 형태를 위주로 한 새로운 추상회화가 등장한다. 이 경향은 때로 하드에지(hardedge)추상이라 불리기도 하고, 탈회화적(脫繪畵的) 추상이라는 보다 포괄적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따라서 작가의 경향도 다양하지만, 이 새로운 추상의 대표적인 화가로서 F.스텔라, K.놀란드, E.켈리, S.프랜시스, F.덜러 등을 꼽을 수 있다. 한편, 60년대의 프랑스 미술계는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이 보이나, 미국의 팝 아트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태어난 누보레알리슴(신현실주의)은 현실에 눈을 돌리면서 추상표현주의를 거부하고 나섰다. 이 운동은 사실상 팝 아트와 상당한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나, 후자가 주로 산업도시의 이미지를 다루는 데 반해, 도시의 배설물이라 할 수 있는 갖가지 폐품을 즐겨 다루고 있다. 이 그룹에는 이브 클라인, 아르망, 빌레글레, 앵스, 그리고 조각가로서는 팅겔리 세자르 등이 속해 있다.
이 밖에 집단적인 움직임은 아니나, 아이요, 아다미, 텔레마크 등에 의해 대표되는 누벨 피귀라숑(新形象), 또는 피귀라숑 나라티브(敍述的形象)라 불리는 새로운 구상회화가 60년대 중반부터 확산되어갔다. 20세기 미술에서 조각이 차지하는 위치도 결코 도외시될 수 없다. 그러나 회화의 경우와는 달리 현대 조각은 일찍이 집단적인 운동을 형성하지 못하고 각기 개별적인 활동을 통해 현대조각의 다양한 전개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브랑쿠시는 그의 순수한 형태로써 추상 조각의 창시자로 간주되고 있으며, 이와는 반대로 육중한 양감의 인체조각으로써 H.무어는 구상조각의 한 봉우리를 이루고 있다. 이 밖에 페브스너, 가보 형제의 구성주의적 입체작품, 헤프워스, 한스 아르프, 아담, 질리올리 등은 추상조각가로서 일가를 이루고 있으며, 마리노 마리니, 그레코 등은 전통적인 구상조각에다 새로운 현대감각을 불어넣고 있다. 이와 같은 현대조각의 동향, 특히 전후의 동향에서 특기할 것은 조각의 개념 변질 또는 그 확산 현상이다. 다다이스트들에 의해 새로운 의미를 띠고 등장한 오브제가 바로 이 변질을 가져왔으며, 물체인 동시에 조각이기도 한 입체물이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리고 각종 오브제의 입체 구성물 속으로의 도입은 급기야 아상블라주라는 특수한 조각 형태를 낳게 했고, 이는 구성적인 성격의 조각과 대조를 이루며 조각의 영역을 크게 확장시켰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조각은 전통적인 경향과 실험적인 경향이 공존하는 가운데 풍요로운 탐구를 계속하고 있다.
1. 현대미술의 시작은 언제부터라고 생각하는가?
현대미술의 출발점은 우선 현대미술의 본질을 규정하는 관점에 따라 다르게 정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20세기 초기부터 시작된 미술의 전반적인 추상화(抽象化) 경향을 현대적 미술개념과 그 표현의 진정한 출발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듯 하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도 현대미술의 시작이 정확히 몇 년, 몇 월, 몇 일부터라고 인위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하며, 대략적으로 20세기 초반부터 일기 시작한 그로피우스, 코코슈카, 피카소, 샤갈, 헨리 무어, 달리 등에 의해서 추진되었던 혁신적이고 실험적인 미술운동과 함께 그 시작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2. 위와 같이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위에서 막연히 20세기 초반의 혁신적이고 실험적인 미술운동이 현대미술의 시작이라고 언급하였는데, 이제 차근차근 그 이유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건축에 있어서 새로운 건축과 장식미술은 20세기 초반 '아르누보'라는 실험적 운동으로 인하여 모색되었다. 이 새로운 운동이 추진한 것은 건축이 기존의 불필요한 일체의 장식이나 양식의 속박에서 탈피하여 건축 자체의 목적을 중시한 것으로, 만약 건축 내부가 살기에 편리하게 설계되었고, 거주자의 요구에 잘 들어 맞는다면 불필요한 장식과는 상관없이 건물 외부의 모습도 훌륭하게 된다고 확신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건축에 있어서의 모든 장식의 배제는 사실상 수 백년간 이어온 전통과 단절된 것으로 기존의 건축물 자체의 통합적인 예술을 전면적으로 부정한 혁신적이고도 실험적인 것이었다. 즉, 목적에 맞게 설계되기만 하면 거기에 형태도 자연히 아름답게 되기 마련이라는 기능주의를 표방한 것이었다. 이렇게 20세기 초반의 미술에 대한 실험에 의해서 19세기까지의 미술 이념이 우리들의 도시와 방 속에 잔뜩 어질러 놓은 불필요하고 몰취미한 잡동사니 장식들을 많이 제거하는데 도움을 준 것이다.
