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레니즘 미술(Hellenism)
Great Altar, Pergamon
고전(古典) 그리스의 뒤를 잇는, 세계사상 한 시대를 규정짓는 개념이다. 헬레니즘이란 넓은 의미에서 고대 그리스 문화를 창출했던 그리스인들이 자신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했던 '헬레닉'이란 말과 연관되지만, 알렉산더의 사망으로부터 로마가 그리스를 최종적으로 정복했던 시기까지의 그리스 시대를 지칭하는 용어로 통용된다. 즉 알렉산더의 동방원정과 함께 형성된 새로운 문화를 그리스문화로 부르지 않고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들이 동방의 나라에 세운 제국의 이름을 따서 헬레니즘이라 부른 것이다.
이같은 의미로 헬레니즘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1863년 독일의 드로이젠이 그의 저서 《헬레니즘사(史)》에서 쓰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이 말은 그리스문화, 그리스정신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이 시대의 특징에 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리스문화의 확대·발전으로 보는 견해, 반대로 오리엔트문화를 통한 그리스문화의 퇴폐로 보는 등의 견해도 있으나, 그리스문화와 오리엔트문화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질적 변화를 일으키면서 새로 태어난 문화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시대범위】 헬레니즘 시대의 범위에 관해서도 여러 설이 있다. 먼저 그 시작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시아 원정 출발(BC 334)에 두는 설, 페르시아를 멸망시킨 해(BC 330)에 두는 설, 대왕의 죽음(BC 323)에 두는 설 등이 있다. 그 종말도 극단적인 경우는 마호메트의 출현까지로 보는 설이 있다. 그 밖에 로마 제정기(帝政期)를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시대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BC 330년 알렉산드로스의 페르시아제국 정복에서 BC 30년의 로마가 이집트를 병합하기까지의 300년간이 그 시대범위로 간주된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더듬어 올라가보면 아테네는 BC 480년 페르시아의 대규모 함대를 맞아 살라미스 해전에서 승리한 후 이번에는 육지로 쳐들어온 페르시아 군대를 BC 479년 그리스 본토 플라타에아에서 무찌름으로써 그리스 도시국가의 맹주로 그 지위를 확고하게 함은 물론 문화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페르시아 전쟁이 끝난 뒤로부터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그리스의 패권을 놓고 각축한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에 이르기까지 약 50년간 아테네는 문학, 미술, 정치 등 모든 분야에서 황금시대를 누렸으나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아테네의 힘과 창조성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BC 404년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패배함으로써 전쟁은 끝났지만 아테네의 영광은 더 이상 지속되지 않았다. 비록 전쟁에서는 승리했으나 30년간에 걸친 전쟁 결과 스파르타도 곧 약화되었으며, 잠시 테베가 군사적 패권을 잡았으나 오래 가지 못하고 영향력도 아테네와 비견할 수 없는 미미한 수준에 불과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의 젊은 통치자 알렉산더의 등장과 함께 독립된 도시국가들로 구성된 그리스는 마침내 최초로 통일되었다.
마케도니아인들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민족이긴 했으나 그리스 시민과는 분명히 다른 사람들이었고, 그리스가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고 있을 때 마케도니아는 변방에 있는 나라에 불과했으나 그리스가 페르시아의 침략에 대항할 때 그리스 연합군에서 지도적 지위를 확보하려 했던 마케도니아왕 필립2세는 기원전 338년까지 많은 도시국가들을 마케도니아에 합병하였다. 그러나 그리스통일과 강력한 왕국건설이란 그의 꿈이 실현되기 직전에 살해됨으로써 이러한 이상은 그의 아들 알렉산더에 의해 이루어졌다.
마케도니아의 지배에 저항한 반란이 테베에서 일어나자 알렉산더는 신속하고 단호하게 진압하였으며, 도시를 완벽하게 파괴해 버렸으므로 그리스인들은 알렉산더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단일한 세계국가 건설이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이집트와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인도로 진군할 때에도 그가 이끄는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알렉산더는 인도 북서부까지 진군하였으나 휘하 지휘관들의 반대에 부딛쳐 더 이상의 동진을 포기하고 철수하던 중 기원전 323년 32세란 젊은 나이로 바빌로니아에서 병으로 죽었다. 알렉산더에게는 아직 성인이 된 상속자가 없었으므로 그의 제국은 장군들에 의해 분할, 통치되었다.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그리스와 마케도니아는 안티고니드 가문이, 서부 아시아는 셀레우시드 가문이 통치하였으며, 기원전 3세기 초기부터 2세기 후반까지 진취적이고 교양있는 아탈리드 가문이 소아시아를 개척, 페르가몬을 수도로 정하고 헬레니즘 문화를 발전시켰다.
