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08, 2012

연필 드로잉 / pencil drawing


사고의 전환 드로잉

학생 작품












구로구입시미술학원



연필 드로잉 / pencil drawing



사고의 전환 드로잉

학생 작품


시험장 스타일





저서 "드로잉의 시작과 끝" 중에서




구로구입시미술학원


색채 드로잉 / Color Drawing

정물 색채 드로

종이 컵 자유 드로잉


학생 작품 




구로구입시미술학원/광명시입시미술학원

연필 드로잉 / pencil drawing



사고의 전환 드로잉

전기램프 / 학생 작품






드로잉이 쉬워지면 다른 장르의 그림들도 쉬워집니다.
드로잉 열심히 하세요.
사진 이미지 만으로 공부하진 마세요!




구로구미술학원 / 전원미술학원 구로 캠퍼스


드로잉, 소묘, 데생 / drawing



드로잉소묘데생 / DRAWING

양동근 _ 바람의 파이터




문하생 작품






구로구입시미술학원


드로잉, 소묘, 데생 / drawing


드로잉, 소묘, 데생 / drawing


축구선수 : 김남일




2005년 캔손지에 연필작품




구로구입시미술학원



11월 07, 2012

수험표 뒤에 붙이는 정답 확인표


수험표 뒤에 붙이는 정답 확인표



Good luc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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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06, 2012

기초디자인 / basic design _사고의전환



기초디자인 / BASIC DESIGN

사고의 전환 디자인



시험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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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디자인 / basic design _사고의전환


기초디자인 / BASIC DESIGN

사고의 전환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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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디자인 / basic design _사고의전환



기초디자인 / BASIC DESIGN

사고의 전환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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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 (Post Modernism) / 미술용어(Art Glossary)



포스트모더니즘 (Post Modernism)




 포스트 모더니즘은 지난 20세기에 걸쳐 서구의 문화와 예술, 삶과 사고를 지배해온 모더니즘에 대한 반동으로서 60년대 중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후기 모더니즘은 하나의 통일된 사조나 운동은 아니지만, 그 중심적 동기는 모더니즘을 통해 수립된 고급 문화와 저급 문화의 엄격한 구분, 예술의 각 장르간의 폐쇄성에 대한 반발이다.
 포스트 모던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쓴 것은 건축 비평가들이었는데 이는 1960년대까지 유행하던 엄격한 사각형 형태의 양식에 대한 반발로 나온 건축물에 대해 쓴 말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포스트 모던'적 경향이 분화되지 않은 과거의 예술을 소생시키려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다른 시대, 다른 문화로부터 양식과 이미지를 차용하는 예술은 모두 '포스트 모던'의 자격을 얻는다.
 포스트 모더니즘 작가들은 작품의 유기적 통일성을 부정한다. 그들은 통일성이나 일관성보다는 오히려 편리성이나 임의성 또는 유희성을 더욱 설득력 있는 예술적 원리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니까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작품은 '잘 빚어진 항아리'가 아니라 오히려 '산산조각으로 깨어진 항아리'에 해당되는 셈이다. 그런가 하면 프로이트가 말하는 '억압된 거들의 복귀 현상'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포스트 모더니즘은 모더니즘과 매우 적대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동안 가부장적인 모더니즘의 권위 아래에서 주변적인 위치밖에는 차지하지 못하면서 억압되었거나 무시되어 온 것들이 포스트 모더니즘에 이르러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인정 받으면서 부상되기 시작하였다. 다시 말해서 포스트 모더니즘은 무엇보다도 주변적인 것들의 부상이라는 점으로 특징 지을 수 있다.
 기성 문화에 반기를 드는 청년 문화를 비롯한 반 문화, 고답적이고 엘리트적인 고급 문화에 대항하는 대중문화, 제1 세계나 제2 세계의 문학에 도전하는 제3 세계의 문학, 가부장적 남성중심주의에 항거하는 페미니즘 문학 등이 바로 그것이다. 궁극적으로는 모두 탈중심화 脫中心化 나 탈정전화脫正典化 현상에서 비롯되는 이러한 현상은 포스트 모더니즘에 이르러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한마디로 말해서 포스트 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논리적인 연장이며 계승인 동시에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적 반작용이며 단절이다.
 한편으로 포스트 모더니즘은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을 포함한 모더니즘의 기본 원리를 논리적으로 계승하여 극단적으로 발전 시킨다. 비록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모더니즘에서 발견되거나, 또는 그동안 모더니즘에서 거의 무시되거나 소홀히 간주되어 오다시피 한 것들이 포스트 모더니즘에 이르러서는 핵심적인 지배소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와는 정반대로 모더니즘에서는 핵심적인 지배소로서 기능을 담당해 온 것들이 포스트 모더니즘에 이르러서는 주변적인 위치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그 핵심적인 지배소로서는 네 가지가 있는데, *상호 텍스트성 *탈 장르화 혹은 장르 확산 *자기 반영성 *대중 문화에 대한 관심등이 있다.
 포스트 모더니즘이 그동안 장르와 장르 사이의 '경계선을 넘는' 작업에 큰 관심을 보여 왔다고 한다면, 그것은 또한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사이의 '간격을 좁히는' 작업에도 적지않은 관심을 보여 왔다. 사실상 포스트 모더니즘이 처음으로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은 다름아닌 대중 문화와의 관련성에서 였으며, 지금까지도 그것은 여전히 대중 문화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포스트 모더니즘이 모더니즘과 구별되는 중요한 차이점 중의 하나는 고급 문화와 대중문화 사이에 놓여 있던 커다란 장벽을 허물어 버렸다는 데에 있다. 힐튼 크레머가 말하는 이른바 '속물들의 복수' 현상이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 하였다. 이러한 '억압된 것의 복귀' 현상은 문화 영역의 경우 그 동안 무시되어 왔거나 소홀히 취급받아 온 장르들이 새롭게 가치를 인정받는 데서 가장 잘 나타난다. 예를 들어 일부 특권층만을 위한 난해한 엘리트 예술보다는 더욱 대중적인 팝 아트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경우이고 문학에서도 마찬가지 경우이다. 한마디로 점잖은 전통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며, 가식적이지 않은 인간성에의 희구이며, 자연인 인간의 모습을 찾고자 하는 몸부림의 운동이다.
 포스트 모더니즘 미술가들의 또 다른 주된 특징은 모더니즘적 문화와 사고 방식이 세워놓은 엄격한 지배의 틀을 거부하는데 있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소통이 불가능한 정치, 문화, 전문화의 영역을 깨뜨리고, 삶과 문화의 경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예술에 정치와 이데올로기를 끌여 들여 비판적으로 다룬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알기 위해서는 모더니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서구에서 근대 혹은 모던(modern) 시대라고 하면 18세기 계몽주의로부터 시작된 이성중심주의 시대를 일컫는다. 종교나 외적인 힘보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믿음을 강조했던 계몽사상은 합리적 사고를 중시했으나 지나친 객관성의 주장으로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도전 받기 시작하였다. 니체, 하이데거의 실존주의를 거친 후 포스트모던 시대는 J.데리다, M.푸고, J.라컨, J.리오타르에 이르러 시작된다. 니체와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은 이들은 계몽주의 이후 서구의 합리주의를 되돌아보며 하나의 논리가 서기 위해 어떻게 반대논리를 억압해왔는지 드러낸다.
 '데리다' 는 어떻게 말하기가 글쓰기를 억압했고, 이성이 감성을, 백인이 흑인을, 남성이 여성을 억압했는지 이분법을 해체시켜 보여주었다. 푸고는 지식이 권력에 저항해왔다는 계몽주의 이후 발전논리의 허상을 보여주고 지식과 권력은 적이 아니라 동반자라고 말하였다. 둘 다 인간에 내재된 본능으로 권력은 위에서의 억압이 아니라 밑으로부터 생겨나는 생산이어서 이성으로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라간은 데카르트의 합리적 절대자아에 반기를 들고 프로이트를 귀환시켜 주체를 해체한다. 주체는 상상계와 상징계로 되어 있고 그 차이 때문에 이성에는 환상이 개입된다는 것이다. 리오타르 역시 숭엄(the Sublime)이라는 설명할 수 없는 힘으로 합리주의의 도그마를 해체한다. 따라서 철학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의 도그마에 대한 반기였다.
 문화예술의 경우는 시기구분이 좀더 세분화된다. 19세기 사실주의(Realism)에 대한 반발이 20세기 전반 모더니즘(Modernism)이었고 다시 이에 대한 반발이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사실주의는 대상을 그대로 옮길 수 있다는 재현(representation)에 대한 믿음으로 미술에서는 원근법을 중시하고 어떻게 하면 실물처럼 그릴까 고심했다. 문학에서는 저자가 객관적인 실재를 그릴 수 있다는 믿음으로 스토리가 인물을 조정하여 원근법과 같은 효과를 나타내었다. 이런 사실주의는 20세기에 들어서 베르그송의 시간의 철학·실존주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등 객관진리, 단 하나의 재현에 대한 회의가 일어나면서 도전 받는다. 대상은 보는 자의 주관에 따라 다르다는 전제도 미술에서는 인상주의로부터 시작되어 입체파 등 구상보다 추상으로 옮아가고 문학에서는 저자의 서술 대신 인물의 서술인 독백(‘의식의 흐름’이라고도 함)형식이 나온다.
 모더니즘은 혁신이었으나 역설적으로 보수성을 지니고 있었다. 재현에 대한 회의로 개성 대신에 신화와 전통 등 보편성을 중시했고 피카소, 프루스트, 포크나, 조이스 등 거장을 낳았으나 난해하고 추상적인 기법으로 대중과 유리되었다. 개인의 음성을 되찾고 대중과 친근하면서 모더니즘의 거장을 거부하는 다양성의 실험이 포스트모더니즘이었다. 따라서 철학에서는 모던과 포스트모던 상황이 반발의 측면이 강하지만 예술에서는 연속의 측면도 함께 지닌다. 비록 이성과 보편성에 의지했지만 이미 재현에 대한 회의가 모더니즘(현대성)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미술에서는 추상 대신에 대중성을 띄고 다시 구상이 등장하였다. 그런데 팝아트처럼 같은 대상을 여러 번 찍어 ‘다르게 반복하기’를 선보이는 경우, 모나리자 등 친숙하고 고유한 원본을 패러디 하여 ‘다양한 재현들’을 선보이는 경우, 예술가의 권한을 축소한 미니 멀 아트 등, 단 하나의 절대재현을 거부한다. 문학에서는 인물의 독백이 사라지고 다시 저자가 등장하는데 더이상 19세기 사실주의와 같은 절대재현을 못 한다. 작가가 자신의 서술을 되돌아보고 의심하는 자의식적 서술(메타 픽션), 현실과 허구의 경계 와해, 인물과 독자에게 선택권을 주는 열린 소설, 보도가 그대로 허구가 되는 뉴저널리즘, 작가의 권한을 최소화한 미니멀리즘 기법 등이 쓰인다. 영화와 연극 역시 사실주의의 패러디로서 환상적 기법, 자의식적 기법을 사용한다. 무용에서는 토슈즈를 신었던 19세기 발레에서 맨발의 자유로움과 기법을 중시한 모더니즘, 그리고 다시 운동화를 신는 포스트모던 댄스로 대중성과 개성이 중시된다. 서사(narrative), 기호학 등 비평이론의 경계와해는 공연예술에서 탈 장르로 나타난다. 포스트모던 건축은 기능주의 적이고 중앙집권적인 밋밋한 건축에서 장식과 열린 공간을 중시하고 분산적이며 옛것에 현대를 접합시킨 패러디가 유행한다.
 개성·자율성·다양성·대중성을 중시한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이념을 거부했기에 탈 이념이라는 이 시대 정치이론을 낳는다. 또한 후기산업사회 문화논리로 비판받기도 한다. 산업사회는 분업과 대량생산으로 수요에 의해 공급이 이루어지던 시대이다. 이제 컴퓨터·서비스산업 등 정보화시대에 이르면 공급이 넘치고 수요는 광고와 패션에 의해 인위적으로 부추겨진다. 빗나간 소비사회는 때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실험적이고 긍정적인 측면을 무력하게 만들기도 한다. 탈 이념, 광고와 패션에 의한 소비문화, 여성운동, 제3세계운동 등 포스트모던시대의 사회정치현상은 한국사회와도 무관하지 않다. 미술·건축·무용·연극에서는 실험과 저항이 맞물려왔고 80년대 말 동구권의 사회주의 몰락과 문민정부의 출현은 한국 문학과 예술에도 포스트모던 바람을 일게 하였다. 근대나 현대는 서유럽에 비하여 짧고 급속히 이루어졌기에 시민의식과 기술산업사회가 균형을 이룰 수 없었다. 서유럽과 한국사회를 똑같이 볼 수 없는 여러 상황에 의해 한국사회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영역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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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스트모더니즘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서구에 존재하는 하나의 시대정신(Zeitgeist), 인식소(Episteme), 또는 패러다임(Paradime)의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이론적 지주로 알려지고 있는 이합 핫산(Ihab Hassan)은 1987년에 발행한 '포스트 모던한 전망 속의 다원주의'라는 저서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여덟 가지로 정리한다.
① 불확실성(Indeterminacy)
경제학자 갈브레드가 2차 대전 이후의 서구세계를 '불확실성의 시대'로 규정지은 것처럼 과학분야에서도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Karl Heisenberg)의 「불확실성의 원리」, 토마스 쿤(Thomas S. Khun)의 「패러다임」, 폴회이에르 벤드의 「과학의 다다이즘」등이 대두되면서 사회 각분야에서 상대주의적이고 불확정적인 세계관이 주류를 이루었다.
"과학은 근본적으로 무정부주의적 사업이자 무정부주의는 법과 질서의 대안보다 훨씬 인도적이며 발전을 고무시켜 준다."고 주장하고 자신을 "변화와 실험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영역에서조차도 즐거운 실험을 착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 신 다다이스트"라고 주장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특정한 유파가 아니라 사회의 주류를 이루는 사조의 견해, 그리고 문학과 미술 등 예술 전반에 걸쳐 개방성, 해체, 반항, 변용, 다원성, 이단의 정신 등의 불확정적인 이론들을 전부 포괄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② 단편화(Fragmentation)
포스트모더니즘은 사회적, 인식론적 종합을 거부하고 총체성을 오명으로 여긴다. 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논하는 유명한 글의 결론 부분에서 "총체성에 선전 포고를 하자. 제시할 수 없는 것에 증인이 되자, 차이를 활성화하여 차이의 명예를 구해내자"고 주장한다.
확신, 차이, 변증의 시대가 되며 몽따지 수법, 꼴라쥬 등의 기법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은유와 환유가 중요시되고 역설, 배리, 병렬결합이 자주 등장하는 정신분석적 시대가 도래한다.
③ 탈 경전화(Decanonization)
리오타르는 현대사회를 지배담론(Masternarrative)의 탈 권위와 붕괴의 시대라고 지적하며 그 대신 소수의 담화이며 언어게임의 이질성을 보존하는 소설화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서구의 전통적인 형이상학 체계인 진리, 주체, 초월적 이성 등을 거부하고 규범과 경전에 대한 도전은 엘리트주의, 남성우선주의를 부인할 뿐 아니라 대중의 참여와 비평을 유도하며, 대중문화, 여성문화, 민중미술, 제3세계의 예술, 소수민족 예술, 노동자 예술, 이방인의 문화에 대한 관심 등의 대중 예술이 주류를 이루게 한다.
④ 재현 불가능성(Unrepresentability)
장르가 붕괴되고 혼합되는 양상을 보일 뿐만 아니라 많은 작가들이 모방을 거부하고 예술의 한계를 추구하며 소모를 즐기고 침묵 속에 존재하면서 예술고유의 재현(Representation)양식을 문제시하여 반리얼리즘의 성격을 가른다. 리오타르는 동시의 상황은 재현이 불가능하다고 보고 거기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헤겔의 변증법적인 종합적 분석대신 구대 불가사이를 인정한 칸트의 '숭고미(Sublime)'의 개념을 증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현대 기술 문화의 무형태성, 공해, 절대 등의 본질은 본질적으로 재현할 수 없는 것으로 향해 가는 것이며 좋은 형식들이 주는 위안을 거부하고 새로운 재현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⑤ 혼성모방(Hybridization)
풍자적, 조롱적 모방, 우스운 모방을 포함하는 것으로 장르의식의 붕괴와 혼합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이것은 다원적이고 확산적이며 논리를 무시하는 유동적인 현상황에 맞추기 위한 전략으로 문학에서는 '뉴 리얼리즘', '논픽션 소설'등으로 나타나서 허구와 사실이 두드러지게 배합됨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특성은 전통에 대한 다른 개념을 보완하다. 지속과 단절, 고급 문화와 저급문화가 혼합되고 현재 속에서 과거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확장시키게 된다. 다원적인 현재 속에서 모든 형식들은 현재와 현재가 아닌 것, 같은 것과 다른 것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변증법적으로 작용하여 현재와 과거의 동시성을 획득할 뿐만 아니라 공간 상호성 즉 병렬적, 수평적, 평등적 공간의 확산을 통한 공동체 의식도 얻게 된다.
⑥ 대중주의(Populism)
고급문화와 본격 모더니즘에 대한 적대감이 역력히 드러나며 대중문화에 대해 관심을 보인다. 마르쉘 뒤상의 기성풍 이론은 예술의 기존 관념을 깬 것으로 '이미 만들어진' 즉 주변의 흔한 대상물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창조하였고 앤디워홀은 스프깡통, 브릴로 상자, 슈퍼맨 만화 등 대중적인 사물을 이용하여 혼합 모방기법을 연출하였다. 또한 화가인 라우센버그에게서 재미있는 것은 도시의 상업적인 추함에 영원성과 자연의 불변성을 부여한다는 점이다. 그는 도시 일상의 재료들을 즐겁게, 그리고 전적으로 수용한다. 그에게는 도시의 추한 면은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새로운 방식으로 이 세상을 볼 수 있도록 우리의 의식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다.
 ⑦ 행위(Performance)와 참여(Participation)
포스트모더니즘은 직접 행위와 대중의 참여를 유도하며 행위로 연출되기를 기대한다. 예술은 행위를 통하여 시간, 공간, 또는 사람들에 의해 변화되고 완성된다.
요즈음은 예술의 여러 가지 경향을 관통하는 인식들은 '놀이'라는 개념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많은 예술가들이 엄격한 통제와 인간관계의 틀을 버리고 우연의 작용을 신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예술에서도 구도보다는 과정이 더 중요한 것이 되었고 존재하고 의미하기보다는 작용하게 된다고 볼 수 있다.
⑧ 보편내재성(Immensity)
앞서 지적한 불확실성의 분산은 거대한 확산을 이룬다. 보편 재재성의 경향은 율동, 상호작용, 의사소통, 상호의존, 상호침투 등의 잡다한 개념들에 의해 드러나는데 이러한 개념들 속에서 가치관의 세계화, 보편화 경향을 찾아낼 수 있다. 이러한 개념은 이미 아놀드 토인비의 영혼화, 어비 다드로즈의 개념화, 빅 인스트홀러의 무상화, 칼 마르크스의 역사화 한 자연 등의 개념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와 같이 상징을 통해 인간의 정신자체를 일반화하려는 정신적인 능력이 점점 커지고 있고 인간은 새로운 통신수단과 전자매체들 그리고 새로운 기술을 통해 의식과 정신의 끊임없는 확장을 경험한다.