회화에 있어서는 모든 종류의 사고와 수법 및 재료에 대한 실험의 자유를 중시하게 되어 표현주의, 입체주의, 추상미술, 야수파등이 대두하게 되었다.
20세기의 초반의 회화미술은 '눈으로 본 그대로를 그려야 한다'는 단순한 요구가 가지고 있는 자체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어느 방향으로 나가야 할 지를 알 수 없게 되어 여러가지 실험과 도전을 모색하였다고 본다. 그래서 19세기의 인상주의가 과학적 정확성으로서 빛의 효과와 빛나는 색채의 난무를 순간적인 시각 인상으로서 그렸던 것들을 탈피하려 하였다. 인습적인 선이나 형태를 그리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였던 것이다.
표현주의에서의 실험은 인간의 고통과 가난, 폭력과 격정에 대해 아주 예민하게 느꼈고, 인생의 가차없는 현실들을 직시하고 불우하고 추한 인간들에 대한 연민을 표현하려 했다. 예쁘장하고 매끈하고 세련된 냄새를 풍기는 것은 일체 피하고 '부르조아'의 현실적 또는 가상적 자기 만족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 그들의 체면에 관계되는 일처럼 되어 버렸다. 미술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자연의 모방이 아니라 색채와 선을 선택함으로써 감정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또한 입체주의에서는 대상의 재현을 전적으로 폐지하려 하지는 않고 단지 그것을 다른 형태로 바꾸려는 실험을 하였다. 이 역시 인상주의를 거부하는 경향으로서 질서, 명확한 구성 및 형태에서 이탈하여 대담한 단순화와 함께 화면의 구성과 입체감 사이의 갈등을 구도상의 입체감으로 극복하려 하였다. 추상미술에서는 '색채로 표현된 음악'이라는 최초의 시도를 일반에게 공개함으로써 순수 색채의 심리적인 효과를 강조하고 정신과 정신을 서로 결합시키려는 실험을 추구하였다.
야수파는 자연 형태를 정면으로 무시하고, 격렬한 색채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였는데 이로 역시 단순화를 추구한 것으로 기존 회화의 개념에서 탈피하려는 실험정신이 강하였다.
현대미술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작가가 있다면 다름 아닌 '피카소'라고 생각한다. 그는 20세기 초반의 표현주의, 입체주의, 추상미술들을 두루 실험하며, 자신의 수법을 바꾸기를 좋아했고 때때로 형상 제작의 가장 대담한 실험에서부터 여러가지 다양한 전통적 양식으로 되돌아가기도 했으며, 자신이 실험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며 단지 발견할 뿐이라며 그의 여러가지 발견하려는 시도가 바로 현대미술의 전형적인 양상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정리하면, 현대미술이라는 것의 시작은 사실 그 출발점에 대한 규정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개개인의 관점에 따라 바뀌어 질 수가 있다고 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현대미술의 핵심은 과거로부터의 탈피와 함께 단순화, 솔직함, 입체화 등의 여러가지 실험적인 정신이었다고 보며, 이러한 점에서 그 출발점은 이러한 실험정신이 가장 왕성했던 20세기 초반이 된다고 본다. 물론 과거 미술의 흐름에 따라 등장하는 각 시대별 예술 사조도 실험적인 정신에 의해 태동하였고 유지되었겠지만 특히 20세기 초반의 예술들의 그 실험성의 파격성과 강렬한 도전의식이 과거 그 어느 때 보다도 강했으며, 새로운 것의 창조를 주된 목표로 삼았다는 점에서 진정한 현대미술의 출발점이라고 보는 것이다.