지역적 범위는 마케도니아·그리스에서부터 대왕의 정복지 전역(인더스 유역·박트리아·메소포타미아·소아시아·이집트)까지이며, 서방의 로마도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 문화권에 든다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로마는 포함시키지 않는 것이 관례이다.
【역사】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시킨 뒤 다시 동방으로 진군하였으나, 인더스강 유역에서 군대를 돌려 바빌론으로 돌아왔다(BC 324). 그러나 그 다음해 대왕이 갑자기 병사하자, 디아도코이(遺將)들은 서로 싸운 끝에 대왕이 남긴 영토를 분할하였다. 입소스전투(BC 301), 쿠르페디온전투(BC 281) 등을 거쳐 디아도코이의 세력 범위는 대개 결정되었다.
카산드로스(훗날의 안티고노스)왕조가 지배하는 마케도니아, 셀레우코스왕조가 지배하는 시리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지배하는 이집트의 3헬레니즘 왕국으로 분열하였으나 결국 로마에 합병되었다. 그리스 본토는 아이톨리아동맹·아카이아동맹이라는 두 도시동맹을 만들어 독립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문화의 중심으로서 아테네가, 상업의 중심지로 코린토스가, 그리고 에게해(海)의 섬 가운데서는 델로스섬과 로도스섬이 노예매매의 중개 무역지로서 번영한 것 외에는 쇠퇴 일로를 걸었다. 그리고 최후에는 역시 로마령(領)이 되었다.
【사회·경제】 헬레니즘 제왕국(諸王國) 가운데 마케도니아는 국력이 가장 약하였으나, 시리아·이집트에는 오리엔트풍의 강력한 군주국가가 성립되었다. 이집트는 지리적 조건이 좋고 물산(物産)도 풍부하여 헬레니즘 왕국 중에서 가장 강력한 전제지배가 확립되었다. 전국토의 소유권은 원칙적으로 국왕에게만 소속되었다.
신하에게 주는 사여지(賜與地), 병사에게 주는 봉토(封土), 신전령(神殿領) 등이 있었으나 이것도 점유권이 주어져 있을 뿐, 왕은 언제라도 이를 회수할 수가 있었다. 왕의 부(富)를 늘리기 위해서는 개간(開墾)이 필요했는데, 유력한 신하에게 토지를 주어 개간시키고 개간이 되면 다시 몰수한 실례도 알려져 있다. 농경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왕료지(王料地)는 ‘왕의 농민’이라고 불리는, 이동의 자유가 없는 농노적(農奴的) 소작인이 경작하였다.
상공업과 그 밖의 모든 산업경제는 왕 한 사람의 부를 위해 강력하게 통제되어 제유식물(製油植物)의 재배, 착유(搾油)와 맥주양조·제염(製鹽)·제지(製紙) 등 거의 모든 산업은 전매제였다. 광업·은행 등도 모두 왕이 독점하고 수입은 엄격하게 제한하였으며, 수출은 국내 소비를 채우고 남은 것만 사인(私人)이 행하였다.
이집트에는 알렉산드리아·나우크라티스·프톨레마이오스 등 그리스풍의 폴리스가 셋 있었다. 이 중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수도이기도 한 알렉산드리아는 상업항으로서 번영하였고, 또한 무세이온·대도서관 등이 있는 그리스적 학예의 중심지로, ‘없는 것은 눈[雪]뿐’이라고 할만큼 번영을 누렸다.
프톨레마이오스왕조는 수족이나 다름없는 관료군(官僚群)이 이집트를 강력하게 지배하였는데, 고래(古來)의 토착종교와 왕가의 극단적인 근친결혼과 같은 풍속·습관 등을 그대로 유지하고, 이집트 토착민과의 마찰을 피하여 현명하게 통치하였다. 신전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감독하였으나, 토착민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신관(神官)의 힘은 마침내 강력해져 프톨레마이오스왕조의 말기 왕권을 위협하였다.
