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06, 2012

표현주의 (表現主義 : Expression‍ism)



표현주의 (表現主義 : Expression‍ism)


뭉크의 '절규'


  형태가 객관적인 현실로부터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주관적인 반응으로부터 나타난다고 보는 미술 운동. 20세기 초 주로 독일·오스트리아에서 전개된 예술운동이다.
특색은 작가 개인의 내부생명, 즉 자아 (自我)·혼(魂)의 주관적 표현을 추구하는 ‘감정표출의 예술’에 있다. 이 운동은 우선 회화에서 시작되어 다른 조형예술을 거쳐 문학·연극·영화·음악에까지 미쳤다. 미술에서의 표현주의라는 명칭은 베를린의 《슈투름(폭풍)》지(誌)의 주간 헤르바르트 바르덴이 보급한 것이며, 이 경우에는 1910~20년에 벌어진 모든 반인상주의(反印象主義)를 표방하는 운동의 총칭이 된다. 그러나 이 개념은 광의로는 시대를 초월한 유럽 미술의 저류(底流)의 하나이다. 즉, 지중해 세계에 대립되는 북방 게르만의 풍토를 반영하고 조형적인 ‘형식’과 그 자율성에 대해 혼의 힘과 그 분출을 특징으로 하며, 고전주의에 대한 낭만주의의 대립으로 규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탈리아·프랑스 회화의 범국제적인 보편성과 비교하여 표현주의를 특징짓는 강한 정신체험, 가시적(可視的) 세계를 초월한 환상, 때로는 냉혹·잔인할 만큼의 분석과 풍자는 위기적인 시대상황에 찢긴 개인의 미와 윤리에 수렴되는 비중이 훨씬 크다. 이런 의미에서 표현주의의 선구는 독일 르네상스의 거장들, 특히 그뤼네발트의 《이젠하임 제단화(祭壇畵)》에 거슬러올라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직접적으로는 반인상주의의 입장에 섰던 뭉크, 호들러, 앵소르, 고흐, 고갱의 1885년부터 1900년에 걸친 화업(畵業)이 주목의 대상이 된다. 상징주의와 아르 누보 양식의 박진성과 평행하는 이들 화가들의 주관적 표현은 드라마틱하고 또한 집념에 가까운 테마를 소수의 강렬한 색채와 대비시키고 왜형(歪形)된 포름(형식), 단순·긴밀한 구도, 선의 그래픽한 예리함과 역동성(力動性)으로 파악하였다. 이상의 조형적 특색은 그대로 독일의 표현파 작가에게도 공통된다.
 19세기 인상주의적 화풍 이후 현대미술은 마티스회화에서 나타나는 평면적인 색면의 사용과 소위 색채원근법의 배제, 그리고 현상적인 재질성등이 강조되는 회화로 향하고 있다. 색채회화는 색채 자체의 존재가치를 인정하는 색채의 자율성을 조형적 가치로 부각시키면서 그 자체를 즐기게 하는 회화적 특성을 보여준다.
 회화세계에서의 색채(色彩)의 중요한 가치는 칸딘스키(Kandinsky)의 추상적 그림에서도 나타나면서 그 상징적 의미가 강조된다. 이러한 의미는 화화적 표현에 있어서의 정신성 또는 영혼성(靈魂性)을 가리키는 것인데, 음악적인 것과 관련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색채는 음과 같이 풍부하고 힘찬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 있어서는 사물의 의미가 느껴지지 않는 선과 형채, 색채 등에 의한 자유스러운 화면구성이 문제되고 순수한 의미의 색채적 요소가 중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음악적인 것처럼 진동하는 색채의 효과는 곧바로 내적 울림 또는 내면적 힘의 바탕이 되고, 이러한 힘이 "내적 필연성" 으로 나타난다. 내적 필연성은 하나의 정념으로 발전해나가는데. 이러한 정념이 영혼적 상태의 폭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칸딘스키의 추상적 회화의 상징적 의미는 바로 그러한 정신적 차원에서 색채적 정념을 시사한다. 칸딘스키가 규정짓는 색채와 정념의 관계는 "노란색은 자극을, 빨간색은 에너지를, 파란색은 무한의 감성을, 초록색은 고요함을, 하얀색은 침묵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표현주의 회화의 세 그룹
 첫째는 1905년 드레스덴에서 결성된 ‘브뤼케(橋)’ 그룹 [다리파 (Die Brucke)]으로 1905년 드레스덴에서 4명의 젊은 건축과 학생들인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 헤켈[Erich Heckel], 슈미트-로틀러프 그리고 블레일리 조직한 미술단체. "분리파"(Secession)의 보수주의레 반대하여 Brucke(다리)라는 단어를 선책한 자체가 의미심장한 일이다. <그것은 이중의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이며, 정확한 프로그램을 보여주지 않을 수도 있었지민 어떤 의미에서는 강에서 또다른 강으로 인도할 수 있는 단어이기 때문이다>-헤켈. 즉 현대성을 추구하는 것일 수도 있다. 화실의 공동 분할과 주제나 방식의 교환을 목적으로 하는 이 독학 화가들의 일상적인 공동작업은 특히 독일 표현주의의 대표가 되는 집단적 스타일의 형성에 트게 공헌한다. 공격적이고 반 부르조아적인 그들은 모든 학파와 논리들을 거부한다.