현대미술의 세 가지 흐름인 표현 추상 환상은 어느 것이나 후기 인상주의 예술가들 사이에서 발생하여 20세기에 이르러 더욱 발전을 이룬 것이다. 우리가 표현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종합하고 있는 몇 가지의 이즘은 예술가가 세계에 대한 또는 자기 자신에 대한 감정적인 태도를 대단히 중요시하고 있다. 추상 계열에 속하는 작가들은 구조에 중점을 두기 때문에 선 형태 공간 색채의 구성을 중요시한다. 그리고 환상 계열의 작가들은 상상력의 작용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그렇지만 감정과 구조와 상상력이란 어떠한 예술작품에도 존재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감정이 없는 예술은 우리를 감동시킬 수 없으며, 어느 정도의 구조가 없으면 질서가 없어진다. 또 상상력이 없는 예술은 지루할 것이다.
19세기 인상주의적 화풍 이후 현대미술은 마티스회화에서 나타나는 평면적인 색면의 사용과 소위 색채원근법의 배제, 그리고 현상적인 재질성등이 강조되는 회화로 향하고 있다. 색채회화는 색채 자체의 존재가치를 인정하는 색채의 자율성을 조형적 가치로 부각시키면서 그 자체를 즐기게 하는 회화적 특성을 보여준다.
회화세계에서의 색채(色彩)의 중요한 가치는 칸딘스키(Kandinsky)의 추상적 그림에서도 나타나면서 그 상징적 의미가 강조된다. 이러한 의미는 화화적 표현에 있어서의 정신성(井神性) 또는 영혼성(靈魂性)을 가리키는 것인데, 음악적인 것과 관련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색채는 음과 같이 풍부하고 힘찬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 있어서는 사물의 의미가 느껴지지 않는 선과 형채, 색채 등에 의한 자유스러운 화면구성이 문제되고 순수한 의미의 색채적 요소가 중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음악적인 것처럼 진동하는 색채의 효과는 곧바로 내적 울림 또는 내면적 힘의 바탕이 되고, 이러한 힘이 "내적 필연성" 으로 나타난다. 내적 필연성은 하나의 정념으로 발전해나가는데. 이러한 정념이 영혼적 상태의 폭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칸딘스키의 추상적 회화의 상징적 의미는 바로 그러한 정신적 차원에서 색채적 정념을 시사한다. 칸딘스키가 규정짓는 색채와 정념의 관계는 "노란색은 자극을, 빨간색은 에너지를, 파란색은 무한의 감성을, 초록색은 고요함을, 하얀색은 침묵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표현주의 : Expressionism
표현주의는 순수하게 양식상의 의미로 사용되며, 강렬한 색채 및 자극적인 터치, 분산된 공간이 수반되어, 아주 손쉽게 <현대 미술>과 동의어 관계에 놓인다. 표현주의는 각기 다른 사조(야수주의, 추상, 입체주의, 미래주의, 초현실주의 등)의 그룹들과, 고립된 미술가들에게 적용된다. 표현주의의 매우 유연성있는 특성은 한시대 전체의 핵심적인 개념을 만들었으며, 빌헬름 정권 하의 독일의 정치적 구조를 거부하는 공동의 의지를 합께하는 혁신적인 요소들을 가리킨다. 단 한 가지 양식만을 수용한다기보다, 조형 예술 뿐만 아니라 무용, 영화, 문학과 연극에도 손대는 것이다.
