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의 기원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프랑스 19세기 화가, 인상주의
현대미술은 보통 인상주의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이는, 인상주의 회화가 " 기존의 권위나 형식을 강조했던 이전의 미술과 달리 직감적인 표현과 색채위주의 새로운 표현을 사용" 했기 때문이다. 즉, 고전미에 대한 과도한 집착(신고전주의)이나 이상세계에의 동경(낭만주의), 그리고 현실에 대한 사회적 인식(사회주의)과는 동떨어진, 오로지 시각 그 자체만의 경험에 의존해서 " 회화적인 표현" 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현대)회화적인 표현이란, 회화 내에서 색채/형태가 갖는 자율성을 존중하는 것을 말한다. 이전의 전통회화에서는 색이란 어떤 대상들에 속한 고유한 성질로서 불변적인 것이며, 또한 색은 어떤 대상의 재현에 있어서 부차적인 것이요, 심지어는 장애가 되는 것으로 파악했다. 그들(특히, 고전주의자들)은 대상의 충실한/객관적인 재현(모사)을 위해 -색이 아닌- 선의 추구를 강조했는데, 회화에 있어 선의 추구는 곧 원급법에 의한 재현을 뜻했으며 이는, 2차원의 평면 회화 상에서 3차원의 깊이감(환영)을 제공해주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재현/모사 전통의 회화는 인상주의자들에 의해서 강한 도전을 받게 된다.
이들의 노력(빛의 분위기 추구에 따른 회화의 평면성 부각)에 의해서, 전통적인 회화가 지닌 자기모순성이 드러나게 됐기 때문이다. 즉, 회화란 본래 2차원의 평면의 성질을 갖는 것인데, 이것이 전통화가들의 '눈속임(트롱프뢰이유)'에 의해서 3차원 공간의 깊이감(환영)을 얻게 됐다는 것이다(실제로는 평면인 것이 무늬만 입체라는 뜻!). 입체감/깊이감/사실감을 제공하는 이러한 전통회화의 " 창문의 역할" 은 이제, 조각이나 혹은 사진의 영역으로 넘겨줘야 할 것이지, 회화 고유의 기능은 아니라는 것이다(이러한 지적에 관해서는 벨과 그린버그의 상기 글을 참조). 따라서, 이들 형식주의자(모더니즘 미술비평가)에 의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거나/이상화시키거나, 혹은 문학/신화/역사/종교적인 사건을 시각적으로 기술하는데 그 1차적 목적을 두었던 전통미술은, 심한 반발을 사게 된다.
클라이브벨은 그의 유명한 글인 < 미학적 가설> 에서 회화가 우리에게 고유한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어떤 것의 재현이나 모사/설명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만의 " 의미 있는 형식Significant Form"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에게 있어 < 의미 있는 형식 > 이란, " 특정한 방식으로 배열된 선과 색채, 형태와 형태간의 관계" 를 말한 것으로서, 회화의 선과 색은 어떤 대상/사건의 재현에 그 본질적인 기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만의 조화와 배치에 있다는 것이다.
현대 회화(미술)속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이러한 색채(형태)의 자율성은 가깝게는 인상주의 미술에서 그 출발점을 찾을 수 있으며, 멀리는 -색채의 중시가 결과적으로 평면성을 부각시켰다는 관점에서- 16세기 베네치아파까지 소급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현대회화의 기원을 들라끄르와의 낭만주의 미술에서부터 찾고자 한다.
낭만주의
들라크르와를 중심으로 낭만주의 미술의 현대성(modernity)에 관해서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상징주의 시인이었던 샤를 보들레르이다. 낭만주의 회화의 거두였던 들라끄라와도 친분이 깊었던 보들레르는 [1845년 살롱비평]이라는 책까지 낼 정도로 미술비평에도 상당한 영향을 준 인물이다.
보들레르에 의하면, " 현대성이란 일시적이고 변화하기 쉬우며 우발적인 것이고 잡히지 않는 것으로서 예술의 한 국면인 것" 인데, 이는 시대상을 반영하는 시한성을 가지고 있어서 수시로 변하는 것이다.
시대성과 변화를 현대성으로 본 그에게 있어, 낭만주의 예술이란 바로 이 시기(프랑스 혁명후의 19세기초반)의 시대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서 이제 시민계급은 자신의 목소리, 자기의 시선, 자기의 욕구를 내놓을 수 있는 위치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 자기표현의 시대성> 이 드러난 예술이 바로 낭만주의였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보들레르의 있어서 " 자신의 감명을 화려한 색채로써 전달" 하려고 했던 들라끄르와는 바로 현대성의 메신져였던 셈이다. 그는 그의 회화에서 자신의 내면세계의 표출(창조적 상상력)을 중시했고, 무한의 세계를 동경(이국적 풍경의 사건/대상들)하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세계관은 미술에서 " 색의 미학" 으로 나타난다.