 표현의 법칙을 강화하면서 더욱 유동적인 필체를 위해 조금씩 색깔을 두껍게 칠하는 것을 포기하고, 재빠르고 솟아나는 듯한 터치와 단순화된 뎃상을 이용하여 모가 난 형태와 단순하고 부조화한 색채로 주제들을 다듬어 나간다. 본래의 낙원상태의 상징인 누드는 그들이 좋아하는 보티브였다.
 1906-1907년의 두 전시회는 관심을 끌지 못하지만 그들의 이념과 미술을 전파하기 위해 이때부터 매년 목판화집을 만들어 낸다. 아놀드 화랑은 1910년에야 격국 그들에게 큰 전시회를 주관한다. 각지 베를린으로 옮기며 그들은 더욱 개인적인 스타일을 선책한다. 이 그룹은 새로운 멤버이자 마지막 멤버인 오토 뮈엘러를 맞이한다. 베를린에서의 더 강도있는 미술적 삶은 그들에게 결실을 가져다 준다. 슈투름에 재빨리 가담하고, 현대미술로 유명한 걸리트화랑은 1912년 이들을 유명세로 만들었으며, 함부르크에서 연이어 전시회를 가진다. 같은 해 이 그룹은 뮌헨에서 블라우 라이터(Blaue Retier, 청기사파)의 두 번째 전시회에 참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공동 스타일이 점점 없어지면서 그들의 협력도 점점 사라져 간다. 1913년에 역사적인 사건으로 만든 키르쉬너의 글인 "브뤼케의 연대기"를 이 그룹이 거부하면서 그룹의 해체가 불가피하게 된다.
 둘째는 10년 베를린에서 바르덴이 창간한 예술잡지 《슈투름》 및 같은 이름의 화랑(畵廊)에 의하여 만들어진 ‘슈투름그룹’으로, 오스트리아의 화가 코코슈카의 자아와 외계의 상극을 새긴 심리적 초상화로 대표된다.
바르덴은 자기 나라의 젊은 전위화가(前衛畵家)를 화랑에 결집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의 미래파, 초기의 프랑스 큐비스트에게도 문호를 개방하였고, 잡지에는 칸딘스키와 마르크의 논문 및 들로네(클레의 번역에 의하여), 레제의 기사를 게재하는 등 전위의 거점이 되었다. 특히 약 15개국 90명의 작가와 366점의 작품을 모아 일찍이 보지 못한 최대의 국제전을 열었다.
 셋째로는 칸딘스키, 마르크를 중심으로 결성한 청기사(靑騎士) 그룹이다.
 1912년 5월 뮌헨의 현대 미술에 관한 글을 모은 피페 출판사의 "알마나크"표지를 위해 마르크(Marc)와 칸딘스키에 의해 지어진 명칭이다. 1911년 6월부터 계획되고 9월에 계약이 체결되며 그해 가을에 작가와 음악가 등 공동협조자들의 도움을 받다 편집작업을 한다.
 구성원으로는 이 밖에도 클레, 야우렌스키, 마르케, 쿠핀, 뮌터 등이 있고, 전람회는 뒤에 드레스덴의 ‘다리’, 베를린의 ‘분리파협회’, 프랑스 작가(루소, 피카소, 브라크 등), 러시아 작가(말레비치)를 추가하여 확대시켰다. 이론가인 칸딘스키는 논문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을 발표하여 유물론과 리얼리즘에 지배당하고 있는 미술에 반기를 들었으며, 화가의 내적필연(內的必然)에서 우러나는 정신성·환상성을 주장하였다. 그의 제작과 더불어 마르크, 클레 등의 형태의 분석·종합의 시도는 ‘청기사’ 운동이 지향하는 현대 추상회화의 중요한 주류의 하나로서 주목된다.