표현주의는 독일을 배경으로, 1905년 드레스덴(dresden)에서 디 브뤼케(Die Br cke,다리파)가 창설되면서 새 화풍(畵風)을 일으키는데서 비롯되었다. 1918년 독일의 전쟁 패배 후의 노벰베그룹(Novembergruppe)에까지 이러한 분위기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전쟁 전 세대들에게 있어서 예술 작품은 일종의 지탱 기반이 되는데, 여기서 예술가는 뿌리가 뽑혀 있다고 생각되는 사회가 유발한 정치적, 도덕적 긴장에 맞서 자신의 내부적 불안감을 밖으로 나타내는 것으로서 예술 작품을 인식한다. 북유럽적 신비성, 몽환성이 지배적이고 기계문명에의 반항과 원시성을 동경하는 특색을 지닌다. 만일 작품이 시대의 정신적 위기에서 빠져 나올 구실을 갖는 것이라면, 마찬가지로 그것은 확실한 가치를 탐구하고자 하는 환상을 품은 소시민적인 미술세계에 맞선 선동자이기를 스스로 바라는 것이다. 거의 잊혀진 그래픽 기법으로 돌아온 목판화는 그런 점에서 본다면 미적 가치의 새로운 의지에 대한 지표가 된다. 신원주의 형태에 대해 미술가들이 가지는 관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산업화의 성장에 맞서, 어떤 작가들은 자연이나 고국 땅에 대한 애착을 표현한다(놀드 Nolde, 롤프 Rohlfa). 또 다른 작가들은 자신들의 공동체 생활과 그림을 통하여 독일 제국의 부르조아적인 도덕적 기치를 뒤흔들어 놓으려고 한다(디 브뤼케). 그리고 또 다른 작가들은 자신들의 회화가 진실된 정신적 회복의 길을 표현하기를 바라기도 한다(데어 블라우 라이터). 드레스덴, 뮌헨, 특히 베를린은 이러한 아방가르드 경향의 활동의 중심지이다. 1912년 살더분트와 1913년 베를린에서 발덴(Walden)이 기획한 첫 번째 살롱 도톤에서 전시회를 갖는다. 같은 해, 미술 비평가인 빌헬름 하우젠슈타인은 칼 마르크스(Karl Marx)의 영향을 받아, 표현주의를 미래를 위한 진정한 의미의 사회적인 미술로서 옹호한다. 전쟁 선포는 미술계에 매우 상반된 의견 대립을 불러 일으키는데, 그것은 열렬한 애국주의에서 신랄한 견유주의에 이른다. 1916년 이후, 전쟁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들은 임박한 패배에 직면하여 정치적 참여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고, 몇몇 평화주의자들은 여전히 가능한 한 정신적 회복에 기대를 걸려고 한다. 그러나 군사적 패배와 1918년 11월 베를린에서의 혁명의 실패는 그들의 신념에 심각한 동요를 일으킨다. 1920년부터, 하우젠슈다인이 운동의 쇠퇴를 표명하는 한편, 몇몇 중심 인물들이 그들의 초창기 양식을 지속적으로 간직했음에도 불구하고, 혁명적인 그룹들은 점차적으로 자신들의 영향력을 잃게 된다. 제 2세대 표현주의자들은 1920년대에 와서 나아갈 계기를 마련하려고 시도하지만, 강력한 경쟁 상대를 만나게 된다. 즉 베를린 다다이스트들의 출현으로 나타난, 1925년 경의 신즉물주의 선언이 그것이다.
* ‘브뤼케(橋)’ 그룹
1905년 드레스덴에서 4명의 젊은 건축과 학생들인 키르쉬너, 헤켈, 슈미트-로틀러프 그리고 블레일리 조직한 미술단체. "분리파"(Secession)의 보수주의레 반대하여 Br cke(다리)라는 단어를 선책한 자체가 의미심장한 일이다. <그것은 이중의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이며, 정확한 프로그램을 보여주지 않을 수도 있었지민 어떤 의미에서는 강에서 또다른 강으로 인도할 수 있는 단어이기 때문이다>-헤켈. 즉 현대성을 추구하는 것일 수도 있다. 화실의 공동 분할과 주제나 방식의 교환을 목적으로 하는 이 독학 화가들의 일상적인 공동작업은 특히 독일 표현주의의 대표가 되는 집단적 스타일의 형성에 트게 공헌한다. 공격적이고 반 부르조아적인 그들은 모든 학파와 논리들을 거부한다. 표현의 법칙글 강화하면서 더욱 유동적인 필체를 위해 조금씩 색깔을 두껍게 칠하는 것을 포기하고, 재빠르고 솟아나는 듯한 터치와 단순화된 뎃상을 이용하여 모가 난 형태와 단순하고 부조화한 색채로 주제들을 다듬어 나간다. 본래의 낙원상태의 상징인 누드는 그들이 좋아하는 보티브였다. 1906-1907년의 두 전시회는 관심을 끌지 못하지만 그들의 이념과 미술을 전파하기 위해 이때부터 매년 목판화집을 만들어 낸다. 아놀드 화랑은 1910년에야 격국 그들에게 큰 전시회를 주관한다. 각지 베를린으로 옮기며 그들은 더욱 개인적인 스타일을 선책한다. 이 그룹은 새로운 멤버이자 마지막 멤버인 오토 뮈엘러를 맞이한다. 베를린에서의 더 강도있는 미술적 삶은 그들에게 결실을 가져다 준다. 슈투름에 재빨리 가담하고, 현대미술로 유명한 걸리트화랑은 1912년 이들을 유명세로 만들었으며, 함부르크에서 연이어 전시회를 가진다. 같은 해 이 그룹은 뮌헨에서 블라우 라이터(Blaue Retier, 청기사파)의 두 번째 전시회에 참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공동 스타일이 점점 없어지면서 그들의 협력도 점점 사라져 간다. 1913년에 역사적인 사건으로 만든 키르쉬너의 글인 "브뤼케의 연대기"를 이 그룹이 거부하면서 그룹의 해체가 불가피하게 된다.
