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7, 2013

신인상주의 ( Neo-impressionnisme : 新印象主義 )

신인상주의 ( Neo-impressionnisme : 新印象主義 )


쇠라 / 아니에르에서의 물놀이  / 1884 / 캔버스에유채 / 영국 런던 국립미술관 소장

 근대 프랑스 회화의 조류. 인상주의를 과학적 방법으로 추진하고자 한 운동. 신인상주의는 G.쇠라, P.시냐크등을 중심으로 행해진 점묘주의등의 이론과 수법 및 그 운동을 말한다. 쇠라가 죽은 뒤에는 시냐크가 그 대변자가 되었다. 빛의 분석은 인상주의의 수법을 계승하면서도 인상파의 본능적· 직감적인 제작 태도가 빛에만 지나치게 얽매인 나머지 형태를 확산시킨다는 점에 불만을 느끼고, 여기에 엄밀한 이론과 과학성을 부여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색채를 원색으로 환원하여 무수한 점으로 화면을 구성함으로써 통일성을 유지하였다.
 즉, 그림물감을 팔레트나 캔버스 위에서 혼합하지 않고 망막(網膜) 위의 시각혼합으로 필요한 색채를 얻는 방법이다. 예를 들면, 청색과 황색의 작은 점들을 수없이 배열해나가면 시각적으로는 녹색으로 보이는 따위이다. 또한 형태나 구도에서는 ‘황금분할(黃金分割)’ 등을 자주 사용함으로써 고전적인 회화에서처럼 안정성을 찾으려 하였다. 이와 같은 특징을 대표할 만한 작품이 쇠라의 《그랑드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 (1886)와 시냐크의 《펠릭스페네옹의 초상》(1990)이다.
 인상주의가 사용한 기법을 과학적으로 더욱 발전시키면서도 동시에 인상주의의 경험주의적 사실주의에 대한 반발, 고전주의적 정신의 부활을 꾀한다는 기치 하에 쇠라가 1884년 5월의 앵데팡당 전에 출품한 「목욕하는 사람들」을 보고 비평가 펠릭스 페네옹이 신인상주의라 이름붙였다. 쇠라는 거기서 시냑을 만나 함께 '앵데팡당 미술가 협회'라는 새로운 그룹을 만들었다.
 점묘주의 혹은 분할주의는 신인상주의가 사용하는 독창적인 테크닉의 기반을 이루는 것으로써, 캔버스에 색칠을 해 나갈 때 순색만을 사용하되 이를 일체 뒤섞지 않으면서 작은 점으로 찍어나가는 방법을 말한다. 이 경우 색조의 순도는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보는 이의 망막위에서 중간색이 형성되는 효과를 낳게 된다. 이 방법은 와토, 들라크루아, 터너 등이 이미 사용하였으며 인상주의자 중 르노아르가 최초로 사용했다.
 쇠라등의 신인상주의 화가들은 이러한 기법을 좀 더 과학적으로 발전시킨 자신의 기법에 '점묘주의' 대신 '분할주의'라는 용어를 더 어울리는 것으로 생각했다. 1887년부터 1891년 사이 쇠라는 과학적 이론들을 과학적이고 정서적인 선과 색조로 환원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해 나가면서 전통적인 아카데미 이론과의 접목을 시도하기도 한다.
 색채 분할등 인상주의의 기법을 더욱 체계화시키는 동시에, 신인상주의자들은 인상주의자들의 경험주의적 사실주의에 정면으로 대비되는 정신, 즉 그림이란 신중하게 고려되고 계획될 수 있으며 과학적으로 계산된 효과가 예견, 지향될 수 있다는 사고를 도입시켰다. 세잔느와 더불어 쇠라가 현대 회화의 혁신적 인물로 취급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신인상주의는 뤼스, H.크로스, D.피에, C.앙그랑, 리셀베르크 등의 동조자를 얻는 한편, 고흐, 고갱, 피사로 등에게도 한때 영향을 주었다. 또한 조형이론의 존중과 거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 지성주의 및 구도나 형태의 기하학성 등 여러 특색은 20세기의 큐비즘과 오르피즘, 추상회화 등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 회화운동의 이론을 체계화한 시냐크의 저서 《들라크루아에서 신인상주의까지》(1899)가 있다.