 그들은 뮌헨의 신예술가동맹에서 탈퇴하고 막케(Macke), 뮌터(M nter), 캄펜동크(Campendonck)와 불략(Burljuk)등의 다른 파들을 포섭하면서 1911년 12월 8일부터 탄하우저 화랑에서 선언문-전시회를 주관하고 동일 명칭을 사용한다. 이책과 전시회의 독창성은 작가의 <내적인 필연성>이라고 도처에 현존하는 표현의 하나인 공통점에서 동양과 서양을 재구성하여 추상적이면서 사실적인 모든 형태의 미술을 광범위하게 개방한다는 점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룹 디 브뤼케, 클레, 브라크, 피카소, 드랭을 포함한 독일, 러시아, 프랑스 작가들의 315점의 그래픽 작품을 모은 두 번째 전시회는 1912년 2월 골츠(Goltz)에서 주최된다. 이런 역사적 사건들은 독일 현대미술의 결정적 돌파구 역할을 한다. "알마나크" 제 2권을 출판하려는 계획은 실행되지 못한다. 조직화된 그룹으로 형성되지 못했던 편집팀의 활동은 전쟁으로 끝이 난다.
 이 밖에 베크만, 그로스 그리고 여류화가 모다존 베커를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표현주의 화가들은 제1차 세계대전 종료 후, 재차 그룹을 결성하지도 못한 채 나치스 체제의 발흥과 동시에 ‘퇴폐예술’로 낙인찍혀 개별적으로 어려운 창작활동을 계속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혹은 스스로 붓을 꺾고 예술활동을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벨기에에서 일어난 플랑드르 표현파가 있고,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코브라’ 그룹 (알레신스키, 아펠)의 추상적 표현주의, 초기의 루오, 그로메르 등의 화가도 표현주의의 진영에 넣을 수 있다. 조각에서는 확대된 인체(人體)의 모습을 추구한 렘브루크, 농민의 중후한 종교성을 탐색한 바를라흐가 있다. 표현주의 건축은 최근의 연구에서 관심을 끌 만한 것을 찾아볼 수 있는데 환상적 형태와 색채에 특색을 보인 T치히와 타우트를 들 수 있다.
 미술사 학자 로버트 린튼은 표현주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표현적이다. 제스츄어란 의도적인 표현행위이다. 모든 예술은 작가와 그 상황의 표현 이며, 그 중 특히 감정이나 정서적 메시지를 방출 또는 전달하는 시각적 제스츄어를 통하여 우리를 감동시키고자 하는 예술이 있는데, 바로 표현주의 예술이 그것이다."
 표현주의 미술의 원리는 크게 '비이성', '반전통', '반서구'적인 것을 의미한다. 서양 예술의 기저가 '이성주의'에 놓여 있다면, 표현주의는 '비이성'을 추구함으로서 '반서구'적인 태도와 '반전통'적인 이념을 갖게 되는 것이다. 또한 표현주의는 그림의 내용 즉, '문학성'을 형태의 완성보다 중요시하는 내용주의 미학위에 그 기초를 두고 감정과 이념을 자유롭게 표현하려는 것을 주목적으로 삼고 있다. 이 결과 조형적인 완성도는 이차적인 문제가 되면서 전달하려는 메시지나 작가의 내면세계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을 더욱 중요시한다.

허무주의 대안으로서 표현주의
 20세기 최초의 10년을 지배하는 아르누보의 열광이 끝난뒤, 계속하여 바로 등장한 디자인을 정확히 지적하기는 어렵다. 독일에서는 표현파(독일표현주의), 빈에서는 아돌프 로스의 선구적인 디자인, 체코슬로바키아에는 체코큐비즘이 시작된다. 또한 월터 그로피우스는 '파구스 구두공장', 르꼬르뷔제는 '도미노 시스템'을 발표하고 안토니오 생텔리아가 '신도시'를 디자인하며 미스 반 데 로에(Mies van der Rohe)가 유리의 고층 빌딩을 세우고 러시아 구성주의(러시아 아방가드르)도 나타나는 등 그 후의 모던 디자인을 방향짓는 여러 조형, 운동 ,작가가 이 10년 사이에 함께 모습을 보인다.
 결국 아르누보의 뒤를 이어 독일 표현주의와 체코 큐비즘이라는 2가지 디자인의 흐름이 등장하게 되었다. 어느쪽이 먼저였을까 ?