그러나 헬레니즘 왕국 중에서는 가장 오랜 왕국으로, BC 30년 로마에 합병될 때까지 존속되었다. 셀레우코스왕조가 지배한 시리아에서도 오리엔트적인 전제군주국이 성립되었다. 그 지배영역은 헬레니즘 왕국 중 가장 광대하여 호족(豪族)과 어떤 종류의 자치권을 가진 민족(유대인 등), 영내(領內)에 많이 만들어져 있는 그리스풍의 폴리스 등 정치적으로 이질적인 요소가 많아 지극히 복잡하였다. 그리고 왕유지(王有地)는 ‘왕의 백성’이라고 불리는 농노적 농민이 경작하였다. 국토가 광대하고 정치적으로 복잡하였기 때문에 왕의 지배력이 고루 미치지 못하는 곳이 있어 멀리 파르티아·박트리아와 서쪽의 페르가몬 등이 독립하였고, BC 64년에는 로마에 합병되어 그 속주가 되었다. 마케도니아에 관해서는 자료가 없어 그 정치·경제 등의 상세한 내용이 알려져 있지 않으나, 로마와 싸워 패하여 BC 168년 로마령이 되고, BC 146년에는 그리스와 함께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문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정복한 각지에 만든 새로운 폴리스와, 그 뒤 셀레우코스왕들이 영내(領內)에 많이 만든 새로운 폴리스가 중심이 되어, 그리스문화는 오리엔트의 오지(奧地)에까지 침투하였다. 그리고 헬레니즘 세계에서는 간소화한 그리스어가 공통어(코이네)로서 사용되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오리엔트적인 전제군주풍의 의례를 채용하고, 페르시아 왕녀와의 결혼, 페르시아 귀족을 친위대로 채용하는 등 이민족 통치의 수단으로서 그리스문화와 오리엔트문화의 결합을 시도하였다. 그래서 전대(前代)와는 다른 새로운 헬레니즘문화가 탄생하였다. 이로써 그리스인이 이민족을 야만시한 관념이 희박해지고 세계시민주의가 역설되었다.
그리고 고전기의 엄격한 비례, 조화와 균제의 원리에 바탕을 둔 단아하고 우아한 아름다움 대신에 격동적이고 극적이며 관능적인 성격이 두드러진 예술이 나타났다. 자연이나 현실의 관찰이 세밀해지고 초상조각의 발달과 함께 충실한 사실묘사를 선호하는가 하면 소재범위도 다른 인종, 노인, 동물, 그 밖의 세속적인 것으로 넓어졌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문화의 중심이 아테네나 스파르타 등의 그리스 본토에서가 아니라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소아시아의 페르가몬, 시리아의 안디오키아 등으로 옮겨갔다. 도시국가의 자유로운 시민이 아니라 거대한 제국의 백성이 된 그리스인들이 세운 이 도시들은 그리스 문화를 모범으로 삼았으나 고전기의 그리스와는 완전히 다른 취향으로 그들의 도시를 장식했다. 헬레니즘 제국의 통치자들에게 도리아나 이오니아식의 단아한 건축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었으며, 그들은 보다 호사스럽고 장식이 풍부한 코린트 양식을 선호했다.
이 건축은 헬레니즘 시대의 취향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서 소아시아를 지배했던 아탈리드 왕조에 의해 기원전 170년경 페르가몬에 건립된 <제우스제단>의 한 부분이다. 건축의 기둥은 이오니아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제단 아래 부분의 조각은 고전기의 조각과 분명히 다른 격정을 보여준다.이 조각의 주제는 신과 거인들의 싸움을 다루고 있다. 그리스 고전조각의 조화와 세련미를 발견할 수 없고 대신 격정적이고 극적이며 그리스인들이 이른 바 '파토스(Pathos)'라 불렀던 격앙된 비극적 정서가 표출되고 있다. 흉측하게 생긴 거인족들이 신들로부터 공격을 받자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장면이 건축구조와 상관없이 계단을 따라 펼쳐지는 이 일련의 조각은 다분히 서술적이면서 동시에 고전기의 조각에서 볼 수 없었던 강렬한 정서적 긴장을 드러낸다.
