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고갱 (Paul Gauguin : 1848.6.7~1903.5.8)
작품명 : Woman Holding a Fruit
작가연보
1848년 6월7일 파리에서 출생.
1855년 들라크로와, 프랑스 학사원 회원이 됨.
1859년 오를레앙 소신학교 기숙생.
1861년 마네 살롱에 [기타레로],[양친의 초상]을 출품. 대성공을 거둠.
1864년 오를레앙의 공립 중학교 입학.
1865년 6개월 동안 수부 생활.
1870년 나폴레옹 호 보불전쟁에 참전.
1872년 중견인의 역할에 숙달됨. 모네[인상,일출]을 제작.
1873년 결혼.
1875년 [에나항에서 본 세느 강]을 제작.
1876년 풍경화 [비로플레 숲의 잔디]가 처음으로 살롱에 입선.
1879년 인상파 화가인 마네, 세잔, 피사로, 르느와르, 모네, 시스리 등의 작품을 빚을 내어 수집.
1880년 제5회 인상파전에 유화7점, 대리석상 1점을 출품. [과부 습작]을 그림.
1881년 제6회 인상파전에 유화8점, 소립상 1점, 메다이용1점을 출품.
1882년 제7회 인상파전에 유화, 파스텔화 등 12점과 조각작품 1점을 출품했으나 혹평.
1886년 제8회 인상파전에 유화19점 출품. 고호와 첫 상면. 1개월 동안 병원에 입원.
1888년 [야곱의 결투]를 제작. 인상파를 탈퇴. 몽마르트에서 첫 개인전.
1889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 출품된 자바의 미술에 관심을 가짐.
1891년 타히티행 여비 마련을 위해 30점을 매각.
1892년 1개월동안 입원. 토착민들의 민간 종교를 믿으면서 [시장], [영혼이 지켜본다]등 제작.
1894년 4월, 자바 여자 안나와 여행. 11월 파리로 귀환.
1895년 3월, 프나비아 지방에 정착.
1896년 4월 부터 새 여자 파프라와 생활. 고독과 병과 절망을 견디지 못해, 10월에는 발광 상태.
[나베 나베 마하나], 자화상 [골고다 곁에서]등 제작.
1897년 5월, 딸 아느리느의 사망소식에 상심. 11월, 샤를르 모리스에 의해 고갱의 수기 [노아 노아] 제1장이 파리에서 발표 됨. 12월, 자살을 결심. 유서적 작품[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를 그림.
1898년 [노아 노아] 완성.
1899년 토목국을 그만두고, [빨간 꽃과 유방]을 그림.
1901년 다리를 치료하기 위해 입원했다가 2월에 퇴원. 8월, 타히티를 떠나 마르키즈 제도의 히바오아 섬에 옮겨 [즐거운 집] 이라는 이름을 붙인 움막집을 세우고, [그리고 그 여성들의 나체의 금빛은...]을 제작.
1903년 [아방 에 알프레] 전후편을 집필. 화상 보라르에게 근작 10점을 보냈으나 무소식. 4월 원주민에 대한 관헌들의 횡포에항의, 관헌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징역 3개월, 벌금 5백 프랑의 언도를 받음. 5월 18일, 심장병이 악화, 히바오아 섬에서 사망.
프랑스의 화가. 파리 출생. 프랑스 후기인상파 화가이다. 폴 고갱은 다른 예술가와 달리 고호(Vincent Van Gogh)가 화가가 되기전 목사를 지망했던 것처럼, 35세의 나이로 예술 외적인 우회적(迂廻的)삶을 보낸 작가이다. 폴 고갱이 1848년 파리에서 출생하자, 얼마후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쿠데타가 일어나고, 공화주의자(共和主義者)였던 그의 부친은 피신하게 된다. 부친의 피난길에 일가족이 따라나선 것이 남미(南美)의 페루에 있는 리마(Lima)행이었는데 알려져 있다시피 여행 도중 부친은 사망하지만, 그곳에서 눌러 살게 된 4년간의 어린 시절의 경험은 폴 고갱에게 지울 수 없는 기억으로 남게 된다. 7세의 나이로 남미에서 남불 오르레앙(Orleans)으로 돌아온 그는 그곳 신학교에 다니게 되는데 그곳에서 고갱은 자기 이성과 감성에 맞지 않는 위선적인 덕행에 강렬한 반발을 보인다.