쇠라 ( Georges Pierre Seurat : 1859.12.2~1891.3.29 )
 신인상주의미술을 대표하는 프랑스의 화가. 파리 출생. 1878년 파리의 관립미술학교에 입학하여 앵그르의 제자 H.레만의 지도를 받다가, 다음해 지원병으로 입대하여 브레스트의 해안에서 병역을 마쳤다. 파리로 돌아와서는 고전 작품을 연구하고 소묘에 힘을 쏟는 한편, 셔브뢸, 헬름홀츠 등의 색채학과 광학이론을 연구하여, 1881년경 들라크루아의 작품의 색채대비와 보색관계를 해명한 글을 발표하여 세인의 관심을 모았다. 이러한 이론을 창작에 적용하여 점묘(點描)화법에 의한 최초의 대작 《아니에르에서의 물놀이:Une Baignade, Asni뢳es》(1883∼1884)를 완성하였는데, 이 작품은 1884년 살롱에 출품하여 낙선하였으나 앙데팡당전(展)에 출품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일을 인연으로 평생 화우(畵友) P.시냐크와 사귀게 되었다. 1885년 《그랑드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를 제작하여 다음해에 열린 인상파 최후의 전람회에 발표하였다. 이것은 전작(前作)의 수법을 한층 더 발전시켜 순수색의 분할과 그것의 색채대비에 의하여 신인상주의의 확립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이 밖에 《포즈를 취한 여인들:Les Poseuses》(1888) 《기묘한 춤 Le Chahut》(1889∼1890) 《화장하는 여인》(1890) 등의 작품이 있다. 모두 인상파의 색채원리를 과학적으로 체계화하고 인상파가 무시한 화면의 조형질서를 다시 구축한 점에서 매우 의의가 있으며, P.세잔과 더불어 20세기 회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전염성 후두염으로 32세의 젊은 나이에 파리에서 요절하였다.

시냐크 ( Paul Signac : 1863.11.11~1935.8.15 )
 프랑스의 화가. J.P.기요맹의 제자. 파리 출생. C.모네의 작품을 보고 감동하여 화가가 될 뜻을 세워 1883년 20세 때 아카데미 리브르 드방에 들어가 인상파의 화풍을 익혔다. 84년 제1회 앙데팡당전에 처음 출품하고, 그때 출품된 G.쇠라의 작품에 공감하여 그와 친교를 맺고부터는 색채의 동시대비의 이론과 기법을 연구하여 그 성과를 86년의 인상파 최후의 전람회에 쇠라와 함께 발표함으로써, 신인상주의의 기치를 선명하였다. 그의 작풍은 과학적 점묘주의에서 나중에는 쇠라의 점묘보다 큰 점을 이용한 모자이크풍의 묘사법으로 변화했는데, 풍경화가로서 각국의 바다 풍경, 특히 프랑스 각지 해항(海港)의 풍경그림에 특색 있는 작품이 많다. 앙데팡당전의 창설자의 한 사람이며, 1908년부터 종신토록 앙데팡당전의 회장을 지내면서 청년화가들을 격려하였고, 신인상주의의 바이블이라고 일컬어지는 《들라크루아로부터 신인상주의까지:De Delacroix au Neo-impressionnisme》 (1899) 등의 저서를 남기는 등 생애를 신인상파 지도자로서 정열적으로 활약하였다. 주요작품에 《마르세유항의 풍경》(1905) 등이 있다.




개봉동화실

신사실주의 ( 新寫實主義 : Nouveau Realisme )

신사실주의 ( 新寫實主義 : Nouveau Realisme )