  최초에 발행된 <포스트모더니즘 Postmodernism>에서 마이클 뉴만(Michael∼Newman)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요 창조방법을 다음과 같은 여덟 가지로 분류한다.
트랜스아방가르드, 저자의 죽음, 알레고리, 도취와 불가사의, 모조, 패러디, 브리콜라주(Bricolage)등 또한 어떤 학자들은 패러디(린다 허치언), 모조 (보드리야르), 차용 (레오 스타인보그), 그리고 혼성모방 (프레드릭 제임슨)등을 주요 창조방법이나 특성으로 내세우기도 한다 이 점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보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창조전략을 정리하면 재현, 패러디, 이중 코드, 전도된 아방가르드 등으로 구분된다고 볼 수 있다.
① 재현(representation)
  포스트 모던 세계에서는 삶이 재현에 의해 완전히 매개되어 있다. 근.현대를 지나면서 세계는 인공위성, 컴퓨터 출현으로 벤야민이 말한 '기계적 복제의 시대' 를 훨씬 앞지를 만큼 고도로 발전되어 왔다. 이에 대해 현대문화가 내재적으로 재현과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정도로 재현의 위기상태에 놓여 있다는 논의가 있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데리다의 재현으로부터의 '도피 불가능성'과 푸코의 인식론 속에 밀착되어 있는 전통적 재현에 관한 비판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재현은 불가피하다고 보여진다.
 포스트모던의 재현은 리얼리즘처럼 소박하고 낙관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리얼리티는 어떻게 의미될 수 있으며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지를 문제시한다. 즉 그것은 리얼리즘을 말소시키거나 지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의식적으로 재현의 존재의미를 일깨우는 것, 다시 말해 리얼리즘을 분해하여 재창조하는 것이지 리얼리즘에 직접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포스트모더니즘 전략들은 매체를 투명명료성과 언어와 세계간의 혹은 기호와 관련 물과의 자연적이고 직접적 결합을 추구하는 리얼리즘적 재현을 비판하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삼는다. 물론 이 같은 전략은 모더니즘에서도 발견된다. 하지만 모더니즘의 경우, 매체의 능력과 의미체계의 자기충족성을 더욱 강조함으로써 의도적으로 지시대상에 치명을 가하기 위한 것이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목적하는 바는 역사적으로 입증된 양자의 힘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리얼리즘의 투명성과 모더니즘의 반성적 반응을 비본성화시키는 일이다. 그리고 이것이 포스트모더니즘 재현의 불협화음적 책략이 된다.
 이처럼 리얼리즘의 현실반영, 모더니즘의 자율성을 문제시하고 '비교조화(dedoxifing)'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 재현은 예술과 세계의 새로운 가능성에 주목한다. 터부시 되어오던 전략들을 소환하면서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재현의 패러디와 재차용(reaappropriation)을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 재현의 역사 자체를 예술의 담론과 세계의 담론 사이에 놓인 경계선이 포스트모던 이론과 실천 속에서는 상호 침범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② 패더디(parody)
  패러디(때로는 아이러닉한 인용, 혼성, 모방, 차용 또는 상호 텍스트성)는 포스트모던의 지지자나 반대자를 가릴 것 없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요체로 간주되어 왔다. 실제로 많은 예술가들은 패러디에 관심을 기울여 재현의 역사를 보여주기 위한 방식으로 과거의 이미지들을 발굴해 내는 행위에 주력해왔다. 솔로몬 거더우(Solomon Godeau)의 표현처럼, 뒤샹의 모더니즘적 'ready-made' 는 이제 포스트모던의 'already-made'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 예술을 패러디화하는 것은 '향수' 때문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 현재의 표상들이 과거로부터 유래되었으며, 지속성과 차이를 함께 지닌 이념적인 결과로서 유래되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패러디는 또한 예술적 독창성과 유일무이성 그리고 자본주의의 소유권, 재산권에 관한 개념들 같은 인본주의적 관점을 검증한다. 패러디(어떤 복제의 형식과 더불어)에 의해 희소성이 있고 유일하며, (상업적으로)가치 있는 진품성은 여지없이 의문시된다. 이것은 예술이 이제 그 자체의 의미나 가치를 잃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패러디 작품은 '재현의 정치학' 을 전제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이 포스트모던 패러디에서 공인된 관점은 아니다. 지배적인 해석은 포스트모더니즘이 과거 형식들을 자유롭고, 장식적이며, 반역사적인 방식으로 인용할 수 있게 만들뿐만 아니라 이것이야말로 각종 이미지들이 범람하는 현사회의 가장 적절한 문화적 모델이 될 수 있다는 입장이다.
 패러디를 '재현의 정치학'이라고 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핼 포스터(Hal Foster)에 따르면, 혼성모방 (pastiche) 은 신보수주의적 포스트모던의 '전형적 기호'가 되어왔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과거의 맥락과 연속성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상호 모순적인 '예술작품과 생산양식'을 허황되게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린다허치언은 포스트모던 패러디는 그것이 인용하는 과거 재현물의 맥락을 부정하지 않으며, 우리가 오늘날 불가피하게 과거와 유리되어 있음을 환기시키기 위해 아이러니를 사용할 뿐이라고 반박한다. 현재는 과거의 지속이며 다만 거기에는 역사가 빚어낸 아이러닉한 차이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포스트모던 패러디에는 모순적 형식들을 일거에 해결하지 못하지만, 그러한 모순을 밝히는 힘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한 모순은 재현의 힘과 한계를 동시에 일깨워주는 작품 속에서 발견된다. 다시 말해 허치언은 역설적으로 자신이 반대하는 리얼리즘 관습에 의존하여 재현의 복합성과 그 밑에 깔린 정치성을 나타내는 것을 포스트모던 패러디라 말하면서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재현의 정치학'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③ 이중 코드(plural coding)
  이중 코드는 주로 건축분야에서 사용되는 전략적 특성이긴 하지만 그 일반적인 원리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보다 구체적으로 부각시키므로 그것이 어떠한 전략인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포스트모던 건축에서는 다원적인 상징적 차원들을 재 도입하고 부호체계를 혼합시키며, 지방 특유의 언어들과 지역 전통을 도용하는 행위들을 선호하게 되었다.
 젠크스(Charles Jencks)는 건축가들에게 두 방향, 즉 '서서히 변화하는 전통적인 부호체계와 한 이웃이 갖고 있는 특수한 민족적 의미라는 방향 하나와 빠르게 변화하는 건축상의 유행과 전문주의의 부호체계라는 또 다른 방향을 향하여' 동시에 바라볼 것을 제시한다. 즉 젠크스는 민족적인 것과 국제적인 것, 의미와 유행, 전통적인 것과 새로운 것의 괴리를 좁힐 수 있는 예술의 방식을 모색했던 것이다.
 포스트모던 건축에서 가장 뚜렷하고 빈번하게 나타나는 이러한 다원주의 형식은 과거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인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모더니즘 예술이 고전적인 것을 추방하면서 과거와의 단절을 꾀하는 데 고무되었다면,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은 역사적 스타일과 기법을 복원하고 재창조하는 새로운 의지를 보여준다. 젠크스의 말을 빌리면, 이것은 건축언어의 상대성에서 진일보한 결과라고 한다. 즉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에서 주목을 끌어왔던 다양한 형식의 부활주의 속에서, 우리는 건축의 동시적 맥락뿐만 아니라 일시적이며 동시적 맥락을 충족시키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젠크스는 현대적인 것과 고전적인 것, 기능적인 것과 장식적인 것, 가시적인 것과 대중적인 것의 조화를 기대하면서 그가 말한 '진보적 절충주의'의 시대를 보다 낙관적으로 전망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진보적 절충주의'속에는 "다른 종류의 의미들이 정신과 육체 같은 상반된 기능을 추구하면서 상호 관계하고 상호 교호할 수 있도록"하는 다가치성이 내포된다고 설명하였다.
이중코드는 맥락에의 관심과 역사에의 관심을 의미심장하게 엇물리게 한다. 젠크스의 이중코드가 역사적 이원성을 일원화시킨다면, 케네스 프램턴 (Kenneth Frampton)은 맥락의 이원성을 극복하는 방안을 제시한다.
 케내스 프램턴은 '비판적 지역주의(critical regionalism)'라는 글 속에서 문화적 차이가 국제적인 건축문법의 획일성으로 사라지는 경향을 저지하는 건축을 구상한다. 프램턴에 따르면 '비판적 지역주의'란 모던 건축 빌딩 형식에 반대하거나 그 속에서 지역적 특수성을 발전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하여 프램턴은 이런 지역주의 형식을 산업 사회 이전의 모델이나 빌딩 설계 방법으로 회귀시키는 단순한 과거에의 동경 행위와 조심스럽게 구별짓는다. 그에 따르면 이 지역주의는 '비판적'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새로운 것과 전통적인 것을 새롭게 결합시키는데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특수한 지역성의 언어는 모더니즘 속에서 일찌기 발견된 것이라 할지라도 지역 전통은 물론이고 지역의 풍토나 지질에 관한 문제를 감안한 새로운 것과 전통적인 것의 이중 코드를 나타냄으로써 생산될 수 있다고 말한다.
 젠크스와 마찬가지로 프램턴은 현대예술의 추상을 전통적으로 서구 합리성 인식론적 규율과 결합되었던 시각의미의 야만적 지배를 가져다준 결과로 파악한다. 그리하여 그는 '읽히는' 빌딩을 확산시키고, 빛과 어둠, 뜨거움과 차가움의 세기를 조절하는 등 의미의 범위를 넓히는 '저항의 건축'을 강조했던 것이다.
④ 전도된 아방가르드
  모더니즘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처럼 아방가르드에 대한 포스트 모던적 태도는 상반되게 나타난다. 하나는 철저하게 아방가르드를 거부하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아방가르드의 전략과 이상을 실질적으로 재포착하고 고도화시키려는 입장이다.
본래 아방가르드의 개념은 모더니즘의 핵심이다. 그러나 모더니즘에 관한 많은 설명들은 아방가르드의 초점의 범위를 미리 앞질러 가버렸다.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은 미적 형식에서 이념적 물질적 계기를 발전시켰고 미술에 있어 창조를 "제조"로 작가를 "생산자"로 대체하는 개념과 기능의 적극적인 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아방가르는 점차로 미학과 정치적 영역의 분리, 즉 초기의 아방가르드의 정치적인 도전들이 예술가 개인의 형식적 실험의 제한된 탐구로 떨어져 분리의 입장으로 후퇴했다. 이 같은 정치적 영역과 문화적 영역의 의도된 분리의 정당화는 키치, 대중문화를 철저하게 거부하는 양식으로 전개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러한 양상을 비판하며 아방가르드가 경멸해온 대중문화에 대해 귀족적으로 거리를 유지해온 태도를 가차없이 버린다. 이것은 귀치와 대중문화의 수용을 의미한다.
 앤디워홀과 로이 리히텐스타인 같은 팝작품이 그 예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아방가르드는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전략적으로 수용된다. 19세기 후반구의 예술적, 사회적 편견에 대해 구체적 방식으로 대응하려는 태도가 문화적으로 점차 보편화되면서 아방가르드의 의미는 혁신적 의도를 지닌 예술 조류를 지칭하는 의미가 점차 뚜렷해지기 시작한다. 레나토 포지올리(Renato Poggiloi)는「아방가르드의 이론」이란 저서에서 아방가르드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첫째, 적극적 행동주의(Activism) - 행동, 다이너미즘, 전진, 탐험정신
둘째, 대립의식(Antagonism) - 역사적 사회적 기본질서에 대한 대립의식, 반전통주의
셋째, 허무주의(Nihilism) - 파괴성, 유치함, 극단적 행동
넷째, 불안(Agonism) - 낭만적 불안, 긴장, 희생, 정신적 패배주의
다섯째, 미래주의(Futurism) - 미래의 예술에 대한 예견이나 예고
위의 특성들 중에서도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보여지는 몇 가지의 특성들과 공통적으로 보인다. 특히 대립의식은 모더니즘에 저항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상당부분 공통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또한 아방가드로와 숭고미의 결합을 요구한 리오타르 역시 모더니즘 에너지의 개개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종국의 모더니즘이 아니라 발생기의 상태에 있는 모더니즘이며 이러한 상태는 지속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세잔 피카소, 칸딘스키, 클레, 몬드리안, 말게비치, 뒤샹과 같은 아방가르드 작가들에 의해 고양론 모더니즘의 원리에 대해 탐구하면서 "아방가르드의 실제적 진행은 모더니티의 가정들을 파고드는 탐색의 길고, 완고하고, 고도로 책임 있는 노동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다원화되고 있고 대중문화는 그러한 사회에서 커다란 위력을 나타내고 있다. 이제는 대중문화를 인위적인 입장에서 거부하는 식의 태도는 지양되어야 할 때이다. 대중 매체에 의해 문화가 형성되고 소멸된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매스미디어의 발달은 아방가르드의 본래적 의미를 퇴색하게 했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리얼리즘과 재현성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인다는 점에서 또한 모더니즘과 매우 유사한 입장을 갖는다. 리얼리즘의 여러 특징 가운데서도 특히 모방이론에 근거하는 재현성은 모더니즘을 리얼리즘과 구별짓는 가장 중요한 특징중의 하나이다. 낭만주의 전통에 입각한 작품을 가리켜 '아름다운 거짓말'로 간주하던 리얼리즘의 작가들은 객관적으로 모방하거나 반영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예술적 목표로 삼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재현성에 대한 회의는 모더니즘보다 포스트 모더니즘에 이르러 한결 더 첨예하게 부각되기 시작했다.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은 리얼리스트들과는 달리 자연이나 우주 또는 삶의 실재에 대하여 그렇게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지 않다.
 실제 세계보다는 오히려 창조된 세계를 더 중시하는 그들은 실제가 예술적 창조에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포스트 모더니즘이 보여주는 반리얼리즘적 입장과 비재현성에 대한 강조는 무엇 보다도 자기 반영성, 그리고 그것에 기초한 메타 픽션에서 잘 나타난다. 흔히 포스트 모더니스트 들로 범주화되는 대부분의 작가들은 이러한 자기 반영적 메타픽션을 매우 중요한 쟝르로 간주한다. 그러나 자기 반영적 실험성이 모든 사람들에게 다 환영받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칭찬보다는 오히려 비난의 대상이 되어 왔다. 로버트 올터는 [부분적인 마술]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의 극도의 실험성을 가리켜 '자유'가 아니라 '방종'에 해당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은 "모더니스트들이라는 거인에서 태어난 난쟁이 후예들로서 삶으로부터 등을 돌린 채 자신의 예술을 통한 일종의 예술적 자위 행위의 희열에 탐닉해 있다"고 주장한다.

