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대목구 설정 187주년 기념 미사
김태윤 라파엘 선생님이 그리신 성화
1.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파견'(본성전)
2. 돌아온 탕자(교육관)의 축성식을 시작으로
조선 대목구 설정 187주년 기념 미사가
2018년 9월 8일(토) 용산 성당에서 있었습니다.
축성식 및 미시 집전은 염수정 추기경님이 하셨습니다.
<조선 대목구 설정 과정과 의의>
선교사의 도움 없이, 서적을 통해 자생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인 조선은, 포르투갈의 보호권 아래에 있던 북경교구의 도움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인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1794년 12월 말, 한양에 도착합니다.
입국 후 6년간 사목활동을 하신 주문모 신부가, 신유박해 때인 1801년 5월 31일, 새남터에서 순교한 후, 조선은 30여 년간 사제 없이 박해를 피해, 숨어서 교우촌을 형성하며, 신앙생활을 이어나갑니다.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교우들은 끊임없이 성직자 영입운동을 합니다. 이여진에 의하여 교황님과 북경 주교에 보내진 1811년 신미년 편지가 있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10여년 후인 1824년, 정하상과 유진길은 교황님께 직접 청원하는 편지를 북경교회에 보냅니다.
조선대목구 설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 편지가 2년이 지난 1827년 로마 포교성성에 도착하고, 조선 교우들의 염원에 감동한 레오 12세 교황은, 포교성성 장관 카펠라리 추기경에게 대책 강구를 지시합니다.
포교성성은 여러 수도회에 서한을 보내어, 조선에 파견할 선교사를 요청하였지만 북경교구를 관할하고 있던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보호권을 내세워 조선교회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여서,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합니다.
(보호권이란, 십자군 운동 실폐 후, 힘이 쇠약해진 교황들이 예수님의 복음 전파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신대륙에 적극 진출하는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왕실에 식민지 독점권과 선교사나 책임자들의 임명권 및 교회 설립권 등을 인정해 주면서, 그들의 선박과 군대를 이용해, 선교사들의 파견 및 물자보급에 도움을 받는 것이다.)
예수회와의 접촉 실패 후, 포교성성은 파리 외방전교회에 조선을 맡아줄 것을 의뢰하지만, 파리 외방전교회에서도 여러 가지이유를 들어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합니다. 당시 파리 외방전교회는 단일지도 체제가 아닌 여러 지역의 장상들이, 다수결로 주요 사안들을 의결하는 방식이어서, 포교성성의 제안을 받은 파리 신학교 교장인 랑글로와 신부는, 아시아 지역에 파견 된 파리외방전교회 모든 회원들에게 의견을 묻기 위해, 공동 서한을 발송합니다.
현재의 태국인 시암 대목구에서 사목을 하고 있던 브뤼기에르 신부가 이 공동서한을 읽고, 장상들과 각지의 회원들에게 파리 외방전교회의 부정적인 의견에 조목조목 반대하는 의견과 더불어 "제가 하겠습니다."라는 편지를 1829년 5월 19일에 보냅니다. 포교성성과 파리 외방전교회의 교섭이 중단된 지 1년이 지나 보내진 브뤼기에르 신부의 이 편지 덕분에, 조선교회의 운명은 기사회생하게 됩니다. 브뤼기에르 신부의 조선전교의 열정은, 마침내 1831년 9월 9일 그레고리오 16세 교황님이 조선을, 북경교구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대목구로 설정하는 칙서를 반포하게 합니다.
이렇게 조선 대목구의 설정으로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들이 조선에 들어올 수 있게 되자, 초대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는 서한을 받은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을 향해, 말레이시아 페낭을 떠난 지 3년 만에, 조선을 눈앞에 둔 마가자에 도착하지만,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비협조로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경로로 여행을 해야 했기 때문에, 끝내 조선에 입국하지도 못하고 마가자에서 병사합니다.
하지만 마가자 근처 서만자에 같이 있었던 모방 신부가 조선으로 들어오는 데 성공합니다.
1831년 조선 대목구의 설정에는
첫째, 조선 신자들의 열성적인 청원과
둘째, 이 열성에 감동한 교황님과 포교성성의 적극적인 해결 의지와
셋째, 무위로 돌아가기 직전, 조선 선교사를 지원한 브뤼기에르 신부의 헌신적인 태도와
넷째, 포르투갈의 보호권을 약화시켜 아시아선교가 순수한 복음 선포의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하려는 당시 교황청의전반적인 선교정책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조선 대목구 설정은 조선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유럽에서도 큰 판도를 바꾸게 됩니다. 평소 대목구 신설에 격렬히 저항하는 포르투갈 주교들과 신부들의 방해로 초대조선 대목구장인 브뤼기에르 주교가 만주에서 병사하자 교황청에서는 보호권을 약화시키는 조치들을 취하기 시작합니다.
즉, 조선대목구 설정의 교회사적 의의는, 포교성성이 직접 아시아 선교를 관장하여, 포르투갈의 보호권을 제한하고, 오직 신앙적인 관점에 입각해 통일된 선교정책을 펴는 출발점이 되었다는데 있습니다.
표지설명 : 이병호 주교님
당시, 박해나 음식, 토질병 등 우리나라를 포함한 아시아 여러 나라의 상황에 이 지역으로 파견된 선교사들의 평균 활동 기간은 3년이었다.
선교지로 떠나는 신부님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고 몇 년 안에 확실히 목숨을 잃게 될 것을 내다보며, 순교자 유해에 하듯이 그분들의 발에 친구(親口)하고 있는 교우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파리 외방선교회 본부 현관에 걸린 이 그림에 나타나는 신부님들은 모두 한국에서 병인박해(1866년) 때 순교하신 분들이다.
그리고 그 성당의 성가대지휘자였던 구노는 학창 시절부터 절친한 친구이자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가졌던 앵베르 주교가 한국에서 순교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깊은 슬픔에 빠져 유명한 '아베마리아'를 작곡하였다고 한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