* 청기사(靑騎士) 그룹
1912년 5월 뮌헨의 현대 미술에 관한 글을 모은 피페 출판사의 "알마나크"표지를 위해 마르크(Marc)와 칸딘스키에 의해 지어진 명칭. 1911년 6월부터 계획되고 9월에 계약이 체결되며 그해 가을에 작가와 음악가 등 공동협조자들의 도움을 받다 편집작업을 한다. 그들이 신 미술가협회에서 탈퇴하고 막케(Macke), 뮌터(M nter), 캄펜동크(Campendonck)와 불략(Burljuk)등의 다른 파들을 포섭하면서 1911년 12월 8일부터 탄하우저 화랑에서 선언문-전시회를 주관하고 동일 명칭을 사용한다. 이책과 전시회의 독창성은 작가의 <내적인 필연성>이라고 도처에 현존하는 표현의 하나인 공통점에서 동양과 서양을 재구성하여 추상적이면서 사실적인 모든 형태의 미술을 광범위하게 개방한다는 점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룹 디 브뤼케, 클레, 브라크, 피카소, 드랭을 포함한 독일, 러시아, 프랑스 작가들의 315점의 그래픽 작품을 모은 두 번째 전시회는 1912년 2월 골츠(Goltz)에서 주최된다. 이런 역사적 사건들은 독일 현대미술의 결정적 돌파구 역할을 한다. "알마나크" 제 2권을 출판하려는 계획은 실행되지 못한다. 조직화된 그룹으로 형성되지 못했던 편집팀의 활동은 전쟁으로 끝이 난다.
아방가르드 (前衛藝術)
20세기 초 프랑스와 독일을 중심으로 자연주의와 의고전주의(擬古典主義)에 대항하여 등장한 예술운동. 전위(아방 가르드:avant-garde)란 본시 군대용어로, 전투할 때 선두에 서서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부대의 뜻이다. 이것이 변하여 러시아혁명 전야 계급투쟁의 선봉에 서서 목적의식적으로 일관된 집단으로서의 정당과 그 당원을 지칭하게 되었다. 그것이 이윽고 예술에 전용(轉用)되어 끊임없이 미지의 문제와 대결하여 이제까지의 예술개념을 일변시킬 수 있는 혁명적인 예술경향 또는 그 운동을 뜻하기에 이르렀다. 러시아의 화가 칸딘스키는 그의 저서 《예술에 있어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1912) 속에서 ‘정신의 3각형’이라는 비유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전위미술의 선구적인 정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 의하면 시대의 정신생활이 형성하는 3각형 속의 저변(底邊)에는 광범위한 대중이 있고, 정점(頂點)에는 고독하고 이해받지 못하는 예술가가 있다. 그런데 이 3각형 전체가 눈에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앞으로, 위로 조금씩 움직이고 있으며, 오늘 고독한 정점에 있는 예술가의 예감에 지나지 않던 것이 내일은 지식인의 관심사가 되고 모레는 대중의 취미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예술가는 시대의 통념과 절연(絶緣)하여 ‘정신의 내적 필연성’에 따름으로써 다음 시대를 창조해내는 것이다.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일어난 다다이즘은 여러 의미에서 예술의 한계를 타파하고 단순한 물체도 행동도 하나의 관념으로 일관할 때 예술작품이 된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여기에서 칸딘스키의 ‘정신의 3각형’은 역전하여 예술가는 기성의 통념을 파괴하고, 흔히 있는 물체나 우연한 행위와 구별할 수 없는 지점까지 개아(個我)를 추구하였을 때 비로소 미지의 영역을 개척할 수 있는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러시아·헝가리·독일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고 그 후 각국에서 프롤레타리아 예술운동이 전개되는 가운데 정치혁명과 예술혁명의 관계가 끊임없이 논의되고 전위예술의 개념은 널리 퍼졌다. 다다·미래파(未來派)·구성주의(構成主義)운동이 그 초점이 되면서 이윽고 추상예술과 초현실주의가 전위예술의 2대 조류를 이루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기성예술에의 반항이나 혁명정신 그 자체가 대중사회의 다양한 풍속 속에 확산하여 전위예술은 특정 유파나 운동에 그치지 않고 첨단적인 경향의 총칭이 되었다.