고부조로 표현된 등장인물들-제우스나 아테나 등의 신과 하반신이 뱀으로 표현되거나 날개를 달고 있는가 하면 평범한 인간의 형상을 한 거인족들-의 소란스럽고 요동치는 운동감은 부풀어오른 근육과 소용돌이치는 옷주름 등에 의해 이 전투장면을 더욱 인상적으로 만들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각자 배역대로 다양한 자세와 표정으로 연기하고 있는 연극의 한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헬레니즘 미술은 인상적 효과를 표출하기 위해 극적인 요소에 많은 관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부조의 주제는 고전기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지만 단지 고전의 부활만이 이 시대 예술가들의 목표가 아니었다. 헬레니즘 시대의 조각가들은 고전기의 조각을 참조하여 그것을 그들 시대의 요구에 맞는 것으로 응용했다. 나아가 그들은 폴리클레이토스와 미론, 프락시텔레스, 스코파스 등로부터 배운 자연주의적 수법을 더욱 확장시켜 인간적 특징이 강한 조각으로 발전시켰던 것이다.
고전기로부터 헬레니즘으로 넘어가는 시기인 기원전 4세기의 조각에 나타난 새로운 변화의 분위기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자연주의를 향한 새롭고 활발한 추구와 이와 더불어 차별화(differentiation)에 대한 관심의 부활 되었다.
2) 예술가 사이에도 전문화가 이루어져 어떤 이들은 감정 묘사에 능숙했으며, 또 어떤 이들은 서정적 분위기와 보다 세심한 정서를 표현하는데 뛰어났다.
3) 새로운 개념들-때로는 추상적 관념까지도-이 예술의 주제가 되었다.
4) 여성누드조각의 관능성이 두드러진다.
기원전 4세기 조각에 나타난 이러한 특징은 헬레니즘에 이르러 더욱 강화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남자누드를 표현한 이 '토르소'는 비록 머리와 팔다리 부위가 없어지긴 했으나 남성의 신체에서 볼 수 있는 건강한 활력 못지 않게 관능성이 표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전조각에서 볼 수 없었던 극적 동세와 감각적 표현에의 관심을 발견할 수 있다. 관능성에 대한 관심은 여신의 형체를 신적인 차원에서 인간적 차원으로 끌어내렸다.
멜로스 섬에서 발견되었다는 이유로 '밀로의 비너스'로 불려지는 아프로디테의 모습은 폴리클레이토스의 콘트라포스토에 관능성을 덧붙인 전형적인 예로 볼 수 있다. 고졸기나 고전기의 여신들이 대체로 옷을 입은 형상으로 표현된 것인데 비해 기원전 4세기부터 완전히 벗은 신체의 여신이 나타나고 있음도 주목된다. 콘트라포스토는 이 누드조각의 관능성을 훨씬 감각적이고 매력적인 것으로 만드는데 이용되었던 것이다. 아울러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허공을 쳐다보는 장중함보다 극적인 동세가 선호되었음을 이미 페르가몬의 제우스 제단 부조를 통해 확인한 바 있는데, 이런 특징은 헬레니즘 조각가들에 의해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추구되었다. 나아가 헬레니즘 조각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주문했던 수집가들은 인간에게 두려운 존재인 신보다 보다 인간에게 친숙한 신, 이를테면 아프로디테와 승리의 여신인 '니케' 등을 더 선호했을 뿐만 아니라 개인주의의 발흥과 함께 초상조각의 제작도 활발해졌다.
특히 이국적인 것에 대한 관심은 그들의 적이었던 이방인들을 조각의 주제로 선택하게 만들었다. 페르가몬을 습격한 골(골족은 현재 프랑스인들의 조상을 일컫는다)족을 격퇴한 헬레니즘 왕국은 이 전쟁에서 패배한 골족의 전사가 자신의 아내를 죽이고 자살하는 장면을 조각으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이 작품에 나타난 삶과 죽음, 남성과 여성, 옷을 입은 아내와 누드로 표현된 전사, 방금 남편의 칼을 맞고 무기력하게 쓰러지는 아내와 남편의 긴장된 팔근육 등의 극적 대비는 이 조각이 그리스인들과는 분명히 다른 골격을 지닌 이방인에 대한 세심한 관찰 아래 제작된 것임을 알려준다. 헬레니즘 시대에 만연했던 새로움에의 관심은 비단 유럽의 다른 종족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의 흑인들, 남러시아의 스키타이인들을 소재로 한 조각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렇듯 이 시대의 조각은 매우 훌륭하였고 전시대의 특징인 이상화는 약화되고 보다 사실적·육감적으로 되었으며, 육체의 운동과 정신의 격동 등을 나타내기를 좋아하였다. 그렇지만 창조적인 문학 등은 오히려 쇠퇴하였다. 일반적으로 이 시대에는 그리스문화의 창조성이 점차 사라져가고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구로구입시미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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