 1950년대 초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하여 등장한 유럽에 있어서의 새로운 경험의 전위미술운동. 당시 유럽과 미국의 지배적인 회화 조류이던 앵포르멜 미술, 추상표현주의, 타시즘 등 일련의 추상미술에 대응해서 일어났다. 신사실주의는 공업 제품의 단편이나 일상적인 오브제를 거의 그대로 전시함으로써, '현실의 직접적인 제시'라는 새롭고 적극적인 방법을 추구했던 예술이라는 점에 특색이 있다. 이 방법은 신사실주의의 가장 주요한 이념으로, 이브클랭의 비물질화 사상에서 발전한 것이었다. 즉 공업화된 사회를 현대의 자연으로 보아, 그 속에서 생산되는 물체를 무매개적으로 제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사실주의의 중심이 된 사람은 프랑스의 비평가 피에르 레스타나로서 그는 1960년 4월 밀라노의 아폴리네르 화랑에서 제1회 선언을 발표하고, '누보 레알 리스트전'을 개최했다. 이 전시회에서 처음으로 누보 레알리스트란 호칭이 쓰여졌으나, 정식으로 그룹이 결성된 것은 그해 11월이었다. 이어 60년 말 파리에서 열린 제2회 전위 미술제에서 최초로 작품을 발표했고, 이듬해 5월 파리의 제이 화랑에서 '다다를 넘는 40도'라는 전시회가 조직되어 신사실주의의 존재가 세상에 인정되게 되었다.
이 전시회에서 아르망은 그림물감의 튜브나, 진공관과 같은 대량 생산의 공업 제품을 집적한 작품을 출품하여 '현실의 직접 적인 제시'라는 방법을 구체화시켰다. 한편 다니엘 스포에리는〈타블로 피에지 (함정의 회화)〉라는 작품을 출품했는데, 음식물이 남아있는 식기류를 쟁반 위에 그대로 고착시킨 것이었엇다. 이것은 음식물이 남아 있는 상태를 현상대로 제시한 것으로 팅겔리의 폐품이용의 작품과 상통하는 것이었다. 또 60년의 살롱 드 메에 출품했던 세자르의 폐물 자동차를 입방체 상태로 고정시킨 '압축 조각'은 소재의 특이성과 메티에의 방기라는 점에서 신사실주의의 미학을 잘 나타내주는 작품이다.
 신사실주의의 그룹의 최초의 참가자는 레스타니, 아르망, 뒤프렌, 앵스, 이브 클랭, 마르시안 레이스, 다니엘 스포에리, 팅겔리, 텔라, 니키 드 생 팔, 크리스토 등이 참가했다. 신사실주의의 세 개의 선언을 발표하여 이념적으로는 통일을 보였으나, 구체적인 개개 작품의 신사실주의로서의 공통성은 결코 명확하지 않다. 공통적이라면 '현대의 자연에 대한 공통적인 감각과 집단적 행위의 일시적인 필요성의 자각'이라는 점뿐이다.
 레스타니에 의하면, 기계화되고 공업화되어 광고로 가득 찬 것이 현대의 자연이므로, 신사실주의 화가는 그 자연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제시'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전략적 필요성에 따라 그룹이 결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구로구미술학원 / 전원미술학원 구로 캠퍼스

신라고분 (新羅古墳)

신라고분 (新羅古墳)



 신라는 무덤을 통해볼 때 크게 3기로 나눌 수 있다. 조기(早期)는 원삼국시대로 움무덤[土壙墓]을 축조한 시기이며, 전기(前期)는 4세기 전반~6세기 초로 경주에서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 영남에서는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墳]이 축조되었다. 마지막 시기는 6세기 전반 이후로 경주에서는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 축조되나, 지방에서는 고분이 소멸되는 양상을 보인다. 신라의 주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논란이 되는 것은 돌무지덧널무덤의 선행묘제로서 돌무지무덤이 존재하였는가 하는 문제이다. 대표적 전파론자인 최병현과 김원룡은 돌무지덧널무덤의 나무곽 구조 위에 별도의 목조시설이 있는 것은 시베리아에서 유행한 묘제와 일치하는 것으로 돌무지무덤이 선행되지 않았다고 본다. 반면, 일제강점기 때 우매하라[梅原末治]의 낙랑 나무덧널[木槨]과 대구 대봉동 고인돌돌무지의 결합설 이래, 북한의 박진욱이 고구려의 돌무지무덤[積石墓]과 나무관무덤[木棺墓]의 결합형태로, 강인구가 초기의 고구려계 돌무지무덤에 뒤에 다시 봉토(封土)를 부가하였다고 보았다. 사실, 돌무지덧널무덤은 경주지역에 한정된 묘제로 당시 영남지방에서는 구덩식돌덧널무덤, 굴식돌덧널무덤, 그리고 독무덤 등이 나타난다. 그러나 최근 울산지역 중산리유적의 발굴조사 결과 나무덧널무덤에서 돌무지덧널무덤으로의 영향을 받아 성립했다는 자체발생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대체로 경주지역에서의 무덤축조는 언덕 위에서 평지로, 소형무덤에서 대형무덤으로 변하면서, 한편으로는 나무덧널을 보존 연장하고, 한편으로는 봉토의 거대화를 위해 고인돌과 같은 돌무지 전통이 새로 채용되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경주의 돌무지덧널무덤은 귀족층의 묘제로 보이며, 관의 위치에 따라 지하식·지상식·반지하식 등으로 나뉘는데, 대부분 지하식이다. 이는 지하에 광을 파고 상자형 나무관을 짠 다음, 냇돌로 둥글게 쌓고 다시 봉토를 덮고 둘레돌[護石]을 돌린 것으로 추가장(追加葬)이 되지 않는다. 초기에는 주곽(主槨) 외에 부곽(副槨)이 있었으나, 부곽이 사라지고 유물은 주곽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돌무지덧널무덤에서는 다곽묘(多槨墓)와 단곽묘(單槨墓)가 있는데, 연구 초기에는 이것이 시기적으로 변하는 것으로 보았으나 근래에는 계급 차이의 반영으로 보고 있다.
 대표적 돌무지덧널무덤으로는 황남동 109호분과 천마총·호우총 등이 있다. 돌무지덧널무덤 이후에 등장한 묘제는 굴식돌방무덤으로, 평면이 장방형이면서 평천정(平天井)을 한 것과, 방형널방에 궁륭식 천정을 가진 것으로 나뉜다. 관대에는 대개 머리베게[頭枕]와 족좌(足座)가 있다. 출현시기는 경주 보문리 부부총이 돌무지덧널무덤과 굴식돌방무덤이 쌍분을 이루므로 가장 고식으로 보이며, 그 토기의 양상으로 6세기 중기로 편년된다. 평면이 대체로 방형이고 ‘ㄱ’자형의 널길[羨道]이 있는 이러한 굴식돌방무덤은 김해·고령·합천· 현풍·인산·경산·경주 등에서 발견된다. 한편, 순흥 읍내리에서는 고분벽화가 나와서 신라· 가야와는 이질적인 고구려계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며, 쌍상총(雙床塚)에서는 방형널방의 남벽 중앙에 ‘모’자형 널길이 나 있다.