 빈의 오토 와그너가 아끼는 제자 중 한 사람인 얀 코체라는 프라하로 아르누보를 들여와 체코에 정착시켰다. 한편 코체라에게 직접 배워 새로운 디자인에 눈뜬 고차르, 호호르, 노보트니(O.Novotny), 포예르슈타인 등의 프라하 청년 건축가들은 스승의 아르 누보를 초월하고자 새로운 양식을 만드는데, 그것이 큐비즘이다. 계보적으로는 아르 누보의 직접적인 대를 잇고 있다.
 커트 글라스의 입체 기하학적 디자인은 1920년대 아르데코의 광물 결정과 같은 장식 디자인과 본질적으로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식물적인 아르 누보와 수학적인 국제양식 사이의 디자인 본질을 광물 결정적인 아르 데코 경향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말하자면, 그러한 경향의 예가 체코 큐비즘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큐비즘은 현대 고층건물을 형성시키는데 모티브가 되었다. 즉 식물적인 아르누보 뒤에 이어 등장한 양식이 광물적인 체코 큐비즘이었다.
 독일 표현파는 베렌스의 가스 제조 공장이나 타우트의 유리 파빌리온을 초기의 예로 하여 시작되었는데, 커다란 반응없이 1910년대에 페르치히의 '베를린 대극장(1919)'이 지어진 시점에서 끝난다. 전성기는 다음의 1920년대에 들어서부터이고 이 10년동안에 대부분의 걸작이 탄생하고 있다. 즉 1910년대의 독일 표현주의가 등장을 선언한 점에 의미를 두는데, 그 선언은 타우트의 유리 파빌리온과 페르치오의 베를린 대극장에 나타나듯이 자신들이 말하고 싶은 점을 모두 정확히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독일 표현주의의 선언에 영향을 받아 탄생한 흐름으로 네델란드의 암스테르담파가 있다. 이상이 1910년대의 개관으로 여러가지 흐름이 등장한 혼돈의 시기가 틀림이 없지만 조형에서 공통적인 성격을 찾으면 전체 구성 또는 부분 의장에 보이는 '기하학적 경향'일 것이다. 표현주의와 같이 기하학적으로부터 먼 표현에서도 그 곡선에 비하면 확실히 기하학화하므로 표현주의의 세부의장에 기하학적 문양을 찾는 일은 결코 어렵지 않다.
 표현주의는 회화,문학,연극,음악,조형미술,건축 등 모든 예술분야에 걸친 20세기초 독일어권 예술운동이다. 표현주의(Expression‍ism)라는 말은 프랑스 후기 인상파(Impressionism)에 대치 되는 사조개념으로 독일에서는 1911년 베를린의 시세션전 출품 작품에 대하여 W.보링거가 처음 사용하였다.
 1914년 이전까지 전위는 유켄트 스틸이라고 할수 있지만, 그 10년 동안의 역사는 표현주의와 겹친다. 당시는 여전히 절충주의적인 빌헬름 양식이 있고 A.메셀의 '빌헬름 백화점(1869)', 피터 베렌스의 베를린 'AEG 터빈 공장(1909-10)', 테오도르 피셔의 울름 '병영 부속 교회당(1911)', 월터 그로피우스와 아돌프 마이어의 '파구스 구두 공장(1911)', 파울 보나츠의 '슈투트가르트 중앙역(1913-17)'과 같은 내셔널 로맨티시즘적인 작품으로부터 표현주의는 시작되었다. 유켄트 스틸에서 표현주의로 이어지는 역활은 앙리 반 드 벨드, 요제프 마리아 울브리히, 베렌스가 맡았다.
 헤르만 무테지우스나 브리츠 슈마허와 함께 독일 공작 연맹을 설립하는 한편, 반 드 벨드는 1906년에 바이마르 공예 학교를 세웠는데, 1919년 바우하우스(Bauhous)의 전신이 되었다. 그리고 베렌스로 부터 그로피우스, 미스 반 데르 로에, 르 꼬르뷔제와 같은 1920년대의 중심적인 건축가들이 독립했던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전부터 활약한 표현주의 건축가는 드문 편으로 M.베르크의 '세기의 홀(1913)', 한스 페르치히의 '포젠의 급수탑(1911)', '루반의 화학공장(1911-12)'이 알려진 정도였다.