  기성 전통과 인습에 대한 심각한 도전과 강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모더니즘은 권위나 중심에 대한 갈망을 완전히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것은 20세기 현대에 만연되어 있는 혼돈과 무질서를 제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권위나 중심에 의존 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모더니즘은 형식이나 기교면에서는 매우 급진적이고 때로는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내용이나 주제면에서는 여전히 보수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더니즘이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는 이중적이고 양면적인 성격이다.
 모더니즘의 경우 문학을 비롯한 예술 장르는 마치 군대의 계급이나 천사의 계급 조직처럼 서로 엄격히 구분되어 있었다. 그러나 포스트 모더니즘에 이르러 이러한 장르에 놓여 있던 높은 장벽이 무너지고 각각의 장르가 서로 혼합되고 결합되기 시작 하였다. 레슬리 피들러가 말하는 이른바 '경계선을 넘고 간격을 좁히는'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탈장르화' 또는 '장르확산'으로 잘 알려진 현상이다.
 고급 예술이 지향하는 진지성과 엘리트주의적인 특성을 비판하는 동시에, 그동안 구체적인 일상적 삶으로부터 괴리되어 있던 예술을 삶 속에 끌어들이고자 한 포스트 모더니즘 작가들은 '예술을 삶 속에 통합시키는 것'을 가장 중요한 심미적 목표로 삼았다. 특히 맨 선두에 서서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사회질서를 수립하는 일종의 예술적 게릴라에 해당되는 임무를 수행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는 아방가르드의 특성과 같다. 그래서 포스트 모더니즘을 '네오 아방가르드 '라고 부르기도 한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논리적 계승이며 발전인 동시에 그것에 대한 비판적 반작용이며 단절이고, 야누스처럼 두 개의 상이한 얼굴을 지니고 있다. 21세기를 눈앞에 둔 '문지방에 선' 시기에 살고 있는 우리는, 19세기를 마감하는 분수령에서 매슈 아놀드가 느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한 세계는 이미 사멸되고 다른 세계는 아직 새로이 태어나기에는 무력한 두 세계" 사이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개성·자율성·다양성·대중성을 중시한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이념을 거부했기에 탈이념이라는 이 시대 정치이론을 낳는다. 또한 후기산업사회 문화논리로 비판받기도 한다. 산업사회는 분업과 대량생산으로 수요에 의해 공급이 이루어지던 시대이다. 이제 컴퓨터·서비스산업 등 정보화시대에 이르면 공급이 넘치고 수요는 광고와 패션에 의해 인위적으로 부추겨진다. 빗나간 소비사회는 때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실험적이고 긍정적인 측면을 무력하게 만들기도 한다. 탈이념, 광고와 패션에 의한 소비문화, 여성운동, 제3세계운동 등 포스트모던시대의 사회정치현상은 우리사회와도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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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 리얼리즘 (Photo Realism) _ 미술용어(Art Glossary)



포토 리얼리즘 (Photo Realism)



이미지 출처 : http://drawn.ca/archive/tag/photorealism/


 팝아트(Pop Art)가 주의를 끌 무렵(1960년대중후반), 미국에서 시작된 포토리얼리즘은 루이스 마이즐(Louis K.Meisel)에 의해 만들어진 명칭으로 슈퍼 리얼, 매직 리얼, 샤프 포커스 리얼, 래디컬 리얼, 하이펴 리얼, 로맨틱 리얼등으로 불려졌다. 포토리얼리즘은 고도화된 도시 문명에서 오는 획일적 경향과 비개성적 경향의 현실을 감정이 개입된 주관이라는 편견을 버리고 광의의 눈으로서의 사진기를 통해 보다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대상을 표현하기 위한 시각 표현 방법이라 할 수 있다.
 배경- 포토리얼리즘의 성립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미국 회화의 역사, 리얼리즘의 역사를 알아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유럽의 문화적 식민지였던 미국은 19세기가 되서야 그 독자적 문화를 형성하게 되는데, 그 이전의 식민지 시대부터 이루어지던 화가들의 사실주의적 경향은 19세기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게 된다.
 1920년대 도시 속의 산업화된 자연을 주제로 했던 정밀주의에 이어 1930년대 미국의 지방적인 풍물을 그렸던 미국 풍경화파들은 모두 그런 미국의 독특한 리얼리즘의 결과이자 과정이었다.1960년대 팝아트가 미국의 전통적 리얼리즘에 대중적 이미지 접근과 매스미디어의 가능성을 제시하였다면 그후 일어난 포토리얼리즘은 가깝게는 팝아트, 그리고 멀게는 미국적 현실에 바탕을 둔 전통적 사실주의, 즉 Pragmatism의 계승이라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이전의 리얼리즘의 연장선상에서 포토리얼리즘을 본다는 것은 상당히 부족한 면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20세기 미술의 대부분은 구성주의 이후 형식주의적 비평이 주류를 이뤄 왔다. 즉 형태, 색채, 재료, 비례 등에 근거하여 판단될 뿐 더 이상 작품이 재현하는 바는 없었다. ( 그 예로서 미니멀 아트는 형상적 해석의 가능성을 제공하지 않는다. 사실상 어떤 종류의 해석적인 비평적 분석도 배제하도록 고안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따라서 작품 자체의 설명과 확인이 주요 비평 행위가 되었다. 포토리얼리즘은 이러한 지배적인 접근 방식에 도전을 했는데, 그것은 주제를 통한 예술 감상의 가능성을 제기한 것이다. 약 70년간의 모더니즘 비평 방법에 대립, 혹은 확장을 시킨 것이다. 그것은 팝아트가 '예술은 개성의 표현'이라는 미학의 시대에서 '예술은 사회의 표현'이라는 미학의 시대로 의미 확장을 시킨 이후 이루어진 것이다.


*포토리얼리스트의 규정 (루이스 K 마이즐)
1. 포토리얼리스트는 정보를 모으기 위해 카메라와 사진을 사용한다.
2. 포토리얼리스트는 정보를 캔버스에 옮겨 놓기 위해 기계적 혹은 반半기계적 수단을 사용한다.
3. 포토리얼리스트는 완성된 작품을 사진처럼 보이게 만들 수 있는 기술적 능력이 있어야 한다.
4. 중심적인 포토리얼리스트중의 하나로 인정되려면 1972년까지는 포토리얼리스로서 작품을 전시했던 작가이어야 한다.
5. 작가는 포토리얼리즘 작품의 개발과 전시를 위해 적어도 5년을 바친 사람이어야 한다.
 포토리얼리즘에 있어서 카메라는 제작 과정상으로나 그 담긴 의미상으로 큰 무게를 지니고 있다. 현대 문화에 있어서 기계적 매체를 들여다본 사실을 보여주는 포토리얼리즘은 인간적, 서정적 면모를 표현하던 전통적인 리얼리즘에의 복귀가 아니라 차디찬 카메라의 눈으로 현실의 주변을 가늠해보는 회화이다. 따라서 인간성을 탐구하되 주관성을 배제하고 실존하는 사회를 현상학적으로 보고자 하는 새로운 노력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그들의 태도에서 카메라는 작가의 주관적인 안목을 거르는 필터로서, 그리고 기계화된 이미지를 만드는 도구로서 뺄 수 없는 요소가 된다. 그리고 기계화된, 매우 정밀한 이미지를 얻기 위해 필요한 상당 기간의 제작 과정 동안 작품의 대상을 일정한 모습으로 유지시켜 주는 방법이었다.
 포토리얼리줌의 특성을 요약하면 주제의 등장, 주제 재현의 정확성과 치밀성, 일상적 소재의 선택, 초점이 없는 평면성, 표현의 비개성화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추상 표현주의 등에 의해 화면에서 없어져 버린 주제를 되살리고 소재를 일상성에서 생활 자체로 확대시켜 인간적인 것을( 그 소산물인 도시, 건물, 자동차, 간판등 포함)주인공으로 되살리려는 노력, 그러면서도 화면은 냉랭한 평면성을 유지하여 작가의 표현에 의한 주관적인 해석으로서가 아니라 우리앞에 놓여진 하나의 대상으로서의 화면상의 존재라는 객관적 실제로서 작품을 보여주려 한다. 이러한 포토리얼리스트들의 노력은 사물을 보는 보다 나은 방법을 깨우쳐 주려는데 그 목적이 있는 듯하기도 한다.
 사진으로의 표현과 그것을 화면에 옮긴 포토리얼리즘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것은 대중 전달의 객체를 직선적이고 개인적으로 새롭게 발견하기 위한 노력인 것이다. 포토리얼리즘의 무미건조한 대상들은 엄연한 외계의 현상들은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개방적 태도 아래 사물의 비개인적 특성 을 이해하고 동화하려는 비개성적 태도에서 기인된다.