- 특히 독일 표현주의(1904 - 1914)의 칸딘스키나 신조형주의(1920)의 몬드리안의 회화는 역설을 통하지 않고 어떤 의미에서 추상적 태도의 본질을 파헤치려는 탐구의 진면목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칸딘스키가 음악적인 서정성을 화면의 조화로 대치하여 정감적 회화의 추상성을 제시한(<즉흥III>, 1909) 반면, 몬드리안은 원색과 사각형의 조화 속에서 명쾌한 기하학적 형태의 추상성을 보여준다(<적, 황, 청의 콤포지션>, 1921). 비슷한 시기에 말레비치는 절대주의(1913)라는 이름 아래 화면의 절대성을 주로 흑백의 색으로 나타내어 추상미술의 새로운 면모를 강력하게 시사하기도 한다.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 - 1944, 獨)의 예술이론
칸딘스키는 야수주의를 뛰어넘는 가장 대담한 진보를 이룩한 표현주의 화가로, 자신의 강령적인 서술을 통해 발언하고 자신의 고유한 예술 영역뿐만 아니라 예술 일반의 본질을 정의하고자 했던 선구적인 예술가이며 이론가이다. 프랑스처럼 독일에서도 문제가 되었던 것은 모든 삶의 영역과 예술을 새로운 가치의 범주를 통해서 보려는 정신적 개혁이었다. <정신적 재화>라는 강령적인 글에서 프란츠 마르크(Franz Marc)는 그의 많은 예술가 동료들이 마음에 두고 있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과거와 과거의 예술에서 높이 평가되었던 물질적 재화에 대비되는 정신적 재화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추상을 지향하는 새로운 예술의 가장 유력한 이론가 칸딘스키의 1차 세계대전 이전 저작과 활동은 당시의 예술적 상황을 매우 뚜렷하게 구현하고 있다. 1912년의 <예술, 특히 회화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는 당시 새로운 예술이 전개되고 있던 독일의 예술적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목표는 일종의 '회화에서의 화성이론'을 창출하는 것이었다. 칸딘스키의 글은 신비적 체험과 음악적 유비를 지향하는 선언이었다. 거기서 이야기되고 있는 것은 '보다 높은 목표들'과 '내적인 울림'이다. 색채가 규정되는 진보적인 독립성에 의해서 또한, 무엇보다 <음악적>구성- 망막적이라기 보다 심리적 효과로 정해진 구성에 의한 것, <내적 필연성>에서 파생된 것, <표현주의적인>것이라는 이 세 가지 범주들은 하나의 요점에 종속됨에 따라 <교향악적인>것으로 특징지워지는 것이다.
칸딘스키는 당시의 문화 변형에 대해 하나의 시각을 제시하는데. 이는 상징주의에 근거를 둔 것이다. 색채 상징과 형태 원리에 관해 복집하게 설명하고 있는 칸딘스키의 글은 서로 반대 방향을 취하고 있는 두 가지 새로운 예술 형식들을 선언하는 데에서 그 정점에 이른다. 위대한 추상성과 위대한 사실성. 칸딘스키에 따르자면 과거 예술으니 모든 국면에서도 이러한 두 가지 기본적 가능성이 존재했다. "예술에서 이러한 두 요소들은 항상 존재했는데, 그것들은 '순수 예술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추상성은 사실성 속에서 표현되며, 사실성은 추상성에 봉사하고 있다. 그것은 정대적인 평형 속에서 이상의 최고점을 획득하고자 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러한 상이한 종류의 균형잡기였다."