흔히 고갱의 생애와 예술을 이해하는 길잡이로서 다음의 세 가지 문제를 들 수가 있다. 고갱 스스로가 '나의 혈관 속에는 인디언의 피가 흐르고 있다.' 고 말한 것처럼 첫째는 그의 혈통, 둘째는 그의 결혼,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화가로서의 천직에 대한 눈뜸이 그것이다. 1865년 (17세)에 그는 견습 항해사로서 상선에 승선, 리오데 자네이로까지 가기도 했으며, 좀 뒤늦게이기는 하나(1887년) 파나마로 떠나기도 했다. 1855년 프랑스로 돌아온 고갱은 3년동안(1868~1871)의 병역도 무난히 마친 건실한 청년으로 성장하여, 1871년 4월에는 증권 주식회사인 베르텡 상회에 입사하게 된다. 입사 2년 후 1873년에 그는 덴마크인 인 메트 소피 가트와 결혼한다. 예술의 마(魔)가 그를 사로잡았던 그때 고갱의 나이는 35세(1883年)였으며, 새로운 직업을 선택하기엔 또한 이미 늦은 나이였다. 그러나 규칙적이고 여유 있는 생활을 누릴 수 있었던 그가 그렇게 갑작스럽게 생의 방향을 전환시킨 것은 결코 객기에 의한 젊음의 충동 때문임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유년기의 경험이 예술의 이념으로 발전한 심사숙고의 결과요, 그것이 가져올 갖가지 희생을 충분히 의식하고 동시에 자신의 능력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해서의 결심이었다고 볼 수 있다.
회화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하면서 특히 인상파의 작품을 수집하고 있었는데, 27∼28세부터는 일요일마다 본격적으로 회화연구소에 다녔다. 1876년 처음으로 살롱에 출품하여 C.피사로(1830∼1903)를 사귀게 된 것을 계기로 1880년 제5회 인상파전 후로는 단골 멤버가 되었다. 82년 피사로의 소개로 P.세잔, A.기요맹(1841∼1927) 등과 친교를 맺어 화가가 될 결심을 굳혔다. 이듬해인 1883년 35세에 증권거래점을 그만두고 그림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생활이 어려워 아내와 사이가 나빠졌으며 한때는 처가가 있는 코펜하겐에 갔으나 결국 처자식과 헤어져 파리로 되돌아왔다. 1886년 6월 도시생활에 지쳐 브르타뉴의 퐁타방으로 이사하였다. 거기에서 종래의 인상파풍 외광묘사(外光描寫)를 버리고 차차 고갱 특유의 장식적인 화법을 지향하여 P.세뤼지에, M.드니, P.보나르 등, 후일 나비파(Nabis 派)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해 11월 파리로 돌아와 고흐, 로트레크 등을 알게 되었으며, 특히 고흐와는 깊이 사귀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 타협할 수 없는 성격이어서 고흐가 귀를 자른 사건을 계기로 비극적인 작별로 끝났다. 그 후 다시 퐁타방으로 가서 《황색의 그리스도》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등을 그리고, 조각·판화·도기(陶器)에도 손대어 보았다. 그러나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고 문명세계에 대한 혐오감만 더하여 마침내 91년 남태평양의 타이티섬으로 떠났다. 《네버모어:Nevermore》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타이티의 여인들》 《언제 결혼할까?》등은 만년의 작품들이다. 타이티에서도 빈곤과 고독에 시달리고 병마에 시달려 자살을 기도하기도 하고, 원주민을 옹호하여 현지의 백인 관헌과 충돌도 일으켰으나, 원주민의 건강한 인간성과 열대의 밝고 강렬한 색채가 그의 예술을 완성시켜나간다. 그가 꿈꾸었던 예술가로서의 삶은 원시의 세계에서 시작되었으며, 타히티 섬은 그에게 원초적 감성을 제공해 주는 예술의 근원지였다. 산업문명의 발달이 점차 인간의 순수성을 앗아갔다고 생각했던 고갱은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순수성을 타히티 섬의 원시에서 발견한 것이다. 원색적인 색채와 강렬한 이미지, 그것이 곧 고갱의 작품 세계를 이끄는 중심이었다. 늘 인간의 삶에 대한 진실, 순수성에 대해 고민하고 갈등했다. 그리고 그 깊숙한 곳에서 울리는 영혼의 떨림에 귀 기울였다.
세잔이 자연을 기본적인 조형 질서로 재창조하면서 자연에 충실했던 화가였다면, 고갱은 그 자연을 철저하게 외면하고자 했던 화가였을지 모른다. 고갱 역시 인상주의 양식의 영향을 토대로 하고 있으나, 그는 타히티 섬의 원시림에 묻혀 강렬한 색채와 인간을 통한 근원적인 상징성을 부여하며 새로운 구성을 시도했다. 그래서 고갱을 ‘고귀한 야만인'이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고갱은 자신의 예술적 영감을 위해 다른 어떤 화가들보다 많이 여행을 다녔다. 그리고 그의 작품이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리게 된 곳은 남태평양의 타히티였다. 고갱은 타히티 섬에 머물며 원주민들과 직접 생활하고, 서서히 그들의 삶에 동화되어 갔다.