 *올덴버그 " 우선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비개성화를 위한 훈련이 필요하다." *척 클로스의 작품은 카메라와 사람의 눈 사이에 보여지는 포토리얼리즘의 주제를 나타내는 적절한 주제일 것이다.
 포토리얼리즘의 중성적 기법 역시 비개성화의 일환인데 원근도 없고 거리감도 없는 건조한 정밀화를 통해 관객의 작가 자신의 주관적 사고방식에 대해 중립성을 지키도록 한 것이다. 이처럼 포토리얼리즘은 단독적이고 닫힌 형상을 만들어 내지 않으며 관객을 개방, 관객 스스로가 의식하게 하고 주변 환경을 의식하게 유도해 가는 것이다.

포토리얼리스트
척 클로즈 (Chuek Close)
*거대한 스케일의 정면의 얼굴
*포커스의 적절한 이용 - 확대된 사진에 나타나지 않은 디테일을 사진 이상으로 ㅁ 묘사(사진 이상의 것을 담고 있다.)
*인물주제의 선택은 대중이 포토리얼리즘을 팝아트의 입장에서 보려하는 경향이나 리얼리즘회화중 하나의 양식으로 그주제가 너무 평범하다는 사실을 트집잡는 것 등의 고정관념에 대한 지적을 한 것이라 한다. *사실적 세부묘사 스케일에 대한 별도의 의미 - 인간의 얼굴에 대한 물성화 (포토리얼리즘의 비 개성화의 태도) 한눈에 알아볼수 없는 부분부분에 대한 관찰로 사물형상에 대한 다 른 이해를 강요하는 것.
『나는 창의를 완전히 거부한다. 나는 단순히 주제를 받아들이고 상황을 받아들인다. ...... 나의 생각으로는 그 어떤 규율에 얽메인 회화에의 어프로치는 주제를 변질시킨다. 바로 이러한 생각이 나의 작업을 뒷받침 해주고 있는 것이며 인물을 그린다던가 휴머니스틱한 그림을 만든다는 것은 나의 관심밖의 일이다.』

리차드 에스테스 (Richard Estes)
 *주요 주제 - 도시, 건물, 지하철, 가로의 간판, 쇼윈도 등.
  *에스테스의 작품의 주제는 철저히 객관적으로 묘사되었음에도 어떤 미묘하고 싸늘한 도시적서정을 느끼게 하는 까닭은 작가가 철저히 그림으로부터 제거되고 각 물건들이 제각기 독립적으로 자기성을 내보이기 때문이며 이런 사실은 그의 그림의 자연발생적인 한 측면이 되기도 한다.
  *여러장의 사진중 선택, 작업.
  *요소의 극소화와 인간적 형상의 제거 (있더라도 마네킹과 같이 넋빠진 모습)
  *복잡한 뉴욕의 거리풍경을 주제로 한 그의 작품에는 쇼윈도와 짐열물, 유리에 비치는 반사체, 다양한 견물의 형상이 복잡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것을 잘 보면 그의 구도에는 거의 칸딘스키에 필적할 만한 추상적 구성이 숨어있다. 복잡하지만 한정된 주제로부터 풍부한 효과의 변화를 추출해 내고 있는 것이다.
 포토리얼리즘이 전개하는 주제들은 자유로운 감정의 표현이 차단되고 있는 현대사회의 모습이며 꾸밈없는 반영인 점에서 역설적인 일깨움을 주고 있다. 그 표현에 있어 고도의 전문적인 기교나 우수성 외에 또다른 의의로는 이전의 미술에서 한 번도 다루어지지 않았던 우리 사회의 중요한 양상들을 일관성있게 내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포토리얼리즘은 대상을 재현한다는 점에서는 종래의 사실주의와 다를 바 없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회상적이거나 복고적인 것이 아닌, 반동적 의미를 지닌 현대 추상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단지 그들의 정신적 근간에 과거 리얼리즘의 전통에 대한 이념이 연관지어져 있는 것이지 결코 쿠르베나 쉴러, 호퍼의 이념 그 자체는 아닌 그들 자신의 것이고 자기 자신에 관계되는 문제를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현대미술의 온갖 주의 주장을 포용하면서 그것을 뛰어넘은 데에 포토리얼리즘의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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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트폴리오(Portfolio)의 첫걸음


포트폴리오(Portfolio)의 첫걸음






1. 포트폴리오의 필요성:
 포트폴리오는 작가의 작품을 압축적으로 간단하게 소개하는 작품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포트폴리오는 작품의 이미지들을 작가의 개성에 맞게 구성하여 작가가 지닌 예술적 능력과 작업의 성과과정을 설득력 있게 어필(appeal)할 수 있도록 제작 되어야 할 것이다. 국내 미술 대학원뿐만 아니라 유럽이나 미국의 학교에 유학을 준비하고 있다면 포트폴리오 제출은 필수로 요구되며 미술분야 전문직종을 원할 경우에도 기업체에서는 능력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제출을 요하기도 한다.
 순수 작업을 하는 작가들에게 있어서도 화랑이나 화상, 큐레이터, 비평가 또는 작품 구매 의사가 있는 기업에 자신의 작품을 소개할 때도 적절하게 쓰이며,이를 계기로 실력을 인정 받는다면 예술 기금이나 스폰서의 후원금 보조를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포트폴리오를 일반적으로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소개하는 시각적인 정보로만 생각할 수 있으나 작품 자체가 갖는 이미지 뿐만 아니라, 작품과 자료에 맞는 개성 있는 연출(디자인) 에 의한 또 하나의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손에 의해 탄생되는 제2의 작품이므로.



2. 자료 수집과 파일링(filing)

1- 파일링(filing) :
 개성 있는 포트폴리오를 만들기 이전에 먼저 1단계로 포트폴리오에 쓰일 자료 준비가 있어야겠다. 자신의 작품에 관한 아이디어, 메모, 스케치, 습작 등을 모아두거나 잡지나 브로슈어에서 작품의 모티브가 될만한 사진, 이미지를 골라내어 스크랩해 두는 습관을 갖는다면 타인과는 차별되는 자신만의 아이디어 뱅크를 두는 셈이다.
 흩어져 있는 정보들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관리를 해 놓는가는 다음 작업으로 이어져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공받을 수 있는데에 아주 유효하다. 이 자료 파일은 제출을 위한 목적이 아니므로 자신이 관리하기 편리하도록 수집, 보관하면 된다. 아이디어 메모나 신문기사, 사진 등을 보관하는데는 속지에 색인용 카드를 붙여 항목을 분류해 정리할 수 있는 A4(210 x 297 mm)크기의 바인더 북이나, A3 크기 의 줄무늬 없는 아트지노트를 이용해도 좋다.
 오리지널 작품을 찍어둔 사진이나 슬라이드도 연대순이나, 주제별, 기법순으로 분류해 놓으면 포트폴리오 제작을 위한 준비가 훨씬 편하다. 사진의 경우는 낱장 비닐주머니로 된 작은 앨범 파일이 서로 붙을 염려가 없고, 여러 장의 사진을 살펴보기에 편리하다. 슬라이드 또한 한 눈에 살펴 볼 수 있는 페이지식 슬라이드 첩이 좋을 것이다.

2- 항목분류 :
 자료를 무작정 많이 모아두기만 하는 것은 유용한 정보의 역할을 할 수가 없다. 일단 수집된 자료는 항목별로 색상이 다른 파일별로 분류하거나 시중의 일반 서류봉투에 분리한다. 그리고 나서 자료를 찾을 때 용이하도록 본인이 알아 보기 쉽게 내용물의 주제나, 가나다순, 날짜, 크기, 발췌한 곳 등을 명시해 두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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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고갱 (Paul Gauguin) _ 미술용어(Art Glossary)



폴 고갱 (Paul Gauguin : 1848.6.7~1903.5.8)