사실주의
하우저는 사실주의를 낭만주의의 최종결과물로서 끊임없이 낭만주의 정신과 대결하는 사조로 파악했다. 이상향에의 동경, 꿈과 환상의 추구 등 현실도피의 낭만주의 예술과 엄격한/충실한 사실재현의 자연주의/사실주의 예술은 분명 대조가 된다. 하우저는 사실주의의 태동 배경을 크게 두 가지로 얘기하고 있는데, 하나는 < 과학주의> 이고, 다른 하나는 " 1848년 세대의 정치적 경험" 이다.
예술에 있어서의 과학주의란 " 현실의 예술적 묘사에 정밀과학의 제원칙을 적용" 하는 것을 말한다. 하우저는 자연주의 예술의 여러 요소들이 과학의 방법론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심리적 진실의 개념은 과학에서의 인과율 원칙을 따른 것이고, 플롯의 올바른 구성은 (과학에서의) 우연과 기적의 제거에서, 특정한 디테일의 활용은 아무리 하잘 것 없는 것도 흘려버리지 않는 과학적 관찰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는 19세기 중반 이후, 관념론에 반발하는 " 과학적 세계관의 승리" 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하우저는 낭만주의에서 사실주의에로의 이행 배경에 있어서 더 근원적인 것으로서 정치적인 이유를 들고 있다. 그것은 " 1848년 세대의 정치적 경험" 으로서, 혁명의 실패, 6월 노동자 봉기의 진압 등 이러한 모든 이상과 유토피아의 실패 이후 사람들은 이제 오로지 사실에만 집착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들고 있다. 바로 이 정치적 경험이 사실주의의 反낭만주의적 태도, 즉 " 현실로부터 도피하기를 거부하고 사실묘사에 있어서 철저한 정직성을 요구했고, 객관성과 사회적단결을 보장하는 길로서 개성의 배제와 무감각성을 추구케 했다" 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주의의 정치적 근원은 꾸르베의 사실주의 미술과 바르비종파의 풍경화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우저는 " 꾸르베의 그림에 나오는 농부들과 노동자들의 추한 꼴과 중산층 부인들의 뚱뚱하고 저속한 모습은 기존사회에 대한 항의이며, 그의 < 이상주의에 대한 경멸> 과 < 진흙탕에 뒹구는 짓> 이 모두 사실주의의 혁명적 전투수단의 일부라고 느끼는 것" 이라고 말한다.
다음과 같은 하우저의 멋진 표현이 있다.- 낭만주의자(풍경화가)들이 < 성스러운 숲의 詩>를 그렸다면, 자연주의자(사실주의 풍경화가)들은 < 시골생활의 산문> 을 그리는 셈이다.
인상주의
위와 같은 사실주의 미술의 정치적 사회적 인식과 그 표현은 얼마가지 않아 인상주의라는 보수적이고 수동적인 시민의 자족적 예술로 대체된다.
사실주의에서 인상주의로의 이러한 급격한 전이는 무엇 때문에 일어났을까? 다시, 2월 혁명후의 프랑스사부터 간략하게 정리해보자. 1848년 프랑스의 2월혁명 실패 후, 진보적인 지식인과 문인/예술가들은 그들의 좌절된 정치적 사회적 신념을 사실주의 운동으로써 전개시켜 가나, 급진적인 노동운동에 불안을 느꼈던 대다수의 부르조아들은 그 후 시행된 국민투표에서 나폴레옹의 조카를 대통령으로 추대하게 된다. 이후 나폴레옹3세는 정치적 독재를 단행하지만 독재를 하는 대신, 경제적 번영과 적극적인 외교로 국민적 영광을 약속한다. 그러나, 경제불황과 외교정책의 실패로 다시 의회정치를 부활시키는 등의 내정변화의 시기를 맞다가,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의 정치적 술수에 넘어가 보불전쟁에 빠지게 되고, 결국 패하게 된다. 이러한 혼란기에 < 파리코뮨> 이 잠시 등장하나, 역시 보수권력집단에 의해 곧 와해되고 만다.