내면적인 감정에 충실한 화가 고갱의 일탈은 내면 세계로 떠나는 여행을 캔버스 위에서 시작한다. 인상주의 화풍에서 출발한 그의 작품 세계는 점차 풍부한 색채와 단순한 선으로 원시의 세계를 탐닉하게 된 것이다.
문명으로부터 점차 멀어져 가고는 있었지만 고갱은 그 원초적인 욕구에 순응했다. 그에게 진정한 자유의 항해를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와준 곳은 오직 남태평양에 유유히 떠 있는 타히티 섬이었다. 고갱은 그 깊은 원시림에서 인간의 본성을 자각하고 새롭게 눈을 떴다. 타히티에서 고갱에게 주어진 삶은 오로지 미술을 통한 예술세계 뿐이었다. 문명의 이기가 낳은 얼룩진 유럽을 벗어나 고갱의 심장에는 열대지방의 정적이 안겨 주는 아름다운 맥박의 소리가 들려 왔다. 고갱은 이 체험을 신비감으로 자연을 표현하는데 주력했다. 따라서 그의 화폭에 등장하는 소재는 물론이고, 그들의 삶조차도 신비롭게 다가오는 것이다. 문명과 단절된 고립의 생활, 하지만 그곳엔 자연이 제공하는 신비로움이 존재하고 있었다.
고갱의 독자적인 회화 양식이 정립되었던 시기는 1886년에서 1890년 사이이다. 정처없이 떠돌았던 끝없는 여행, 여행 끝에 남겨진 갖가지 시련을 극복해 낸 고갱의 회화 양식은 ‘종합주의'로 불리운다. 그는 인상주의가 주장했던 시각적 효과보다 꿈과 사상, 그리고 상상력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분할되거나 점묘에 의한 필촉 대신 널찍하게 분할된 원색의 색면과 평면적인 구성을 사용했던 것이다. 또 굵직하게 둘러쳐진 윤곽선을 통해 그는 양감을 철저하게 무시하며, 회화의 평면화와 장식성을 추구했다. 하지만 고갱의 작품 세계가 갖는 독창성은 단지 평면화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평면화와 동시에 그 안에서 상징성을 부여했다. 그리고 이 상징성은 문명을 벗어난 원시주의로 귀착된다.
그리고 일본주의의 영향을 받았던 고갱은 일본판화에서 엿볼 수 있는 단순한 선과 색채를 자신의 화폭에 차용했다. 이로써 연출되는 평면적이고 장식적인 화면 공간은 고갱의 독자적인 회화 양식 구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고갱은 타히티 이전에 페루나 마나마, 마르티니크, 브르타뉴 등의 체재 경험을 통해서 원초적인 예술세계에 대한 질문의 답을 구하고자 했다. 고갱은 당시의 세계 전람회 경험을 통해 그의 예술세계가 나아가고자 했던 결정적인 방향을 설정하고, 이를 연출해 낼 수 있는 가치를 추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다양한 경험의 산물은 그의 작품 곳곳에 녹아 있어 때로는 낭만주의적이거나 원시주의적인, 그리고 그가 머물렀던 다양한 체험의 흔적들이 남게 된다.
상징적이고 관념적이기까지 한 고갱의 작품에는 무언가 비밀스러운 진실이 숨어 있는 듯하다. 고갱은 강렬한 원색의 색채와 선의 표현으로 관찰되어진 현실의 세계를 과장하거나 단순화시키는 종합주의를 지향했다. 이 때문에 고갱의 작품은 당시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즉각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문명과 원시의 대립이라는 주제 속에 자기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태도는 훗날 다른 동료 화가들, 특히 고호와의 공동 생활의 시기에서도 여실히 드러내 보이고 있는 면이라 하겠다.
1901년 마르키즈제도의 히바오아섬으로 자리를 옮겼을 무렵 매독과 영양실조로 회복 가망성이 거의 없었다. 1903년 환상으로 본 풍경을 그린 《눈 속의 브르타뉴 풍경》을 끝으로 기구한 생애를 마쳤다. 그의 상징성과 내면성, 그리고 비(非)자연주의적 경향은 20세기 회화가 출현하는 데 근원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그의 업적은 후기인상주의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고, 20세기 미술에 큰 영향을 미치며 입지를 확고히 했다.
구로구입시미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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