작품명 : Woman Holding a Fruit

작가연보
1848년 6월7일 파리에서 출생.
1855년 들라크로와, 프랑스 학사원 회원이 됨.
1859년 오를레앙 소신학교 기숙생.
1861년 마네 살롱에 [기타레로],[양친의 초상]을 출품. 대성공을 거둠.
1864년 오를레앙의 공립 중학교 입학.
1865년 6개월 동안 수부 생활.
1870년 나폴레옹 호 보불전쟁에 참전.
1872년 중견인의 역할에 숙달됨. 모네[인상,일출]을 제작.
1873년 결혼.
1875년 [에나항에서 본 세느 강]을 제작.
1876년 풍경화 [비로플레 숲의 잔디]가 처음으로 살롱에 입선.
1879년 인상파 화가인 마네, 세잔, 피사로, 르느와르, 모네, 시스리 등의 작품을 빚을 내어 수집.
1880년 제5회 인상파전에 유화7점, 대리석상 1점을 출품. [과부 습작]을 그림.
1881년 제6회 인상파전에 유화8점, 소립상 1점, 메다이용1점을 출품.
1882년 제7회 인상파전에 유화, 파스텔화 등 12점과 조각작품 1점을 출품했으나 혹평.
1886년 제8회 인상파전에 유화19점 출품. 고호와 첫 상면. 1개월 동안 병원에 입원.
1888년 [야곱의 결투]를 제작. 인상파를 탈퇴. 몽마르트에서 첫 개인전.
1889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 출품된 자바의 미술에 관심을 가짐.
1891년 타히티행 여비 마련을 위해 30점을 매각.
1892년 1개월동안 입원. 토착민들의 민간 종교를 믿으면서 [시장], [영혼이 지켜본다]등 제작.
1894년 4월, 자바 여자 안나와 여행. 11월 파리로 귀환.
1895년 3월, 프나비아 지방에 정착.
1896년 4월 부터 새 여자 파프라와 생활. 고독과 병과 절망을 견디지 못해, 10월에는 발광 상태.
[나베 나베 마하나], 자화상 [골고다 곁에서]등 제작.
1897년 5월, 딸 아느리느의 사망소식에 상심. 11월, 샤를르 모리스에 의해 고갱의 수기 [노아 노아] 제1장이 파리에서 발표 됨. 12월, 자살을 결심. 유서적 작품[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를 그림.
1898년 [노아 노아] 완성.
1899년 토목국을 그만두고, [빨간 꽃과 유방]을 그림.
1901년 다리를 치료하기 위해 입원했다가 2월에 퇴원. 8월, 타히티를 떠나 마르키즈 제도의 히바오아 섬에 옮겨 [즐거운 집] 이라는 이름을 붙인 움막집을 세우고, [그리고 그 여성들의 나체의 금빛은...]을 제작.
1903년 [아방 에 알프레] 전후편을 집필. 화상 보라르에게 근작 10점을 보냈으나 무소식. 4월 원주민에 대한 관헌들의 횡포에항의, 관헌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징역 3개월, 벌금 5백 프랑의 언도를 받음. 5월 18일, 심장병이 악화, 히바오아 섬에서 사망.
 프랑스의 화가. 파리 출생. 프랑스 후기인상파 화가이다. 폴 고갱은 다른 예술가와 달리 고호(Vincent Van Gogh)가 화가가 되기전 목사를 지망했던 것처럼, 35세의 나이로 예술 외적인 우회적(迂廻的)삶을 보낸 작가이다. 폴 고갱이 1848년 파리에서 출생하자, 얼마후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쿠데타가 일어나고, 공화주의자(共和主義者)였던 그의 부친은 피신하게 된다. 부친의 피난길에 일가족이 따라나선 것이 남미(南美)의 페루에 있는 리마(Lima)행이었는데 알려져 있다시피 여행 도중 부친은 사망하지만, 그곳에서 눌러 살게 된 4년간의 어린 시절의 경험은 폴 고갱에게 지울 수 없는 기억으로 남게 된다. 7세의 나이로 남미에서 남불 오르레앙(Orleans)으로 돌아온 그는 그곳 신학교에 다니게 되는데 그곳에서 고갱은 자기 이성과 감성에 맞지 않는 위선적인 덕행에 강렬한 반발을 보인다.
 흔히 고갱의 생애와 예술을 이해하는 길잡이로서 다음의 세 가지 문제를 들 수가 있다. 고갱 스스로가 '나의 혈관 속에는 인디언의 피가 흐르고 있다.' 고 말한 것처럼 첫째는 그의 혈통, 둘째는 그의 결혼,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화가로서의 천직에 대한 눈뜸이 그것이다. 1865년 (17세)에 그는 견습 항해사로서 상선에 승선, 리오데 자네이로까지 가기도 했으며, 좀 뒤늦게이기는 하나(1887년) 파나마로 떠나기도 했다. 1855년 프랑스로 돌아온 고갱은 3년동안(1868~1871)의 병역도 무난히 마친 건실한 청년으로 성장하여, 1871년 4월에는 증권 주식회사인 베르텡 상회에 입사하게 된다. 입사 2년 후 1873년에 그는 덴마크인 인 메트 소피 가트와 결혼한다. 예술의 마(魔)가 그를 사로잡았던 그때 고갱의 나이는 35세(1883年)였으며, 새로운 직업을 선택하기엔 또한 이미 늦은 나이였다. 그러나 규칙적이고 여유 있는 생활을 누릴 수 있었던 그가 그렇게 갑작스럽게 생의 방향을 전환시킨 것은 결코 객기에 의한 젊음의 충동 때문임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유년기의 경험이 예술의 이념으로 발전한 심사숙고의 결과요, 그것이 가져올 갖가지 희생을 충분히 의식하고 동시에 자신의 능력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해서의 결심이었다고 볼 수 있다.
 회화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하면서 특히 인상파의 작품을 수집하고 있었는데, 27∼28세부터는 일요일마다 본격적으로 회화연구소에 다녔다. 1876년 처음으로 살롱에 출품하여 C.피사로(1830∼1903)를 사귀게 된 것을 계기로 1880년 제5회 인상파전 후로는 단골 멤버가 되었다. 82년 피사로의 소개로 P.세잔, A.기요맹(1841∼1927) 등과 친교를 맺어 화가가 될 결심을 굳혔다. 이듬해인 1883년 35세에 증권거래점을 그만두고 그림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생활이 어려워 아내와 사이가 나빠졌으며 한때는 처가가 있는 코펜하겐에 갔으나 결국 처자식과 헤어져 파리로 되돌아왔다. 1886년 6월 도시생활에 지쳐 브르타뉴의 퐁타방으로 이사하였다. 거기에서 종래의 인상파풍 외광묘사(外光描寫)를 버리고 차차 고갱 특유의 장식적인 화법을 지향하여 P.세뤼지에, M.드니, P.보나르 등, 후일 나비파(Nabis 派)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해 11월 파리로 돌아와 고흐, 로트레크 등을 알게 되었으며, 특히 고흐와는 깊이 사귀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 타협할 수 없는 성격이어서 고흐가 귀를 자른 사건을 계기로 비극적인 작별로 끝났다. 그 후 다시 퐁타방으로 가서 《황색의 그리스도》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등을 그리고, 조각·판화·도기(陶器)에도 손대어 보았다. 그러나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고 문명세계에 대한 혐오감만 더하여 마침내 91년 남태평양의 타이티섬으로 떠났다. 《네버모어:Nevermore》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타이티의 여인들》 《언제 결혼할까?》등은 만년의 작품들이다. 타이티에서도 빈곤과 고독에 시달리고 병마에 시달려 자살을 기도하기도 하고, 원주민을 옹호하여 현지의 백인 관헌과 충돌도 일으켰으나, 원주민의 건강한 인간성과 열대의 밝고 강렬한 색채가 그의 예술을 완성시켜나간다. 그가 꿈꾸었던 예술가로서의 삶은 원시의 세계에서 시작되었으며, 타히티 섬은 그에게 원초적 감성을 제공해 주는 예술의 근원지였다. 산업문명의 발달이 점차 인간의 순수성을 앗아갔다고 생각했던 고갱은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순수성을 타히티 섬의 원시에서 발견한 것이다. 원색적인 색채와 강렬한 이미지, 그것이 곧 고갱의 작품 세계를 이끄는 중심이었다. 늘 인간의 삶에 대한 진실, 순수성에 대해 고민하고 갈등했다. 그리고 그 깊숙한 곳에서 울리는 영혼의 떨림에 귀 기울였다.
 세잔이 자연을 기본적인 조형 질서로 재창조하면서 자연에 충실했던 화가였다면, 고갱은 그 자연을 철저하게 외면하고자 했던 화가였을지 모른다. 고갱 역시 인상주의 양식의 영향을 토대로 하고 있으나, 그는 타히티 섬의 원시림에 묻혀 강렬한 색채와 인간을 통한 근원적인 상징성을 부여하며 새로운 구성을 시도했다. 그래서 고갱을 ‘고귀한 야만인'이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고갱은 자신의 예술적 영감을 위해 다른 어떤 화가들보다 많이 여행을 다녔다. 그리고 그의 작품이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리게 된 곳은 남태평양의 타히티였다. 고갱은 타히티 섬에 머물며 원주민들과 직접 생활하고, 서서히 그들의 삶에 동화되어 갔다.
 내면적인 감정에 충실한 화가 고갱의 일탈은 내면 세계로 떠나는 여행을 캔버스 위에서 시작한다. 인상주의 화풍에서 출발한 그의 작품 세계는 점차 풍부한 색채와 단순한 선으로 원시의 세계를 탐닉하게 된 것이다.
 문명으로부터 점차 멀어져 가고는 있었지만 고갱은 그 원초적인 욕구에 순응했다. 그에게 진정한 자유의 항해를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와준 곳은 오직 남태평양에 유유히 떠 있는 타히티 섬이었다. 고갱은 그 깊은 원시림에서 인간의 본성을 자각하고 새롭게 눈을 떴다. 타히티에서 고갱에게 주어진 삶은 오로지 미술을 통한 예술세계 뿐이었다. 문명의 이기가 낳은 얼룩진 유럽을 벗어나 고갱의 심장에는 열대지방의 정적이 안겨 주는 아름다운 맥박의 소리가 들려 왔다. 고갱은 이 체험을 신비감으로 자연을 표현하는데 주력했다. 따라서 그의 화폭에 등장하는 소재는 물론이고, 그들의 삶조차도 신비롭게 다가오는 것이다. 문명과 단절된 고립의 생활, 하지만 그곳엔 자연이 제공하는 신비로움이 존재하고 있었다.
 고갱의 독자적인 회화 양식이 정립되었던 시기는 1886년에서 1890년 사이이다. 정처없이 떠돌았던 끝없는 여행, 여행 끝에 남겨진 갖가지 시련을 극복해 낸 고갱의 회화 양식은 ‘종합주의'로 불리운다. 그는 인상주의가 주장했던 시각적 효과보다 꿈과 사상, 그리고 상상력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분할되거나 점묘에 의한 필촉 대신 널찍하게 분할된 원색의 색면과 평면적인 구성을 사용했던 것이다. 또 굵직하게 둘러쳐진 윤곽선을 통해 그는 양감을 철저하게 무시하며, 회화의 평면화와 장식성을 추구했다. 하지만 고갱의 작품 세계가 갖는 독창성은 단지 평면화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평면화와 동시에 그 안에서 상징성을 부여했다. 그리고 이 상징성은 문명을 벗어난 원시주의로 귀착된다.
 그리고 일본주의의 영향을 받았던 고갱은 일본판화에서 엿볼 수 있는 단순한 선과 색채를 자신의 화폭에 차용했다. 이로써 연출되는 평면적이고 장식적인 화면 공간은 고갱의 독자적인 회화 양식 구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고갱은 타히티 이전에 페루나 마나마, 마르티니크, 브르타뉴 등의 체재 경험을 통해서 원초적인 예술세계에 대한 질문의 답을 구하고자 했다. 고갱은 당시의 세계 전람회 경험을 통해 그의 예술세계가 나아가고자 했던 결정적인 방향을 설정하고, 이를 연출해 낼 수 있는 가치를 추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다양한 경험의 산물은 그의 작품 곳곳에 녹아 있어 때로는 낭만주의적이거나 원시주의적인, 그리고 그가 머물렀던 다양한 체험의 흔적들이 남게 된다.
 상징적이고 관념적이기까지 한 고갱의 작품에는 무언가 비밀스러운 진실이 숨어 있는 듯하다. 고갱은 강렬한 원색의 색채와 선의 표현으로 관찰되어진 현실의 세계를 과장하거나 단순화시키는 종합주의를 지향했다. 이 때문에 고갱의 작품은 당시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즉각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문명과 원시의 대립이라는 주제 속에 자기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태도는 훗날 다른 동료 화가들, 특히 고호와의 공동 생활의 시기에서도 여실히 드러내 보이고 있는 면이라 하겠다.
 1901년 마르키즈제도의 히바오아섬으로 자리를 옮겼을 무렵 매독과 영양실조로 회복 가망성이 거의 없었다. 1903년 환상으로 본 풍경을 그린 《눈 속의 브르타뉴 풍경》을 끝으로 기구한 생애를 마쳤다. 그의 상징성과 내면성, 그리고 비(非)자연주의적 경향은 20세기 회화가 출현하는 데 근원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그의 업적은 후기인상주의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고, 20세기 미술에 큰 영향을 미치며 입지를 확고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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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슨 폴록 (Paul Jackson Pollock) / 미술용어(Art Glossary)



잭슨 폴록 (Paul Jackson Pollock:1912.1.28 ~ 1956.8.11)



U.S.A  2010, Mar.11 / Convergence, 1952
Oil on canvas. 237.5 x 393.7 cm

 미국의 추상화가. 1912년 와이오밍주(州) 코디 출생. 로스앤젤레스의 미술학교를 다니다가 퇴학 처분을 받고, 1930년에 뉴욕으로 와서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수업한다.(1939~1933) 토마스 하트 벤튼의 제자였으나, 벤튼의 사실주의는 그에게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다. 그와는 반대로 이 시기의 폴록은 광활한 미국 서부를 소재로, 지욕주의 성격이 보이는 그의 초기 작품에서 이미 전통화법과는 거리가 먼, 물감을 두껍게 채색한 예외적인 화풍을 보이고 있다. 2차대전중 뉴욕에 망명중인 초현실주의자들과 만나 인간정신의 자동기술법에 매료되었다. 신화와 상징, 그리고 아메리카 인디안의 회화 기법에서 영감을 얻고, 구스타프 융식의 정신분석법에서도 영향을 받은 폴록은 점점 더 폭력적인 작품을 그리기 시작한다. 마송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칼을 들고 있는 벌거 벗은 남자(1938~1941년경)》는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그의 붓놀림이 더욱 강해지고 폭발적이 되어감에 따라 그의 그림에서 형체가 사라지게 된다. 마치 그의 고뇌를 감추기라도 하는 듯, 그림의 중심에 나타나던 토템과도 같이 위협적이던 인물들을 해독할 수 없는 신비로운 상형문자와 같은 것으로 뒤집어 씌워버린다.
 대공황기의 어려움 속에서도 토마스 하트 벤튼·호세 클레멘테 오로츠코·데이빗 알파로 시퀘이로스· 파블로 피카소 등의 영향을 소화해 간다. 1943년작 《암여우(The She-W olf)》가 이에 속하는 작품으로 이는 그 이듬해 뉴욕의 현대미술관에 의해 구입된다. 페기 구겐하임의 화랑에서 1943년에 첫 개인전을 갖으며, 1947년 부터는 베티 파슨스 화랑이,1952년부터는 시드니 제니스 화랑이 그의 전속 화랑으로 일한다.
 1945년 롱아일랜드로 이주한 폴록은 헛간을 개조한 작업실에서 그 유명한 뿌리기 회화를 제작하기 시작한다. 그가 뿌리기 기법에 대해 알게 된 것은 1930년대 말 시퀘이로스의 실험 공방에서였다. 그러나 뿌리기 기법이 실험적 의미를 넘어 무의식적 이미지를 이끌어 내는 형식 언어로서의 의미를 부여받게 된 것은 1940년대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과 결부되면서였다.
 절제된 자동기술적 회화언어를 찾아내기 위해 구멍을 뚫은 깡통을 채색의 도구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후 순간적이고 직접적으로 표현되는 회화 기법을 추구하던 그는 1948년에 폴록은 뿌리기 그림들을 최초로 전시한다. 이 그림은 커다란 화폭을 바닥에 깔고 그 주위를 걸어다니면서 깡통의 물감을 붓거나 막대기에 묻힌 물감을 떨어드리는 것이다. 비평가 H 로젠버그에의해 액션페인팅이라고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화면의 자국들은 화가의 움직임, 여러방향에서 화면을 향해 다가와서 팔과 손목의 행위의 기록을 의미한다. 이것은 어떤 시간에 행해진 행위 전체의 농축이자 정지화면이다. 두터운 물감층의 표면성은 이젤페인팅과 벽화의 한계를 넘어서며 자체의 대상으로서 존재한다. 신화기의 자기정체성의 불안한 난폭함이 유희적이고 율동적인 우아함을 유발한다. 그것은 단순하 번호나 여름 《아라베스크》의 고요한 느낌의 제목에서도 암시된다. 그는 작업중의 자신의 행위를 무의식적이라고 했으며 로젠버그와 그린버그의 미술이론에서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그가 갖고 있던 형식적, 표현적 욕구에 부응하는 이 기법은 자동기술적인 면을 반영한다.
 폴록의 회화는 온몸을 통해 실존을 반영하고 직관과 본능에 따라 화면에서 직접적으로 확인하여 주체와 객체의 합일을 시도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회화를 실존의 투쟁의 장으로 부르고 있으며 현대회화의 숭고미와 테러에 가까운 비애를 조장한다. 1947년부터1951년까지 정열적인 창작활동을 보이며 다수의 작품을 발표하고, 1951~1952년에는 색채의 사용을 포기하고 신비한 형체가 재등장하는 흑백 구상화,"블랙 페인팅"을 발표하다가 다시 1940년대의 작품과 유사한 드리핑 작품을 하기도 한다. 이 시기 작품은 대표작으로 알려진 《Number 32, 1950》《One:Number 31, 1950》《가을의 리듬》에서 알 수 있듯, 대개 복잡하게 얽힌 선들만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미 이 때에 그는 음주와 신경쇠약 등으로 병원에 입원하고 심리 치료를 받는 등 불운한 삶의 징후를 드러내고 있었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은 이 시기 폴록의 작품을 그의 심리적 문제를 진단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특히 1970년대 휘트니 미술관이 폴록이 정신치료를 받으며 그렸던 드로잉을 전시하면서 그의 작품을 융의 정신분석학에 입각해 해석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러나 폴록의 치료를 맡았던 조셉 헨더슨이 “도입기에 있던 융의 정신분석학을 대중화시키기 위하여 폴록을 이용하였다.”는 주장을 제기하면서 정신분석학적 해석은 좀더 폭넓은 문화적·역사적 맥락에서 해석하려는 시도로 대체되었다.
 1956년 8월 11일 폴록은 친구들과 술을 마신 뒤 과속으로 운전하다 롱 아일랜드의 이스트 햄튼에서 차량 전복 사고로 생을 마감한다. 폴록에 대한 평가는 새로운 추상회화의 길을 열었다든가, 캔버스의 한계를 넘어 과정을 중시하는 퍼포먼스의 길을 제시하였다는 등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대표작품에 《서부로 가는 길》 《남성과 여성》 《여름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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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주의 (表現主義 : Expression‍ism)



표현주의 (表現主義 : Expression‍ism)


뭉크의 '절규'