이때에 이르러, 대다수의 부르조아들은 " 진보적인 사회운동에 따른 어느 정도의 출혈은 건강에 도움이 되었다"라는 식으로, 보수적이며 수동적인 입장을 취하게 된다. 또한, 산업자본주의는 오래 전부터 예정된 방향으로 더더욱 착실히 발전하게 되고, 기술의 진보는 현대적 의미의 대도시를 출현시킨다. 인상주의는 바로 이러한 대도시문명을 배경으로 태동한 예술이었다. 단지 그림의 내용이 전원의 풍경에서 도시로 옮겨졌기 때문이 아니라, 바깥 세상의 인상들을 현대적 도시인의 감정으로써 즉, 도시생활의 다양한 변화를 순간적인 인상의 묘사로써 표현하기 때문이다.
인상주의자들은 지속과 존속과 불변을 높은 가치로 평가해왔던 전통의 사고방식으로는 급변하는 도시 속의 생활감정을 제대로 나타낼 수 없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 속에서 등장한 인상주의 미술은 아래와 같은 형식상의 특징으로 현대미술의 기원으로서 평가받게 된다.
전통의 회화가 감각적 인상과 개념적인 사고의 종합으로써 2차원평면 속에 3차원의 일루젼을 만들어낸 반면, 인상주의 회화는 순전히 시각적인 경험에만 의존하여 화면의 평면화를 이룬 것으로서 " 회화 특유의 수단에 의한 회화의 자각" 을 얘기하고 있다. 이것은 현대예술(모더니즘 미술)의 관점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서 " 하나의 주제를 주제 자체 때문이 아니라, 색조를 위해" 즉, 주제의 회화적 요소를 위해 그린다는 것으로, 이에 따른 화면의 평면화와 색채/형태의 추상적인 사용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하우저는, 이어서 인상주의의 방법을 들라크르와와 콘스더블(보색효과)과 바르비종 화가들(외광파)의 방법에서 그 연원을 찾고는, 본격적인 인상주의 회화의 시작은 마네와 모네로부터 비롯된다고 본다. 도시생활을 주제로 하였고, 도시인이 그들의 바삐 변하는 환경 속에서 느끼는 순간적인 인상의 표현을 마네, 모네와 르느와르 등이 본격적으로 제시했다고 본 것이다.
그 다음 논의로, 하우저는 그 당시의 문학사조와 인상주의 회화와의 연결을 시도하고 있다. 앞서 살펴본 인상주의 회화와 같이, 예술적 표현을 순간적 기분에 귀속시키는 것은 기본적으로 인생에 대한 수동적인 태도, 즉 수용적 주체로서의 방관자의 역할에 대한 만족과 멀찍이 서서 바라보되 뛰어들지는 않겠다는 입장을 보여주는 것인데, 이는 바로 동시대 문학의 심미주의 운동과 연결이 되는 부분인 것이다.
마지막 논의로, 하우저는 인상주의 회화에 담긴 '시대의 정신'을, 19세기의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혁명적 사고의 틀을 제시했던 프로이트/ 니체/ 베르그송의 사상과 연결 짓고 있다. 이러한 연결고리가 되는 개념이 바로 < 자기기만> 이다.
회화에서, 당시 도시생활의 변화에 대한 격동적인 감정을 전통의 화법으로는 나타낼 수가 없었다. 변화와 순간을 묘사하는 것이 오히려 현실을 진리에 가깝게 반영하는 것 일 텐데도, 이를 전통화법의 기준에서 비판하는 것은 일종의 < 자기기만> 인 셈이라고 본 것이다. 이른바 '무의식의 발견'이다. 근대의 인간/의식에 관한 이해는 인간/의식은 본질적으로 투명하고 인간의 행동과 판단에 있어서 중심적인 위치에 있다고 보았으나, 사실 인간의 의식이란 우리의 깨어있는 의식으로는 알아낼 수 없는 또 하나의 다른 영역으로 나눠져 있고 이것이 오히려 우리의 의식과 행동을 좌지우지하는 것으로 파악했다.
사회에서 특정집단의 이익에 봉사하는 '허위의식'으로서의 < 이데올로기> 는, 바로 자신의 성적욕망을 왜곡하고 억제하려는 깨어있는 의식의 왜곡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인상주의는 < 회화의 자기기만> 을 자각한 것인데, 이는 프로이트가 무의식의 발견을 통해 < 의식의 자기기만> 을 고발한 점과, 베르그송이 근대의 시간/생명관의 비판을 통해서 < 지성의 자기기만> 을 들춰낸 것처럼 당대의 사상/세계관과도 동일 선상에 있다는 것이다. 회화에서의 인상주의가 현대미술의 출발점인 것과 마찬가지로 막스와 베르그송/니체, 그리고 프로이드의 사상 역시 현대사상에서 그 원류로 작동하고 있다.
구로구입시미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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