칸딘스키에게 중요한 것은 예술적 수단의 자율적인 작용인데, 특히 색채는 그에게 중심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색채는 영혼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수단이다. 색채는 건반이요, 눈은 망치이다. 영혼은 많은 형을 지닌 피아노이다. 예술가는 이런 저런 귀를 통해 인간의 영혼을 진동시키는 손이다. 따라서 색채의 조화가 인간 영혼의 가장 합목적적인 접촉의 원리에 근거해야만 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
1912년 <청기사파>라는 저작집이 칸딘스키와 마르크의 공동작업으로 출한되었다. 그 책에는 당시 유행하던 여러 경향들이 총괄되어 있다.
<연감>은 뮌헨에 집결해 있던 화가들의 작품과 프랑스의 화가들, 바이에른의 민속예술, 아프리카와 고대 아메리카의 조각들, 아동들의 그림, 악곡, 연극, 그리고 이와 비교될 만한 문제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유럽 예술가들에 대한 텍스트들까지 포함하고 있다. 새로운 예술에 대한 광범위한 조망을 추구하려 했던 것이었지만 별로 정밀하지 않았으며 일반적인 확증을 넘어서지 못하였다. 매우 세련되고 교육적으로 정향되어 있는 칸딘스키의 일련의 의견들은 바우하우스 교사로 활동하는 기간에 처음으로 제시된다.
<바우하우스 교사>
후기 칸딘스키의 예술이론적 견해들은 본질적으로 바우하우스 교사로서의 활동에 규정되어 있다. 1922년 6월 임명된 그는 형태의 이론(1926년 "점 선 면"에서 그가 작성한 것과 같은)을 가르치고 지시적 형태가 아닌 상징적인 충만함에 관한 원들을 개발한다. 이 저서 "점 선 면"은 이 요소들의 새로운 규칙을 제시하고 있다.
칸딘스키와 친교를 맺고 새로운 예술의 문제들로 함께 투쟁했던 파울 클레는 바우하우스에서의 교사활동을 통해 새로운 명석성과 정확성을 촉발시키고 발전시켰다. 그것은 클레의 예술이론적 글들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예술은 가시적인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예술은 가시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예술은 동일한 방식으로 창조에 관계하고 있다. 현세의 것이 우주적인 것의 예(例)인 것과 유사하게, 예술은 그때마다 하나의 예이다. 요소들을 자유롭게 만들고 결합된 세목들로 모아놓는 일, 분해함과 동시에 재건함으로써 보다 많은 측면에서 전체로 만드는 일, 조형적인 다성음, 운동의 평형을 통해 경지를 이루어내는 일, 이 모든 것들은 고도의 형식 문제들이다. 이것들은 형식적인 지식에 대해 결정적인 작용을 하지만, 최고급에 속하는 예술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최고급에서는 다의성의 배후에 최후의 신비가 놓여 있으며, 지성의 빛은 비참하게 퇴색되어 버린다."
- 큐비스트가 분석적 경향을 보다 강하게 한 1910 - 1911년경의 칸딘스키를 시작으로 한 몇 명의 화가들이 어떤 대상물을 지시하지 않는, 색과 형태에 의한 구성만으로 성립하는 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칸딘스키는 모네의 <적고>그림을 보았을 때, 그리고 바그너의 <로엔그린>을 들었을 때의 선명한 인상을 자신이 추상회화를 그리기 이전의 경험으로서 회상하고 있다. 그는 <적고>에서 색채의 음을 듣고 <로엔그린>에서 음의 색채를 본 것이다. 그가 작품의 타이틀로서 <콤포지션>(구성, 작곡)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도 색과 형에 의한 음악을 지향했기 때문이다.
* 모네 이후의, 보이는 것에 대한 철저한 탐구는 여기에 이르러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일, 또는 보이지 않는 것을 명백히 하는 것으로 행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개봉동입시미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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