  형태가 객관적인 현실로부터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주관적인 반응으로부터 나타난다고 보는 미술 운동. 20세기 초 주로 독일·오스트리아에서 전개된 예술운동이다.
특색은 작가 개인의 내부생명, 즉 자아 (自我)·혼(魂)의 주관적 표현을 추구하는 ‘감정표출의 예술’에 있다. 이 운동은 우선 회화에서 시작되어 다른 조형예술을 거쳐 문학·연극·영화·음악에까지 미쳤다. 미술에서의 표현주의라는 명칭은 베를린의 《슈투름(폭풍)》지(誌)의 주간 헤르바르트 바르덴이 보급한 것이며, 이 경우에는 1910~20년에 벌어진 모든 반인상주의(反印象主義)를 표방하는 운동의 총칭이 된다. 그러나 이 개념은 광의로는 시대를 초월한 유럽 미술의 저류(底流)의 하나이다. 즉, 지중해 세계에 대립되는 북방 게르만의 풍토를 반영하고 조형적인 ‘형식’과 그 자율성에 대해 혼의 힘과 그 분출을 특징으로 하며, 고전주의에 대한 낭만주의의 대립으로 규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탈리아·프랑스 회화의 범국제적인 보편성과 비교하여 표현주의를 특징짓는 강한 정신체험, 가시적(可視的) 세계를 초월한 환상, 때로는 냉혹·잔인할 만큼의 분석과 풍자는 위기적인 시대상황에 찢긴 개인의 미와 윤리에 수렴되는 비중이 훨씬 크다. 이런 의미에서 표현주의의 선구는 독일 르네상스의 거장들, 특히 그뤼네발트의 《이젠하임 제단화(祭壇畵)》에 거슬러올라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직접적으로는 반인상주의의 입장에 섰던 뭉크, 호들러, 앵소르, 고흐, 고갱의 1885년부터 1900년에 걸친 화업(畵業)이 주목의 대상이 된다. 상징주의와 아르 누보 양식의 박진성과 평행하는 이들 화가들의 주관적 표현은 드라마틱하고 또한 집념에 가까운 테마를 소수의 강렬한 색채와 대비시키고 왜형(歪形)된 포름(형식), 단순·긴밀한 구도, 선의 그래픽한 예리함과 역동성(力動性)으로 파악하였다. 이상의 조형적 특색은 그대로 독일의 표현파 작가에게도 공통된다.
 19세기 인상주의적 화풍 이후 현대미술은 마티스회화에서 나타나는 평면적인 색면의 사용과 소위 색채원근법의 배제, 그리고 현상적인 재질성등이 강조되는 회화로 향하고 있다. 색채회화는 색채 자체의 존재가치를 인정하는 색채의 자율성을 조형적 가치로 부각시키면서 그 자체를 즐기게 하는 회화적 특성을 보여준다.
 회화세계에서의 색채(色彩)의 중요한 가치는 칸딘스키(Kandinsky)의 추상적 그림에서도 나타나면서 그 상징적 의미가 강조된다. 이러한 의미는 화화적 표현에 있어서의 정신성 또는 영혼성(靈魂性)을 가리키는 것인데, 음악적인 것과 관련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색채는 음과 같이 풍부하고 힘찬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 있어서는 사물의 의미가 느껴지지 않는 선과 형채, 색채 등에 의한 자유스러운 화면구성이 문제되고 순수한 의미의 색채적 요소가 중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음악적인 것처럼 진동하는 색채의 효과는 곧바로 내적 울림 또는 내면적 힘의 바탕이 되고, 이러한 힘이 "내적 필연성" 으로 나타난다. 내적 필연성은 하나의 정념으로 발전해나가는데. 이러한 정념이 영혼적 상태의 폭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칸딘스키의 추상적 회화의 상징적 의미는 바로 그러한 정신적 차원에서 색채적 정념을 시사한다. 칸딘스키가 규정짓는 색채와 정념의 관계는 "노란색은 자극을, 빨간색은 에너지를, 파란색은 무한의 감성을, 초록색은 고요함을, 하얀색은 침묵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표현주의 회화의 세 그룹
 첫째는 1905년 드레스덴에서 결성된 ‘브뤼케(橋)’ 그룹 [다리파 (Die Brucke)]으로 1905년 드레스덴에서 4명의 젊은 건축과 학생들인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 헤켈[Erich Heckel], 슈미트-로틀러프 그리고 블레일리 조직한 미술단체. "분리파"(Secession)의 보수주의레 반대하여 Brucke(다리)라는 단어를 선책한 자체가 의미심장한 일이다. <그것은 이중의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이며, 정확한 프로그램을 보여주지 않을 수도 있었지민 어떤 의미에서는 강에서 또다른 강으로 인도할 수 있는 단어이기 때문이다>-헤켈. 즉 현대성을 추구하는 것일 수도 있다. 화실의 공동 분할과 주제나 방식의 교환을 목적으로 하는 이 독학 화가들의 일상적인 공동작업은 특히 독일 표현주의의 대표가 되는 집단적 스타일의 형성에 트게 공헌한다. 공격적이고 반 부르조아적인 그들은 모든 학파와 논리들을 거부한다.
 표현의 법칙을 강화하면서 더욱 유동적인 필체를 위해 조금씩 색깔을 두껍게 칠하는 것을 포기하고, 재빠르고 솟아나는 듯한 터치와 단순화된 뎃상을 이용하여 모가 난 형태와 단순하고 부조화한 색채로 주제들을 다듬어 나간다. 본래의 낙원상태의 상징인 누드는 그들이 좋아하는 보티브였다.
 1906-1907년의 두 전시회는 관심을 끌지 못하지만 그들의 이념과 미술을 전파하기 위해 이때부터 매년 목판화집을 만들어 낸다. 아놀드 화랑은 1910년에야 격국 그들에게 큰 전시회를 주관한다. 각지 베를린으로 옮기며 그들은 더욱 개인적인 스타일을 선책한다. 이 그룹은 새로운 멤버이자 마지막 멤버인 오토 뮈엘러를 맞이한다. 베를린에서의 더 강도있는 미술적 삶은 그들에게 결실을 가져다 준다. 슈투름에 재빨리 가담하고, 현대미술로 유명한 걸리트화랑은 1912년 이들을 유명세로 만들었으며, 함부르크에서 연이어 전시회를 가진다. 같은 해 이 그룹은 뮌헨에서 블라우 라이터(Blaue Retier, 청기사파)의 두 번째 전시회에 참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공동 스타일이 점점 없어지면서 그들의 협력도 점점 사라져 간다. 1913년에 역사적인 사건으로 만든 키르쉬너의 글인 "브뤼케의 연대기"를 이 그룹이 거부하면서 그룹의 해체가 불가피하게 된다.
 둘째는 10년 베를린에서 바르덴이 창간한 예술잡지 《슈투름》 및 같은 이름의 화랑(畵廊)에 의하여 만들어진 ‘슈투름그룹’으로, 오스트리아의 화가 코코슈카의 자아와 외계의 상극을 새긴 심리적 초상화로 대표된다.
바르덴은 자기 나라의 젊은 전위화가(前衛畵家)를 화랑에 결집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의 미래파, 초기의 프랑스 큐비스트에게도 문호를 개방하였고, 잡지에는 칸딘스키와 마르크의 논문 및 들로네(클레의 번역에 의하여), 레제의 기사를 게재하는 등 전위의 거점이 되었다. 특히 약 15개국 90명의 작가와 366점의 작품을 모아 일찍이 보지 못한 최대의 국제전을 열었다.
 셋째로는 칸딘스키, 마르크를 중심으로 결성한 청기사(靑騎士) 그룹이다.
 1912년 5월 뮌헨의 현대 미술에 관한 글을 모은 피페 출판사의 "알마나크"표지를 위해 마르크(Marc)와 칸딘스키에 의해 지어진 명칭이다. 1911년 6월부터 계획되고 9월에 계약이 체결되며 그해 가을에 작가와 음악가 등 공동협조자들의 도움을 받다 편집작업을 한다.
 구성원으로는 이 밖에도 클레, 야우렌스키, 마르케, 쿠핀, 뮌터 등이 있고, 전람회는 뒤에 드레스덴의 ‘다리’, 베를린의 ‘분리파협회’, 프랑스 작가(루소, 피카소, 브라크 등), 러시아 작가(말레비치)를 추가하여 확대시켰다. 이론가인 칸딘스키는 논문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을 발표하여 유물론과 리얼리즘에 지배당하고 있는 미술에 반기를 들었으며, 화가의 내적필연(內的必然)에서 우러나는 정신성·환상성을 주장하였다. 그의 제작과 더불어 마르크, 클레 등의 형태의 분석·종합의 시도는 ‘청기사’ 운동이 지향하는 현대 추상회화의 중요한 주류의 하나로서 주목된다.
 그들은 뮌헨의 신예술가동맹에서 탈퇴하고 막케(Macke), 뮌터(M nter), 캄펜동크(Campendonck)와 불략(Burljuk)등의 다른 파들을 포섭하면서 1911년 12월 8일부터 탄하우저 화랑에서 선언문-전시회를 주관하고 동일 명칭을 사용한다. 이책과 전시회의 독창성은 작가의 <내적인 필연성>이라고 도처에 현존하는 표현의 하나인 공통점에서 동양과 서양을 재구성하여 추상적이면서 사실적인 모든 형태의 미술을 광범위하게 개방한다는 점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룹 디 브뤼케, 클레, 브라크, 피카소, 드랭을 포함한 독일, 러시아, 프랑스 작가들의 315점의 그래픽 작품을 모은 두 번째 전시회는 1912년 2월 골츠(Goltz)에서 주최된다. 이런 역사적 사건들은 독일 현대미술의 결정적 돌파구 역할을 한다. "알마나크" 제 2권을 출판하려는 계획은 실행되지 못한다. 조직화된 그룹으로 형성되지 못했던 편집팀의 활동은 전쟁으로 끝이 난다.
 이 밖에 베크만, 그로스 그리고 여류화가 모다존 베커를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표현주의 화가들은 제1차 세계대전 종료 후, 재차 그룹을 결성하지도 못한 채 나치스 체제의 발흥과 동시에 ‘퇴폐예술’로 낙인찍혀 개별적으로 어려운 창작활동을 계속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혹은 스스로 붓을 꺾고 예술활동을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벨기에에서 일어난 플랑드르 표현파가 있고,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코브라’ 그룹 (알레신스키, 아펠)의 추상적 표현주의, 초기의 루오, 그로메르 등의 화가도 표현주의의 진영에 넣을 수 있다. 조각에서는 확대된 인체(人體)의 모습을 추구한 렘브루크, 농민의 중후한 종교성을 탐색한 바를라흐가 있다. 표현주의 건축은 최근의 연구에서 관심을 끌 만한 것을 찾아볼 수 있는데 환상적 형태와 색채에 특색을 보인 T치히와 타우트를 들 수 있다.
 미술사 학자 로버트 린튼은 표현주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표현적이다. 제스츄어란 의도적인 표현행위이다. 모든 예술은 작가와 그 상황의 표현 이며, 그 중 특히 감정이나 정서적 메시지를 방출 또는 전달하는 시각적 제스츄어를 통하여 우리를 감동시키고자 하는 예술이 있는데, 바로 표현주의 예술이 그것이다."
 표현주의 미술의 원리는 크게 '비이성', '반전통', '반서구'적인 것을 의미한다. 서양 예술의 기저가 '이성주의'에 놓여 있다면, 표현주의는 '비이성'을 추구함으로서 '반서구'적인 태도와 '반전통'적인 이념을 갖게 되는 것이다. 또한 표현주의는 그림의 내용 즉, '문학성'을 형태의 완성보다 중요시하는 내용주의 미학위에 그 기초를 두고 감정과 이념을 자유롭게 표현하려는 것을 주목적으로 삼고 있다. 이 결과 조형적인 완성도는 이차적인 문제가 되면서 전달하려는 메시지나 작가의 내면세계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을 더욱 중요시한다.