천마총 (天馬塚)
 경주 황남동 고분군 일대를 정비, 정화하여 대릉원이라 이름지은 고분공원 안 서북쪽에 위치한 고분으로 원래 경주 155호분 이라고 불려왔던 밑지름 47m, 높이 12.7m의 원형분이다. 고분은 지표에 큰 냇돌을 고르게 깔아 목곽 바닥으로 삼고 거기에 동서 6.6m, 남북 4.2m, 높이 2.1m로 추정되는 목곽을 설치하였다. 목곽안에는 중앙에서 서쪽으로 약간 치우쳐서 길이2.2m, 너비 80cm의 목관을 동서로 길게 놓고, 그 주위에 자갈로 너비 50cm, 높이 40cm의 석단을 쌓았다. 석단 동쪽에 접하여 길이 1.8m, 너비 1.0m, 높이 0.8m의 나무로 짠 부장품수장궤(副葬品收藏櫃)를 남북으로 길게 놓았다.
 4세기부터 6세기 전반까지 조형된 대형의 돌무지 덧널무 덤(적석목곽분)은 당시 신라의 힘과 부를 상징하고 있다. 1973년에 발굴되었는데 장신구류 8,766점, 무기류 1,234점, 마구류 504점, 그릇류 226점, 기타 796점으로 모두 1만 15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중 일부가 국립경주박물관 별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금관(金冠)과 천마도장니(天馬圖障泥)이다.
 목곽 주위에는 큰 냇돌을 밑지름 23.6m의 원형으로 목곽과 같은 높이까지 경사지게 쌓아 올리고, 목곽 위에는 약4m 높이로 냇돌을 반구형(半球形)으로 쌓아 그 표면에 진흙을 약 30cm 두께로 바르고 정상부에는 진흙속에 마주장식품(馬具裝飾品)들을 묻었다. 진흙 밖으 로는 산흙을 쌓아 봉토를 만들었고 봉토 기슭에는 냇돌을 높이 1.2m로 쌓아 호석(護石)으로 삼았다. 목관안에서는 피장자(被葬者)가 착용하였던 금관, 금제과대(金製 帶), 요패(腰佩), 팔지, 반지, 목걸이 등의 장신구류와 환두대도(頭大刀)가 발견되었고, 부장품수장궤 뚜껑 위 에서는 금제조익형관식(金製鳥翼形冠飾)과 금제접형관식 (金製蝶形冠飾) 및 금동모(金銅帽), 금동제경갑(金銅製脛甲) 등의 파편이 발견되었다.
 수장궤 안에서는 투조금동판식죽심장니(透彫金銅板飾竹心障泥), 백화수피제(白樺樹皮製), 천마도장니, 은제/금동제 안장 등의 마구류가 위쪽에 놓였고, 그 밑에 백화수피제 채화판 (彩畵板)이 있었다. 이들 밑에는 금·은·금동 및 청동으로 된 각종 그릇과 많은 칠기와 유리그릇이 있었고, 맨 밑에는 쇠솥과 각종 토기들이 가득 차 있었다.
 석단위에서는 동쪽에서 금모(金帽)·은제과대 등의 장신구류가 발견되었고 그밖의 자리에서는 환두대도를 비롯한 각종 무기류와 철정(鐵鋌)이 나왔으며, 금동제식리(金銅製飾履)는 서북쪽 모서리에서 발견되었다.
 금관은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시대 금관 가운데 금판(金板)이 가장 두꺼우며 금의 성분도 우수하다. 또한 천마도장니는 천마총 출토품 가운데 세상을 가장 놀라게 한 유품이다. 장니란, 말 양쪽 배에 가리는 가리개로, 흙이나 먼지를 막는 외에 장식물로도 사용되었다. 자작나무 껍데기를 여러 겹으로 겹쳐서 누빈 위에 하늘을 나는 천마를 능숙한 솜씨로 그렸는데, 지금까지 회화 자료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던 고신라의 유일한 미술품이라는 데 큰 뜻이 있다. 이 고분의 명칭을 천마총이라고 한 것도 여기에 연유한 것이다. 이 무덤은 지하나 지상에 덧널(목곽)을 짜놓고 그 속에 널과 껴묻거리를 넣은 후 목곽의 위에 돌을 쌓고 그 위에 봉토를 씌우는 특이한 구조이다. 주 부분이 목곽이기 때문에 세월이 지나면 썩고 위의 적석과 봉토가 내려앉아 내부가 노출되기 어렵다. 구조상 합장이 어려워 단독묘가 되며 후장의 풍습에 따라 많은 유물이 부장됨으로써 오늘날 신라의 유물을 많이 접할 수 있게 된 원인이 되었다.