 세계대전을 거쳐 1918년 바이마르 공화국이 태어나자, 봇물 테지듯이 예술 노동 평의회, 11월 그룹이 만들어지고 표현주의 건축가들이 활약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크게 3가지 그룹으로 분류되는데, 우선 첫째 그룹은 부르노 카우트 중심의 이상사회를 이야기한 건축가들이다. 타우트는 1919년 무명 건축가전에 참가한 건축가를 중심으로 '유리의 열쇠'그룹을 만들어 환상적 스케치를 다수 남겼다. '공예, 조각, 회화의 한계는 사라질 것이며, 하나 즉 건축이 될 것이다. 건축은 정신적 제가치의 직접적인 매개물이며 오늘은 잠자고 있느나 내일 깨어날 일반대중의 감각력은 실체화하는 것이다. 다만 정신적인 영역에서의 총체적인 혁명만이 이러한 건축을 창조할 수 있다.'라고 타우트는 밝히고 있다. 총체적이고 집합적인 예술작품의 관념을 전개시켜 '민중을 위한 예술'을 요구하며 건축은 그것을 설계하고 축조하는 자들간의 지역사회감정을 창조할 수 있다는 신념을 표현하고 있다. 표현주의와 상상의 건축은 Arbeitsrat의 무명 건축가전에서 최소한 도면에 있어서는 그 최고점에 달했다.
 코로포토킨이나 E.하워드의 사상을 배경으로 '도시의 모자(1919)', '알프스 건축(1919)', '도시의 해체(1920)'와 같은 유토피아 건축을 계속해서 발표했다. 또한 건축 시인 P.셀버트의 '유리 건축(1914)'은 독일 공작연맹에 출품한 타우트의 '유리 파빌리온(1914)'으로 결실을 보았다. 특히 원통형 계단실을 유리 블록으로 감싼 신선한 감각의 공간 디자인이나 프리즘 유리를 통한 무지개 빛과 색채의 디자인은 미래 건축 공간의 매력을 실험적으로 보이는 일에 성공하고 새로운 건축재료가 가져올 가능성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었다. 나중에 타우트는 이 작품을 기초로 이상적인 건축구상을 전개하게 된다. 제2그룹에는 보수적인 건축가들이 속하는데, 그 중에서도 전쟁 전부터 활약하고 있던 페르치히는 '베를린 대극장(Grosses Schauspiehaus)(1919)'으로 주목되었다. 새로운 사회와, 그사회의 정신과 음성의 가장 당당한 표현으로서 대중극장이 시도되었다. 예술과 민중과의 장벽을 깨뜨리는 것 즉 'coup de th tre'였다. 또한 지방 도시 함부르크에서는 츠리츠 헤거가 '칠레 하우스(1924)'를 설계하여 그 하늘을 찌르는 파사드로 베를린 건축가들에게 다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
 이러한 건축가들과는 달리 단독으로 유기적인 건축을 겨냥한 제3그룹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후고 헤링은 '가르카우 농장(1923)'을 설계하여 '기관 역활의 건축'을 제안하고, 또한 H.핀스테를린은 환상적인 생물 스케치를 다수 남겼다. 표현주의의 금자탑이라고 부르는 에리히 멘델존의 '아인슈타인 탑(1920-24)'도 조소적인 건축이지만, 이후 그의 디자인은 수평선을 강조하는 형태로 바뀌였다.
 Einstein Tower에서 나타난 에리히의 건축의 세가지 잠재력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 '창조적 소생(creative resurgence)'의 연속 간주, 탑에서 이들 잠재력이 탐구 되었다. 그는 그 자체의 법칙에서 건축은 그 활동적인 mass를 지배하는 세가지 조건을 마련한다. 그 윤곽으로 선의 요소를 나타내는 역동적 조건-공간의 운동, 표면의 돌출로서 mass의 상호관계를 나타내는 율동적 조건, 평면과 단면에 의한 운동의 평형일정적 조건이라고 한다. '쇼캔 백화점(1929)', '우니페르슴 영화관(1926-29)'등의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렇지만 바이마르 공화국도 안정을 찾게 되자, 이상을 이야기하던 건축가들도 이어서 지드룽과 같은 공공 건축에 참여하게 된다. 즉 타우트의 '브리츠 지드룽(1925-31)', '지멘스슈타트 지드룽(1930)'등이 연달아 건설되었던 것이다.
 1919년 설립된 바우하우스는 당초 표현주의적 경향이 강하였지만, 192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서서히 구성주의-신즉물주의적인 경향을 띄게 된다. 또한 1927년 독일 공작 연맹이 슈투트가르트에서 개최한 '바이센호프 주택전'에서는 '하얀' 합리주의적인 건축이 세워지고 이미 표현주의는 과거로 불리워진다. 그리고 1930년대에는 이미 이야기가 되는 일이 적어지고 1933년 나치스가 정권을 장악함과 동시에, 바우하우스나 독일 공작 연맹도 쇠퇴하면서 주요 건축가들은 해외로 계속 망명하는 등 표현주의는 파국을 맞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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