허무주의 대안으로서 표현주의
 20세기 최초의 10년을 지배하는 아르누보의 열광이 끝난뒤, 계속하여 바로 등장한 디자인을 정확히 지적하기는 어렵다. 독일에서는 표현파(독일표현주의), 빈에서는 아돌프 로스의 선구적인 디자인, 체코슬로바키아에는 체코큐비즘이 시작된다. 또한 월터 그로피우스는 '파구스 구두공장', 르꼬르뷔제는 '도미노 시스템'을 발표하고 안토니오 생텔리아가 '신도시'를 디자인하며 미스 반 데 로에(Mies van der Rohe)가 유리의 고층 빌딩을 세우고 러시아 구성주의(러시아 아방가드르)도 나타나는 등 그 후의 모던 디자인을 방향짓는 여러 조형, 운동 ,작가가 이 10년 사이에 함께 모습을 보인다.
 결국 아르누보의 뒤를 이어 독일 표현주의와 체코 큐비즘이라는 2가지 디자인의 흐름이 등장하게 되었다. 어느쪽이 먼저였을까 ?
 빈의 오토 와그너가 아끼는 제자 중 한 사람인 얀 코체라는 프라하로 아르누보를 들여와 체코에 정착시켰다. 한편 코체라에게 직접 배워 새로운 디자인에 눈뜬 고차르, 호호르, 노보트니(O.Novotny), 포예르슈타인 등의 프라하 청년 건축가들은 스승의 아르 누보를 초월하고자 새로운 양식을 만드는데, 그것이 큐비즘이다. 계보적으로는 아르 누보의 직접적인 대를 잇고 있다.
 커트 글라스의 입체 기하학적 디자인은 1920년대 아르데코의 광물 결정과 같은 장식 디자인과 본질적으로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식물적인 아르 누보와 수학적인 국제양식 사이의 디자인 본질을 광물 결정적인 아르 데코 경향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말하자면, 그러한 경향의 예가 체코 큐비즘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큐비즘은 현대 고층건물을 형성시키는데 모티브가 되었다. 즉 식물적인 아르누보 뒤에 이어 등장한 양식이 광물적인 체코 큐비즘이었다.
 독일 표현파는 베렌스의 가스 제조 공장이나 타우트의 유리 파빌리온을 초기의 예로 하여 시작되었는데, 커다란 반응없이 1910년대에 페르치히의 '베를린 대극장(1919)'이 지어진 시점에서 끝난다. 전성기는 다음의 1920년대에 들어서부터이고 이 10년동안에 대부분의 걸작이 탄생하고 있다. 즉 1910년대의 독일 표현주의가 등장을 선언한 점에 의미를 두는데, 그 선언은 타우트의 유리 파빌리온과 페르치오의 베를린 대극장에 나타나듯이 자신들이 말하고 싶은 점을 모두 정확히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독일 표현주의의 선언에 영향을 받아 탄생한 흐름으로 네델란드의 암스테르담파가 있다. 이상이 1910년대의 개관으로 여러가지 흐름이 등장한 혼돈의 시기가 틀림이 없지만 조형에서 공통적인 성격을 찾으면 전체 구성 또는 부분 의장에 보이는 '기하학적 경향'일 것이다. 표현주의와 같이 기하학적으로부터 먼 표현에서도 그 곡선에 비하면 확실히 기하학화하므로 표현주의의 세부의장에 기하학적 문양을 찾는 일은 결코 어렵지 않다.
 표현주의는 회화,문학,연극,음악,조형미술,건축 등 모든 예술분야에 걸친 20세기초 독일어권 예술운동이다. 표현주의(Expression‍ism)라는 말은 프랑스 후기 인상파(Impressionism)에 대치 되는 사조개념으로 독일에서는 1911년 베를린의 시세션전 출품 작품에 대하여 W.보링거가 처음 사용하였다.
 1914년 이전까지 전위는 유켄트 스틸이라고 할수 있지만, 그 10년 동안의 역사는 표현주의와 겹친다. 당시는 여전히 절충주의적인 빌헬름 양식이 있고 A.메셀의 '빌헬름 백화점(1869)', 피터 베렌스의 베를린 'AEG 터빈 공장(1909-10)', 테오도르 피셔의 울름 '병영 부속 교회당(1911)', 월터 그로피우스와 아돌프 마이어의 '파구스 구두 공장(1911)', 파울 보나츠의 '슈투트가르트 중앙역(1913-17)'과 같은 내셔널 로맨티시즘적인 작품으로부터 표현주의는 시작되었다. 유켄트 스틸에서 표현주의로 이어지는 역활은 앙리 반 드 벨드, 요제프 마리아 울브리히, 베렌스가 맡았다.
 헤르만 무테지우스나 브리츠 슈마허와 함께 독일 공작 연맹을 설립하는 한편, 반 드 벨드는 1906년에 바이마르 공예 학교를 세웠는데, 1919년 바우하우스(Bauhous)의 전신이 되었다. 그리고 베렌스로 부터 그로피우스, 미스 반 데르 로에, 르 꼬르뷔제와 같은 1920년대의 중심적인 건축가들이 독립했던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전부터 활약한 표현주의 건축가는 드문 편으로 M.베르크의 '세기의 홀(1913)', 한스 페르치히의 '포젠의 급수탑(1911)', '루반의 화학공장(1911-12)'이 알려진 정도였다.
 세계대전을 거쳐 1918년 바이마르 공화국이 태어나자, 봇물 테지듯이 예술 노동 평의회, 11월 그룹이 만들어지고 표현주의 건축가들이 활약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크게 3가지 그룹으로 분류되는데, 우선 첫째 그룹은 부르노 카우트 중심의 이상사회를 이야기한 건축가들이다. 타우트는 1919년 무명 건축가전에 참가한 건축가를 중심으로 '유리의 열쇠'그룹을 만들어 환상적 스케치를 다수 남겼다. '공예, 조각, 회화의 한계는 사라질 것이며, 하나 즉 건축이 될 것이다. 건축은 정신적 제가치의 직접적인 매개물이며 오늘은 잠자고 있느나 내일 깨어날 일반대중의 감각력은 실체화하는 것이다. 다만 정신적인 영역에서의 총체적인 혁명만이 이러한 건축을 창조할 수 있다.'라고 타우트는 밝히고 있다. 총체적이고 집합적인 예술작품의 관념을 전개시켜 '민중을 위한 예술'을 요구하며 건축은 그것을 설계하고 축조하는 자들간의 지역사회감정을 창조할 수 있다는 신념을 표현하고 있다. 표현주의와 상상의 건축은 Arbeitsrat의 무명 건축가전에서 최소한 도면에 있어서는 그 최고점에 달했다.
 코로포토킨이나 E.하워드의 사상을 배경으로 '도시의 모자(1919)', '알프스 건축(1919)', '도시의 해체(1920)'와 같은 유토피아 건축을 계속해서 발표했다. 또한 건축 시인 P.셀버트의 '유리 건축(1914)'은 독일 공작연맹에 출품한 타우트의 '유리 파빌리온(1914)'으로 결실을 보았다. 특히 원통형 계단실을 유리 블록으로 감싼 신선한 감각의 공간 디자인이나 프리즘 유리를 통한 무지개 빛과 색채의 디자인은 미래 건축 공간의 매력을 실험적으로 보이는 일에 성공하고 새로운 건축재료가 가져올 가능성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었다. 나중에 타우트는 이 작품을 기초로 이상적인 건축구상을 전개하게 된다. 제2그룹에는 보수적인 건축가들이 속하는데, 그 중에서도 전쟁 전부터 활약하고 있던 페르치히는 '베를린 대극장(Grosses Schauspiehaus)(1919)'으로 주목되었다. 새로운 사회와, 그사회의 정신과 음성의 가장 당당한 표현으로서 대중극장이 시도되었다. 예술과 민중과의 장벽을 깨뜨리는 것 즉 'coup de th tre'였다. 또한 지방 도시 함부르크에서는 츠리츠 헤거가 '칠레 하우스(1924)'를 설계하여 그 하늘을 찌르는 파사드로 베를린 건축가들에게 다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
 이러한 건축가들과는 달리 단독으로 유기적인 건축을 겨냥한 제3그룹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후고 헤링은 '가르카우 농장(1923)'을 설계하여 '기관 역활의 건축'을 제안하고, 또한 H.핀스테를린은 환상적인 생물 스케치를 다수 남겼다. 표현주의의 금자탑이라고 부르는 에리히 멘델존의 '아인슈타인 탑(1920-24)'도 조소적인 건축이지만, 이후 그의 디자인은 수평선을 강조하는 형태로 바뀌였다.
 Einstein Tower에서 나타난 에리히의 건축의 세가지 잠재력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 '창조적 소생(creative resurgence)'의 연속 간주, 탑에서 이들 잠재력이 탐구 되었다. 그는 그 자체의 법칙에서 건축은 그 활동적인 mass를 지배하는 세가지 조건을 마련한다. 그 윤곽으로 선의 요소를 나타내는 역동적 조건-공간의 운동, 표면의 돌출로서 mass의 상호관계를 나타내는 율동적 조건, 평면과 단면에 의한 운동의 평형일정적 조건이라고 한다. '쇼캔 백화점(1929)', '우니페르슴 영화관(1926-29)'등의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렇지만 바이마르 공화국도 안정을 찾게 되자, 이상을 이야기하던 건축가들도 이어서 지드룽과 같은 공공 건축에 참여하게 된다. 즉 타우트의 '브리츠 지드룽(1925-31)', '지멘스슈타트 지드룽(1930)'등이 연달아 건설되었던 것이다.
 1919년 설립된 바우하우스는 당초 표현주의적 경향이 강하였지만, 192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서서히 구성주의-신즉물주의적인 경향을 띄게 된다. 또한 1927년 독일 공작 연맹이 슈투트가르트에서 개최한 '바이센호프 주택전'에서는 '하얀' 합리주의적인 건축이 세워지고 이미 표현주의는 과거로 불리워진다. 그리고 1930년대에는 이미 이야기가 되는 일이 적어지고 1933년 나치스가 정권을 장악함과 동시에, 바우하우스나 독일 공작 연맹도 쇠퇴하면서 주요 건축가들은 해외로 계속 망명하는 등 표현주의는 파국을 맞게 되었다.



개봉동화실

풍속화 (風俗畵 : Genre Painting)



풍속화 (風俗畵 : Genre Painting)



 신윤복 / 단오풍정(端午風情) (1805)