[천마도]  신라(6세기경), 53×75cm, 국립경주박물관 소장(경북 경주시 황남동 천마총 출토). 국보 제207호. 천마총은 1973년에 황남대총의 발굴을 위해 시험발굴을 하여 알려지게된 5세기 말∼6세기 초의 전형적인 단곽식(單槨式) 돌무지덧널무덤이다. 지상에 높이 2m 정도의 덧널을 짜 놓고 그 안에 널을 안치한 후, 이 덧널 위에 높이 약 4m의 돌무지를 쌓고 그 위에 봉토를 덮은 구조로 무덤 전체의 규모는 바닥밑지름 51.6m, 높이 12.7m의 규모이다. 이 무덤은 원래 155호분이라 불리어 왔는데, 천마총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천마도가 그려진 말다래가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이 무덤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제21대 소지마립간(479-499)이라는 설과 지증마립간(500-513)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천마도는 신라의 그림 수준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말다래는 말을 탄 사람의 옷자락에 진흙 등이 튀어 묻지 않도록 말의 배 양쪽에 늘어뜨린 네모난 판인데, 자작나무 껍질로 판을 만들어 중앙에 하늘을 나는 말을 그리고 그 가장자리에 당초문(唐草文)을 돌렸다. 말다래는 가로 75cm, 세로 53cm의 크기이다. 안쪽 주공간에 백마를 그린 것인데 말은 네다리 겨드랑이에서 고사리형 날개가 나오고 길게 내민 혀바람에 나부끼는 갈기와 위로 솟은 꼬리 등이 하늘을 나르는 천마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 천마는 사실적인 그림이 아니고 백색 일색이기 때문에 말의 몸에 힘이 나타나 있지는 않으나 실루엣으로서는 잘 묘사되었고 둘레의 인동당초문에도 각부가 정확한 비율로 구성되었으며 고구려 사신총 등에서 보는 완숙한 당초문에 비해 손색이 없다.


[천마총 금과대(天馬塚金죡聖) : 허리장식]  신라(6세기경)의 허리띠 및 허리 패물. 국보 제190호.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과대(44개) 길이 125 cm, 요패(13개) 최장 길이 73.5 cm인 이 허리띠는 목관 안의 피장자의 허리 위치에서 착용된 채 발견되었다. 허리띠 안쪽에 대어 있던 가죽은 이미 모두 삭아 없어져버렸다. 금허리띠는 44개의 과판(띠를 구성하는 판)과 그 양끝은 띠고리와 고리에 끼우는 부분으로 되어 있으며 모두 13조의 허리장식이 달려 있다. 과판은 구름 모양이 뚫은 무늬로 새겨져 있고, 전면에 9개의 작은 구멍이 뚫려 있어 안에 댄 가죽에 못을 박게 되어 있다. 이 과대는 신라 과대로서는 가장 큰 것이다. 허리 장식은 기본적으로 긴 타원형 금판이 사각형의 연결판에 의해 다섯 개가 연결되어지고, 그 끝에 꼬리장식으로 숫돌 모양, 곡옥, 유리옥, 족집개, 구멍 뚫은 병 모양, 고기 모양 등이 달려 있다. 신라의 금관과 함께 신라의 독특한 장신구이며, 중국 남조(南朝) 양(梁)나라 때의 고분에서도 비슷한 과판들이 발견되었으나 요패수식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구로구입시미술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