Johannes Vermeer, The milkmaid, ca. 1660
Amsterdam, Rijksmuseum

  일정한 사회계층을 대표하는 사람들의 풍속·취미·일상생활의 모습 등을 제재(題材)로 그린 그림. 거기에 다루어진 사람들의 계층에 따라서 농민적·서민적·귀족적 풍속화라는 구분이 가능하지만, 내용에 따라서는 종교화나 역사화·초상화 등과 명확한 구별을 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어떤 계층의 현실생활을 그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분명하게 특정인물의 개성이나 용자(容姿) 또는 그 신체(身體)를 묘사한 인물화인지, 아니면 인물을 모델로 하여 풍속을 그리고자 한 작품인지를 뚜렷이 가려내기 어려운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풍속화는 고대 그림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으며, 멀리 고대 이집트의 벽화나 폼페이의 벽화, 그리스의 항아리에 묘사된 문양(文樣)이나 로마시대의 모자이크 등에서 당시의 생활을 그린 포도주 빚는 모습 등을 엿볼 수 있다. 중세에는 일상생활이 흔히 예술표현의 대상이 되지 않았으므로 엄밀한 의미에서의 풍속화는 나타나지 않았으나, 종교건축의 장식·조각이라든지 기도서(祈禱書)의 삽화 등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서유럽의 미술에서 풍속화풍의 작품이 처음으로 출현하는 것은 15세기 이후, 그 후반에 접어들어 네덜란드의 화가들이 즐겨 그 화재(畵材)를 다루기 시작한 때부터이다. 이 무렵, 독일의 A.뒤러도 종교적인 내용을 풍속화풍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그러나 풍속화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화가가 등장한 것은 17세기의 네덜란드에서였으며, 요르단스, 브로우베르 등이 풍속화가로 이름 높다. 그 밖에도 당시의 쟁쟁한 화가들 가운데 렘브란트, 루벤스, 벨라스케스 등도 풍속화를 많이 그렸다.
 18세기에 접어들자 프랑스에서는 주로 왕후(王侯)·귀족과 같은 상류사회 사람들의 희구(希求)에 부응한 우아한 생활을 엿보게 하는 J.A.와토가 나타났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서민생활의 주방 속에서 그림의 제재를 찾은 샤르댕도 있다. 이와 같은 시대의 영국 화가 호가스 등의 화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사실주의사조는 많은 풍속화를 낳았다. 프랑스에서는 즐겨 이국(異國) 풍속을 그린 들라크루아, 각 계층의 사람들을 풍자적으로 묘사한 도미에, 자연을 추구하는 가운데 농민들의 생활을 그린 밀레, 노동자의 생활을 다룬 쿠르베 등이 각각 독특한 풍속화의 화풍을 세워나갔다. 이 무렵 독일에서도 A.L.리히터, 멘첼, 라이블 등이 여러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의 생활을 묘사한 풍속화를 제작하였다. 이후 유럽 화단(畵壇)에 인상주의운동이 대두하면서 풍속화는 차차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지만 마네, 드가, 리베르만 등의 그림 가운데에는 풍속화풍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한편, 동양에서는 고대 중국의 여성 풍속을 알려주는 회화로서 동진대(東晉代)의 화가 고개지(顧愷之)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여사잠도(女史箴圖)》의 당대(唐代) 모본(模本)이 현재 런던의 대영박물관(大英博物館)에 소장되어 있으며, 당나라 때의 화가 장훤(張萱)의 원화(原畵)를 송(宋)의 휘종(徽宗)황제가 모사(模寫)한 《도련도(練圖)》가 미국의 보스턴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들 중국회화의 당초 제작의도가 어디 있었든 그것은 여성 풍속이나 당시의 생활상들을 묘사한 것이므로 동양에서 풍속화의 원류(源流)를 이루는 작품들임에는 틀림없다.
【한국의 풍속화】 한국의 경우, 4세기 중반 고구려의 초기 고분인 동수묘(冬壽墓)의 《행렬도(行列圖)》 《마구도(馬廐圖)》 《주방도》 등 고분벽화를 비롯하며, 고구려 중기 및 후기에 걸치는 쌍영총(雙楹塚)·무용총(舞踊塚)·각저총(角低塚)·개마총(鎧馬塚) 등 많은 고분벽화에는 《부부도(夫婦圖)》 《태권도(跆拳圖)》 《무용도》 《씨름도》 등 묘주(墓主) 생전의 주요 사건이나 생활의 갖가지 모습들이 풍속화풍으로 묘사되어 있어 당시의 풍속을 아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그러나 백제와 신라회화의 경우는, 아직껏 이렇다 할 만한 화적(畵蹟)이나 기록이 나타난 바 없어 실상을 알기는 매우 어렵다. 통일신라시대 이후 고려시대에 접어들어서도 이와 같은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풍속화뿐만 아니라 회화 전반의 유례(遺例)가 드물어 실태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다만, 당시 풍속화의 편린(片鱗)이나마 오늘날 그것을 어렴풋이 추측할 수 있게 하는 자료로서, 고려에 사행(使行)하였던 송(宋)나라의 서긍(徐兢)이 집필한 《고려도경(高麗圖經)》 (1124)의 기록이 있다. 즉 고려의 정교한 접첩선(摺疊扇)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그것은 금은(金銀)가루를 바르고, 이 나라의 산림(山林)·인마(人馬)·여인 등의 모습을 그렸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고려의 쥘부채에는 당대의 여러 풍속이나 풍물을 묘사한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솔직·담백한 가운데에도 서민의 숨결이 살아 있는 현실감각에 뛰어난 본격적 풍속화가 크게 발전하였을 뿐만 아니라,이 시기는 한국 역대 회화의 전성기에 해당하는 시대이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의 화가 단원(壇園) 김홍도(金弘道)와 같은 시대의 화가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긍재(兢齋) 김득신(金得臣) 등은 한국 풍속화의 새로운 국면을 개척한 작가들이다. 이들 작가의 풍속화첩(風俗畵帖)에는 서당(書堂)·무동(舞童)·씨름·검무(劍舞)·선유(船遊)· 무무(巫舞)·파적(破寂)·대장간 등 갖가지 제재(題材)를 익살과 기지, 그리고 풍정(風情) 넘치는 필치로 묘사해낸 걸작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 밖에도 문인화가인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과 조선시대 3대 화가로 꼽히는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의 작품들 가운데에서도 풍속화풍의 그림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서양화의 도입 이래 인물을 주제로 하는 회화는 많이 그려졌으나, 크게 내세울 만한 풍속화적 작품은 찾기 어렵고, 다만 동양화에 있어서 세태나 풍속을 제재로 다루는 경향이 있을 뿐이다.
 풍속화는 조선문화 일대 번성기였던 15C에 이은 18C 문예 중흥기 시절 윤두서·조영석 등에 의해 등장하여 김홍도·신윤복·김득신 등 3대 풍속화가를 중심으로 그 절정에 이르면서 하나의 확고한 장르로 자리 잡는다. '실학'이 당시를 대표하는 철학과 사상이고, '여항(閭巷)문학·위항(委巷)문학'(중인[中人]이나 서리[胥吏]들을 중심으로 시사[詩社]를 결성하고 산과 강을 찾아 동인 문학활동을 펴나갔으며 사대부 문학과는 다른 활기찬 현실문학을 꽃피움. 특히 김수장은 시조·가사를 집대성하기도 함)과 서민문학(庶民文學.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이나 본연의 모습을 긍정하는 천기[天機] 또는 진기[眞機]주의 문학관에 바탕함. 17C 허균의 홍길동전에서 비롯 18C 들어서는 춘향전·심청전·장화홍련전 등의 숱한 작품들을 남김)이 당시를 대표하는 문학이라면, 민족화로서 문화·예술을 대표하는 것이 '풍속화'인 셈이다.
 진경 산수화의 흐름이 조선의 자연을 그린 것이라면 풍속화는 조선의 인간과 사회를 그린 진경 풍속화인 것이다. 이러한 조선중심의 실용적·사실적 사조와 화풍이 가능했던 것은 절대군주였던 영조와 정조가 한문화의 원형을 추구하면서 사실주의·진경시대를 강력하게 주도했고 후원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래서 조선이나 주변국의 정밀한 묘사가 다각도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윤두서가 동국여지지도·일본여도 등을 그리는 등 다수의 지도가 제작되어 동북아 정세에 대한 지리전략적 사고가 가능했으며 과학·기술, 농업, 상업 등의 발전이 눈부시게 진행되었고, 일반 시민들은 점차 농토도 늘이고 부(富)도 축적하면서 대체로 넉넉한 생활수준을 유지했고 미술품·골동품 소장 열기가 일어나는 등 문화적 흐름도 왕성했다.
 원래 풍속화는 정선을 시초로 조선의 산수를 배경으로 그린 「진경산수화」나 임금이나 사대부 등의 초상화를 주로 그려담은 「채색초상화」와는 달리, 이땅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의 삶과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려놓은 그림이다. 특히 동시대에 함께 더불어 사는 사람들의 삶과 사회상을 철저한 사실주의적 접근으로 충실하게 표현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자연 그림이 우리 생활속으로 주변으로 가깝게 다가왔기에 친근감이 강하게 든다. 풍속화에서 김홍도(金弘道. 1745∼?)는 그 대표다. 신선도·산수화·인물화·판화·탱화 등 어느 분야 가릴 것 없이 그림 예술을 다 손댔지만 풍속화가로서 그의 이름이 가장 높고 확고하다. 특히 '俗'을 잘 그려 묘사했다. 그래서 그의 풍속화의 특징은 씨름·글을 배우는 서당·장터 등이 배경이 되고 등장인물들 하나하나가 정밀하게 묘사되는 점이다. 이외에도 당시의 사회상을 정확하게 그린 작품들로 대장간·기와잇기·무동·벼타작·새참·주막·활쏘기 등 다수 있다.
 무엇보다 그는 사민(四民)중에서 삼민(三民) 즉 농민, 장사치, 장인(匠人) 등의 생활과 애환을 주된 주제로 삼고, 기생·동물에 이르기까지 우리 땅에 있는 여러 모습을 그려 담았다. 지금도 「풍속도첩」은 그 백미로 꼽혀지고 있다. 그의 그림은 정밀함에서 출발하여 시원스럽고 힘이 넘친다. 그리고 남의 장점에 연연해서 보기 좋게 그리기에 쫓기기보다는 특징적인 모습, 더러는 가장 못난 부분이나 모습도 그대로 표현한다. 그리고 실학파의 사조와 기풍에 영향받은 그로서는 사실성 중시란 기조를 항상 잃지 않는다. 이런 중에 늘 노력하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임으로써 재창조의 세계를 끊임없이 펼쳐 나간다. 그는 스승 복헌 김응환에게서 배우기는 하지만 화풍은 단연코 달리하며 극복의 세계를 보여주는 창조 과정이었다. 특히 그는 1794년에 정조의 신임으로 연풍현감으로 있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정조의 밀명을 수행하는 한편 도슈사이 사라쿠(東洲제寫樂)란 이름으로 일본 전통연극 가부키 배우들의 얼굴을 새긴 판화 150여점을 남겨 일본과 유럽회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일본회화에 한 획을 긋기도 한다.
 신윤복(申潤福. 1758∼?)은 김홍도와 더불어 손꼽는 대표적인 풍속화가다. 그도 여느 화가들처럼 산수와 인물, 동물그림, 글씨까지 남겼지만 역시 백미는 풍속화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여인(미인도라고도 함), 처네쓴 여인, 니승영기, 무녀신무, 쌍륙삼매, 기방무사, 쌍검대부, 주유청강, 청금쌍련, 단오풍정, 주자거배 등이 있다. 그는 상류사회의 적나라한 모습에 초점을 맞추었고 화사함이 넘치는 세련미의 풍속화를 그렸다. 다른 무엇보다 '여인(女人)'과 '색(色)'을 통해 진한 풍속화를 뿌려 놓았다. 또한 빨강·노랑·파랑이라는 강렬한 한민족의 전통 3원색을 주조로 온갖 현란한 색을 곁들여 묘사했다. 그리고 도시와 강·산 등을 배경으로 남녀의 풍류생활을 즐겨 그렸다. 우물가와 빨래터, 주막과 명문가의 후원 등 머무르는 곳 없이 배경이 된다.
 그런데 조선의 보수적 사회상에 비추어 보면 등장인물들의 모습과 행태는 놀랍다. 남녀간에서 배여나는 색정을 묘사함에서 발군의 기량을 보인 것이다. 놀기에 여념없는 한량들과 긴 담뱃대를 물고 있는 기생의 모습은 급진적이고 파격적인 느낌일 들 정도다. 달빛 아래 골목길에서 젊은이와 한 여인이 만나 정분을 나누는 그림은 사랑스러움 그 자체다. 반면에 사랑놀음을 그리다보니 온갖 까발려진 질탕한 놀자판 모습이나 목욕하는 여인을 훔쳐보는 승려의 눈빛은 그 농도에서 진하다. 무엇보다 부드러운 필선을 따라 육감적으로 묘사된 여체와 색정(色情)은 가히 전위적이다. 젖가슴과 젖꼭지가 그대로 드러난 것과 같은 그림들도 여럿이다. 그러다보니 도화서 화가였던 그는 점잖치 못한 그림을 그렸다하여 쫒겨 나기도 한다. 그러나 관념적 판단에서만 벗어나면 선정성에도 불구하고 회화예술의 차원에서 볼 때 그 예술적 가치가 손색없다. 또한 적나라함과 강한 색정에도 불구하고 전혀 역겹다거나 천박하지 않은 자연스런 노출의 미학을 선보이는 힘이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따뜻한 웃음, 익살스러움과 해학, 인간 천부의 본성에 대한 긍정, 밝은 모습 등을 일관되게 유지한다. 지금은 '혜원전신첩(惠圓傳神帖. 30폭 짜리로 국보 135호)'·'여속도첩(女俗圖帖. 6점)'·'행려풍속도병(行旅風俗圖屛. 4폭 짜리)'등을 비롯해 50여점이 남아 전하고 있다. 이외에도 투전·병아리 채가는 고양이 등을 그린 김득신(金得臣. 1754∼1822) 등 여러 풍속화가 들이 등장해 18C 조선 시민들의 삶과 당시 사회상을 묘사하면서 생활문화에 바탕한 예술문화를 만개한다.
 그러나 19C를 지나면서 조선이 세도정치와 혼란으로 깊게 병들어 가면서 어느새 자취를 감추어 버린다. 문화예술은 결코 탐욕스런 관리가 판치거나, 시민의 삶이 어려운 난세에서는 꽃피우지 못한다. 어쨌든 조선 풍속화로 인해 한국인의 18C는 더욱 향기롭고 정감이 간다. 풍속화는 해학과 익살, 풍자를 즐긴 한국인의 기질을 화폭에다 여지없이 그려냈다. 그리고 따뜻함, 정다움, 여유, 은근함, 서정성을 풍기면서 사람사는 모습을 긍정적인 시각에서 그려냈다. 가만히 바라보시라. 그러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빙그레 웃음이 묻어나오는 자신을 보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선과 색채, 예술적 회화기법 등에도 충실하여 예술적 품격을 지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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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거 페인팅 (Finger painting)



핑거 페인팅 (Finger painting)


이미지 출처 : http://magickshop.wordpress.com

 회화표현의 한 기법. 안료에 풀, 가루비누,스타치 등을 섞은 핑거 컬러(수성물감)를 써서 손가락으로 그린다. 주로 그림물감의 미끄러짐에 좋은 타일이라든가 유리, 나무판자 따위가 쓰인다. 반드시 손가락만을 사용해야 하는것은 아니고, 손 전체나 주것, 솔, 바늘 따위도 쓴다. 스피드감이 강조되며, 반응이 있는 점이 특징이다 보통은 그린뒤 닦아내는 방법을 핑거 페인팅이라 부르는데, 종이나 캔버스에 전용하면 작품으로서 보존할 수도 있다. 저학년의 아동교육에서 채용되는 경우가 많다. 전후에는 표현 행위 자체를 중시하는 화가들 특히 추상표현주의적 경향의 작가들이 많이 사용하였다.
화가의 충격적인 몸짓이나 행동이 직접 반영되어, 질감의 변화도 즐길수 있으므로, 지금도 이 기법이나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그리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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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스기 (Press)



프레스기 (Press)




쉽게 말하면 압력을 가해 주는 판화용 기계를 말한다.
프레스기는 보통 석판, 목판, 동판 프레스기 세가지의 종류가 있는데 목판과, 동판 프레스기는 거의 차이가 없지만 석판은 조금 다르다.
프레스는 동판, 목판 프레스기는 보통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프레스기라고 생각하면 되고 석판 프레스기는 당연히 석판을 찍을 때 사용하는 프레스기로 두개의 큰 차이점은 없다.
동판, 목판 프레스기는 베드라고 하는 판위에 큰 롤 사이에 판과 종이를 넣고 두꺼운 천 같은 것으로 (일명:펠트) 덮고 롤 양쪽에 달린 압력을 조절하는 것으로 압력을 맞춘 후 돌려 찍는다.

석판 프레스기는 베드라고 하는 판 위에 무거운 롤이 아닌 베드 길이 만한 굵은 플라스틱 사이에 석판과 ,종이, 펠트를 차례로 덮고 압력을 가해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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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스코 (fresco)



프레스코 (fresco)



The Last Judgement (detail)-CAVALLINI, Pietro
1293.Fresco, 320 x 1400 cm (full fresco).Santa Cecilia in Trastevere, Rome

 소석회(消石灰)에 모래를 섞은 모르타르를 벽면에 바르고 수분이 있는 동안 채색하여 완성하는 회화. 즉 축축하고 ‘신선’(이탈리아어로 프레스코)할 때 물로 녹인 안료로 그리는 부온 프레스코(buon fresco) 기법 및 그 기법으로 그려진 벽화를 가리킨다. 이에 대해 회반죽이 마른 후 그리는 기법을 세코(secco), 어느 정도 마른 벽에 그리는 것을 메초 프레스코(mezzo fresco)라고 부르지만 이들 기법이 함께 쓰이는 경우가 많아 확실하게 구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벽화화법 중 대표적인 것으로 기원전부터 로마인에 의해 그려져 왔다. 작품으로는 아시시의 치마부에, 파도바의 아레나예배당의 조토, 로마의 산타체칠리아성당의 카발리니의 작품 등이 오래된 것이며(13∼14세기), 피렌체의 산마르코대성당의 프라 안젤리코의 명작이나, 그 제자 고졸리에 의한 피사의 칸포산트의 작품 등이 유명하다(15세기). 또 아레초의 성프란체스코성당 본전(本殿)의 《성십자가 전설》은 15세기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걸작으로서 알려졌으며 피렌체의 카르멜회 교회의 브랑카치예배당에 그린 마사초도 르네상스양식을 확립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바티칸궁전에 있는 시스티나예배당의 벽화와 천장화는 미켈란젤로의 노년기의 대작이다. 이렇게 프레스코화는 14∼15세기 이탈리아에서 최성기를 보였다. 17세기 이후 유화에 밀려났지만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미국·멕시코 등지에서 다시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멕시코의 D.리베라는 현대의 주목할 만한 프레스코화가이며, 부르델화(畵), 파리의 샹젤리제극장의 그리스신화의 연작이 특히 유명하다.
 제작과정은 회반죽으로 미리 벽에 초벌질을 하고, 그 위에 시노피아(sinopia)라고 하는 실제치수의 소묘를 그린다. 시노피아를 그릴 수 없는 경우에는 인토나코(intonaco) 다음에 스폴베로(spolvero)나 카르퉁(판지) 방법을 쓴다. 채색할 때에는 아침에 완성 가능한 예정부분(조르나타:giornata)에만 마무리칠의 회반죽을 칠한다. 이어 내(耐)알칼리성 토성안료를 물에 개어 그림을 그린다. 정해진 시간에 조르나타가 다 채워질 수 없을 때에는 말라버리므로 그 부분의 회반죽을 긁어내고 다시 인토나코 단계부터 시작해야 한다. 수정이 불가능하므로 숙련을 필요로 하는 기법이다.
 고대 로마의 벽화가 참다운 프레스코인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많다. 소규모 작품에서는 전체가 프레스코 기법으로 사용된 경우가 많지만, 규모가 큰 벽화에서는 프레스코와 세코기법이 함께 쓰인 경우가 많다. 13세기 후반에는 화면을 분할 채색하는 조르나타가 행해졌다. 참 프레스코의 등장은 13세기 말이며, 14~16세기를 프레스코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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